조선 태조 이성계의 한양 천도 프로젝트 역사 이야기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기운이 쇠한 고려의 수도 개성을 떠나서 새로운 도읍을 찾고 싶었다. 이성계는 고려의 망국의 한이 서린 개성에 계속 있기가 싫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마찬가지이나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할 때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이 많다.

태조 이성계가 개성을 떠나 새로운 도읍지를 정하는데 있어서는 세 명의 책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바로 무학대사, 정도전, 하륜 등 3인이다. 이들 세 명은 이성계가 아끼는 책사이자 전략가로 조선 건국의 디딤돌이 된 인물이었고, 이성계는 전적으로 이들을 또한 신뢰했다. 그래서 각기 세 명은 나름대로 새로운 도읍지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광화문-조선의천도-역사

조선의 한양 천도 프로젝트

최종 낙점지는 바로 한양이었다. 그것도 삼각산을 주산으로 하는 위치에 새로운 궁궐을 짓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그렇다면 과연 한양 천도 프로젝트는 어떻게 진행되었으며 그것을 둘러싼 조선 왕조의 역사 이야기는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요? 오늘 <상식은 권력이다>에서 한번 알아보기로 합니다.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당면과제는 바로 새 도읍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성계가 한양 천도 프로젝트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17일에 드디어 새로운 조선의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즉위 한지 한 달도 안 된 8월 13일에 한양으로 천도(遷都)하라고 명령을 내렸다.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만 많고 제대로 천도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하들은 늘 그렇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세가대족(世家大族)들이 함께 싫어하는 바이므로, 이를 중지시키려는 것이다. 재상(宰相)은 송경(松京·개성)에 오랫동안 살아서 다른 곳으로 옮기기를 즐겨하지 않으니, 도읍을 옮기는 일은 경들도 역시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왕조가 바뀌고 천명을 받는 군주는 반드시 도읍을 옮기게 마련인데, 내가 계룡산(鷄龍山)을 급히 보고자 하는 것은 친히 새 도읍을 정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태조실록』 2년 2월 1일)

원래는 조선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으로 도읍을 천도하다가 한양으로 변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신도안은 천하의 길지로 꼽혔던 곳으로 이성계의 마음을 한 때 사로 잡기도 했지만, 최종적으로 다시 한양으로 결정되었다. 지지부진했던 조선의 도읍지 천도 문제를 놓고 여러가지 대안들이 있었는데 신도안과 한양 가운데 어디로 할 것인지가 문제였다. 무학대사는 수태극(水太極) 산태극(山太極)의 지세를 갖춘 계룡산 신도안을 도읍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무학대사와 이성계는 직접 계룡산 신도안 일대를 돌아보기도 했다.

신도안 천도 공사 중지하고 한양으로 변경

태조 이성계가 계룡산 신도안을 보고 여기에 새로운 도읍을 정한다면서 공사를 시작했으나 수운(水運)이 부족하다는 사유로 중간에 멈추게 되었다. 신도읍지(新都邑地)로 1년간 대궐공사를 했던 곳은 지금의 계룡시 신도안면 용동(龍洞)·부남(夫南)·석계(石溪)·정장리(丁壯里) 일대이다. 그러나 계룡산 신도안에 새로운 도읍을 정하고 약 10개월 남짓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하륜의 반대로 계룡산 신도안 천도는 중지되고 만다. 그래서 지금도 그 당시 대궐 공사를 한 흔적이 120여개에 걸쳐 지금도 곳곳에 남아 있다고 한다.

신도안 천도의 반대 분위기를 이끈 것은 당대 풍수도참(風水圖讖)의 대가로 통했던 개국공신 하륜이었다. 그는 “도읍은 중앙에 있어야 하는데, 계룡산은 남쪽에 치우쳐 있고, 수파장생(水破長生)이기 때문에 도읍을 건설하기엔 적당하지 않습니다.”고 반대의 논리를 세웠다.(『태조실록』 2년 12월 11일)

수파장생(水破長生)은 (금강의) 물이 (나라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장생(長生)’의 기를 꺾어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일단 신도안 천도 공사는 올스톱 되고 다시 한양으로 바꿉니다. 그러고 보면 이성계도 참 왕이 되서 귀가 엷은 것 같기도 합니다. 궁궐 공사까지 한참 진행된 마당에 중간에 다시 또 한양으로 도읍지를 바꾼 것을 보면 이성계의 마음도 오락가락 했나 봅니다.

한양, 어디에 왕궁을 지을 것인가

이렇게 한양으로 조선의 새로운 도읍지가 정해지자 이제는 왕궁을 어느 곳, 어느 방향으로 할 것 인가를 놓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무학대사, 정도전, 하륜은 바로 왕궁의 방향을 결정짓는 주산(主山)을 놓고 다른 주장을 합니다. 무학대사는 인왕산, 정도전은 백악산(북한산, 삼각산), 하륜은 안산(무악산)을 주산으로 주장했습니다.

하륜은 지금 연세대가 있는 안산 일대를 관심있게 봤습니다. 이곳은 삼각산과 인왕산 그리고 안산으로 이어지는 산세의 흐름이 좋으면서 한강과 인접해 조운(漕運)에 유용하여 상업적 활용도가 클 것이라는 관점이 있었다. 그렇지만 무학대사와 성석린 등 몇몇 관료들이 반대했습니다.

한양 천도론이 나오자 하륜은 무악으로 천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태조 3년 8월 12일 그가 올린 글이다.

“우리나라 옛 도읍으로 국가를 오래 유지한 곳은 계림과 평양뿐입니다. 무악의 국세(局勢)가 비록 낮고 좁다 하더라도, 계림과 평양에 비하여 궁궐터가 실로 넓고, 더구나 나라의 중앙에 있어 조운이 통하며, 안팎으로 둘러싸인 산과 물이 또한 의지할 만하여, 우리나라 전현(前賢)의 비기(秘記)에 대부분 서로 부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륜의 주장은 관철되지 않았다. 안산 일대는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약하고 도성으로서 부지도 좁다는 이유로 그곳이 왕궁 터를 부적절하다는 말도 있었다. 그러자 이성계는 정도전, 무학대사 그리고 서운관(書雲觀)들을 데리고 무악산에 올랐는데 한 서운관이 “무악은 나라를 도적질 할 사람이 사는 기운을 가진 땅”이라고 평가하자 이 말을 들은 이성계는 바로 무악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는 야사도 전해집니다. 아무튼 왕궁을 짓는 터에 있어 여러 주장이 있었는데 이성계는 결국 정도전의 손을 들어주는 쪽으로 갑니다.

참고로 하륜이 무악산을 주산으로 하면서 왕궁을 짓자고 한 곳이 바로 지금의 연세대학교 터이다. 만일 하륜의 말대로 이곳에 왕궁이 들어섰다면 과연 조선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까?

정도전의 삼각산 주산론 최종 낙찰

일단 안산이 후보지에서 제외되자 남은 것은 정도자의 북악산(삼각산) 주산론과 무학대사의 인왕산 주산론으로 압축됩니다.

무학대사는 “낙산은 좌청룡으로 삼기에 부족하니, 왕조의 기틀이 흔들릴 것이 우려됩니다. 반드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과 남산을 좌우의 청룡백호로 삼아야 합니다” 고 주장했다.
정도전은 “제왕이 남쪽을 바라봐야지, 어찌 동쪽을 보고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중국의 모든 황제들이 궁을 모두 남향으로 지은 데는 이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고 강변했다.

궁궐을 짓는 구체적인 위치를 두고 또 논쟁이 펼쳐집니다. 조선의 설계자 정도전과 무학대사 간에 의견이 서로 각각이었는데 결국 이성계는 정도전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무엇보다 “북악산을 주산으로 해야 궁궐을 남향(南向)으로 배치할 수 있다. 임금은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정도전의 명분에 힘이 실렸습니다. 무학대사의 말대로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으면 궁궐은 동쪽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정도전이 주장했던 ‘북악산 주산론’에도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습니다. 우백호인 인왕산에 비해 좌청룡인 낙산(현재 동숭동 일대)의 산세가 너무 약한 것입니다. 그러나 낙산과 좌청룡ㆍ우백호의 짝을 이루는 인왕산은 무려 해발 332m에 달합니다. 따라서 우백호의 기운이 좌청룡보다 강하게 되는데, 이것을 두고 나중에 조선 왕조의 왕위 계승 문제와 연관을 짓기도 합니다.

풍수에서 좌청룡이 약하면 장자(長子)인 정통 계승자가 약해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과연 풍수의 영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8명에 불과합니다. 좌우지간 조선 왕조에서 장자로 왕이 인물은 적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인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에는 개성과 한양의 풍수를 비교하면서 이렇게 적습니다.

“개성은 산과 골짜기로 둘러싸여 막힌 형세라 권신들의 발호가 많았던 반면 한양은 북서쪽 우백호가 높고 남동쪽 좌청룡이 낮아 맏아들인 장자가 잘 되지 못하고 차남 이하 아들이 잘되어 오늘날까지 임금과 재상, 거경(巨卿. 높은 벼슬아치)은 장남 아닌 사람이 많다.”

그래서 북악산을 주산으로 결정하고 왕궁을 그곳에 짓기로 밀어 붙였던 정도전도 여기에 관해서는 자신이 없었던지 나름대로 보조장치를 답니다. 그것은 낙산이 위치한 흥인문(興仁門ㆍ동대문)의 현판에 ‘지(之)’를 하나 추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고 적혀 있는 것입니다. 갈 지(之)‘자는 산의 모양과 비슷한데 이 글자를 추가하면 낙산의 약한 기운을 보충할 것이라는 생각에서입니다.

정도전에게 패한 하륜, 왕자의 난에서 복수

정도전과 하륜은 조선 건국사에 있어 라이벌이자 앙숙이었다. 조선 건국에 있어 공신이기는 하지만 어찌보면 상극이다. 정도전이 이상주의 경세가(經世家)였다면 하륜은 현실주의 경세가였다. 우리가 조선 왕조가 들어 서는데 있어서 이성계와 정도전 이야기는 귀가 따갑게 들었지만 의외로 하륜에 대해서는 잘 알려진 바가 없다. 그렇지만 하륜은 조선 왕조 출범에 있어 결코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하륜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실질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그는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서 정도전과 남은(南誾) 일당을 불의에 습격하여 죽여 버린다. 정도전은 자신이 세운 경복궁 옆 송현동에 살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곳에서 자신의 최후를 마친다. 정도전에 의해서 자신의 천도 계획은 무산되었지만 결국 하륜의 구상대로 또 조선이라는 나라는 굴러가는 형국이 된 것입니다.

조선의 한양 천도 연대기

1388년 6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1392년 7월 17일, 개성의 고려왕궁인 수창궁에서 임금으로 등극
1393년 1월2일(태조 2년), 왕가의 태실지를 관장하던 권중화가 계룡산을 새도읍지로 추천, 이성계가 5일간 현장답사 후 즉시 시공착수, 그렇나 하륜의 반대로 10개월만에 중단
1393년 3월 15일, 국호를 조선이라 정함
1394년 10월 28일, 신도궁궐조성도감이라는 임시기구를 설치하여 준비한 후 한양으로 천도, 한양천도를 위해 이궁인 창덕궁을 짓고 이곳으로 천도
주산을 정도전은 북악산(삼각산)을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장, 정도전의 승리
1395년 9월, 390여칸의 새 궁궐 완성
1396년(태조 5년), 2년여 공사끝에 한양둘레 18km 성곽 완성, 정도전이 4대문, 4소문의 이름 지음
1398년 정종 등극한 후 개성으로 천도
1405년 10월(태종5년), 한양으로 다시 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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