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강감찬 생애와 업적,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의 주인공

지금이나 옛날이나 한 시대를 풍미하였던 인물은 사람들의 기억에 깊게 자리 잡는다. 최근 KBS-TV 역사드라마인 ‘고려거란전쟁’의 주인공인 강감찬도 역시 그렇다. 강감찬(姜邯贊) 장군은 고려를 침공한 거란의 10만 대군을 물리친 ‘귀주대첩‘의 주인공이다. 그는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과 조선시대 이순신의 ‘한산도대첩’을 가리켜 우리나라 ‘3대 대첩’을 이끈 장군이다.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구국 3대 영웅’으로 회자되는 인물 가운데 한 명이 바로 강감찬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구국의 영웅은 어디선가 혜성같이 나타났다 사라진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도 그러했고 강감찬 장군도 그렇다. 강감찬은 서희, 양규, 현종, 최영, 정몽주와 더불어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걸출한 위인 가운데 한 명이다. 고려시대에 동아시아의 엄청난 군사 강국이었던 거란을 물리친 장군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우리는 강감찬에 대해 모르는 부분이 많다.

조선시대 역사는 사람들이 잘 알고 있지만, 고려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부분이 많다. 물론 시대적으로 고려가 조선 보다 훨씬 이전이기에 사람들의 관심이 떨어져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는 늘 탐구할 것이 많다. 그래서 오늘 ‘상식은 권력이다’에서 ‘강감찬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조망해 본다.

강감찬 생애와 업적

먼저 강감찬의 생애를 살펴보면서, 그의 업적과 귀주대첩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함께 고찰해 본다.

강감찬(姜邯贊)의 본관은 금천이고, 그의 어릴 때 이름은 ‘은천(殷川)’이라 불렸다. 출생 일화에 따르면 ‘은천’은 다른 아이에 비해서 키도 작고, 왜소한 얼굴이며 마마자국도 있어서 무척 못생긴 편이었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어릴 때 잘 나가지는 못했지만 강감찬은 크면서 자신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간 사람이라 하겠다.

강감찬의 원래 이름은 강은천(姜殷川)이었다. 강감찬(姜邯贊)은 과거 급제 이후에 개명한 이름이다.

강감찬 장군 탄생과 낙성대

강감찬 장군은 948년 지금의 서울시 관악구 봉천동 218-14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 낙성대라 불리는 곳이다. 낙성대는 강감찬 장군이 태어난 생가터로 고려시대에는 ‘금주’로 불렸다가 조선시대엔 ‘금천’으로 불린 곳이다. 이 곳을 ‘낙성대’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강감찬이 태어나던 날 밤 마침 이곳을 지나던 중국 사신이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져서 어느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별이 떨어진 곳’이라고 ‘낙성대’로 명명하였다.

중국 사신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관원을 불러서 별이 떨어진 집을 찾아가 보도록 하였다. 그런데 그 집 부인이 아들을 낳아서 그가 곧 강감찬이다. 훗날, 송나라 사신이 와서 그를 보고 깜짝 놀라서 큰절을 올리면서 “문곡성(文曲星)이 어디로 갔나 했더니, 고려에 와 있었구료!”하여 그가 북두칠성의 네 번째 큰 별 화신임을 확인했다는 설화가 <세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통해 전해진다.

강감찬의 선조는 고구려 말기의 유명한 장군 강이식(姜以式)이다. 진주 강씨 집안이다. 또한 아버지는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개국에 일조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강궁진(姜弓珍)이었다. 이것으로 보아서 강감찬 장군의 집안은 대대로 무장의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그가 문신으로 등용은 되었지만 장군으로 고려를 구한 것을 보면 나라를 지키는 집안 내력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역사를 조금 아는 분은 고구려 강이식 장군이 얼마나 대단한 장수였는지 알 것이다. 좌우지간 강감찬 장군이 그의 후손이라니 이 또한 명쾌한 유전자의 힘이다.

강감찬 설화

강감찬에게는 설화가 있다. 출생시 설화, 성장시 일화, 벼슬한 이후 일화가 있다.

먼저 출생시 설화를 보면 문헌설화에서 강감찬이 문곡성의 화신이라고만 기록한 반면에, 대부분의 구전설화에서는 강감찬이 여우 여인의 아들로 태어났다고 한다.

구전 설화에 따르면, 강감찬의 아버지가 훌륭한 태몽을 꾸어서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본부인에게로 돌아오던 길에 여우 여인과 만나서 관계를 맺어 낳게 된 아이가 바로 강감찬이라는 것이다. 강감찬의 성장시 일화는 그가 곰보가 된 일과 귀신을 퇴치한 일이다. 강감찬은 스스로 얼굴이 너무 잘생겼기 때문에 큰일을 할 수 없다 하여, 마마신을 불러 얼굴을 얽게 하여 추남이 되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한 설화이지만 강감찬의 탄생과 성장에 있어 전해지는 이야기는 바로 그가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다는 점을 반증한다.

강감찬은 원래 장군이 아니었다

고려거란전쟁에 있어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위대한 장군으로 강감찬은 묘사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전쟁을 잘 하는 장군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강감찬은 원래 무장이 아니었다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강감찬은 젊은 날에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문신으로 처음에는 그리 잘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나중에 문하시중에 오른 문관이다. 강감찬은 정식 무관직에 봉해진 적이 없다. 제3차 여요전쟁 때 받은 상원수직은 임시 군단의 지휘관이라 비상설직이므로 품계가 있는 공식 무관직이 아니다. 따라서 알고 보면 사실 강감찬은 30년 넘게 문신으로 일했고, 군인으로 지낸 것은 고작해야 3개월에 불과했다는 학설도 있다.

60세가 넘어서 이름을 알리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강감찬은 젊은 시절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지략이 출중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고려 때 983년(성종2)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지만 이 때 나이가 36세로 늦게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지금은 30대라고 하면 젊은이라 하겠지만, 평균 수명이 고작 40대 였던 고려시대를 생각해보면 그가 관직에 나선 것은 정말 나이가 많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과거에 붙고 관직을 받았지만 1009년(목종 말년)에 예부시랑이 될 때까지 사실상 그의 이름은《고려사》에 나오지도 않는다. 그만큼 존재감이 없던 문신이었다.

강감찬이 드디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그의 나이 60이 넘어서였다. 강조의 정변으로 젊은 현종이 즉위하고 나서부터 강감찬은 출세길이 열렸다. 현종이 즉위하자마자 1010년에 요나라의 성종이 40만 대군으로 침공하자 많은 신하들은 항복을 외쳤지만 그는 이것을 반대하고 홀로 몽진을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이 대목에 주목해 봐야 한다. 1010년에 강감찬 장군의 나이는 63세였다. 지금도 나이가 60이 넘으면 노인네라 할 수 있는데, 그 당시 63세 늙은 신하가 등용된 것이다.

강감찬의 업적

현종은 어렵게 왕위에 올랐지만 사실 믿을만한 신하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한직으로 있던 강감찬을 등용한 것은 그가 나이를 먹은 노인이지만 그래도 헌종이 믿을만한 신하는 그였기 때문일 것이다. 현종이 거란군을 피해서 몽진 할 때 훗날 도망갔던 신하들은 모두 처벌되었는데 강감찬은 따로 처벌 받은 기록이 없다는 걸 보더라도 그는 현종에게 충직했던 것이 분명하다. 아무튼 강감찬은 이러한 공을 인정 받아서 그 다음해에 중추사에 올랐다가 곧바로 이부상서가 되었다. 1012년에 강감찬은 동북면행영병마사가 되어서 여진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그러다가 현종 9년(1018)에 가서 서경유수와 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강감찬은 현종 즉위 전까지는 중앙 정계에 그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했던 인물이다. 그렇지만 현종의 신뢰를 얻으면서 승진에 승진을 하여서 문하시중 다음 가는 자리까지 올랐다. 결국 강감찬은 나이를 많이 먹은 노인이 되어서 늦게 출세하고 능력도 늦게 발휘된 전적을 보면 대기만성형 인물이다.

1019년에 거란의 제3차 침공이 있었다. 이때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로 임명되어서 고려군의 총사령관으로 활약한다. 그는 대거란 방어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이때 고려군 사령부는 성공적으로 기선을 제압하여서 거란군을 물리친다. 청야전술과 유격 전술, 귀주 대첩에서 보여준 망치와 모루 전술까지 합쳐서 강감찬은 철저한 작전을 수립하고 완벽하게 실행함으로써 재침입을 해 온 거란군을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고려거란전쟁, 귀주대첩 승리의 주인공 강감찬

1019년 거란이 고려를 세 번째 침략한다. 이때 거란은 소배압을 총사령관으로 앞세워 10만의 거란군을 몰고 왔다. 소배압은 거란 황제가 가장 믿을만한 장수였다. 그의 이름인 배압은 거란어로는 바야르(Bayar)로 읽는데, 바야르는 몽골어족 계통의 언어에서 ‘기쁨’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배압은 그의 이름이 ‘기쁨’의 뜻을 갖고 있지만 귀주대첩에서 강감찬에게 크게 패배하면서 거란에게는 ‘슬픔’을 안겨준 인물이 된다.

당시 소배압은 처음부터 고려의 성을 하나씩 점령하기 보다는 바로 고려의 수도 개경을 단숨에 함락해서 전쟁을 단숨에 끝내버리겠다는 전략을 갖고 있었다. 이때 현종은 강감찬에게 고려군의 총지휘를 맡기고 거란군과 맞서 싸우게 하였다.

강감찬은 소배압이 이끄는 거란군이 오자 군사들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출동했다. 흥화진은 개경으로 가기 위해 거란군이 꼭 지나쳐야 할 전략적 요충지였다. 강감찬은 흥화진 옆 하천에 이르러 기병 1만 여 명을 뽑아 산골짜기 안에 숨기고 큰 줄로 쇠가죽을 꿰어 묶어 성 동쪽의 큰 개천을 막고 거란군을 기다렸다.

거란군이 도착하여 강을 건너려고 하자 막고 있던 쇠가죽을 끊어 물줄기를 터뜨렸다. 그러자 거란군은 큰 물이 몰아치자 우왕좌왕하였다. 이때 숨어 있던 고려의 기병들은 혼비백산한 거란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둔다. 이것은 흥화진을 우회하여 가려던 거란군의 전술을 미리 정확히 예측하고 준비한 고려군의 큰 승리였다. 하지만 거란군은 흥화진에서 이렇게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미친 척하고 개경으로 진격을 계속한다. 10만 명이라는 대군이었으니 거란군은 피해를 입었어도 이길 승산이 있었다고 소배압은 믿은 것이다.

그러자 강감찬은 거란군의 속셈을 알아채고 군대를 나누어 일부는 거란군을 추격하게 하고, 일부는 따로 개경을 지키도록 하였다. 추격하던 고려군은 만 여 명의 거란군의 목을 베기도 하는 큰 전과를 거두었다. 한편 거란군이 개경 인근에 도달했지만 고려군은 이미 빈틈없는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거란군은 계속 공격을 시도했지만 이것도 실패한다. 이렇게 10만 대군을 끌고 왔던 거란군이지만 결국 패배가 계속되면서 소배압은 더 이상 고려를 공략할 자신감을 잃고 개경 포기하면서 군사를 되돌리게 되었다.

소배압은 철수를 하는 과정에서 귀주에 도착하였다. 귀주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한 면만 평지와 연결되어 있어 방어하기가 쉬운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런데 강감찬은 성 안으로 들어가 수비하지 않고 들판에 군사를 배치했다. 강감찬은 귀주 동쪽으로 퇴각하는 길목을 막고 소배압의 거란군과 정면으로 맞서 싸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앞서 개경으로 보낸 군대로 하여금 거란군의 뒤를 쫓게 해 협공을 준비하였다.

고려군이나 거란군이 모두 군사들이 물러설 기세를 보이지 않고 치열한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승패는 좀 처럼 알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이때 고려의 지원군 1만 명이 도착하면서 전세는 고려에 결정적으로 유리해졌다. 때마침 갑자기 북쪽의 거란군 쪽을 향해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천우신조(天佑神助), 강감찬과 귀주대첩

이것을 바로 천우신조(天佑神助)라고 한다. 고려군은 하늘과 신령이 주는 도움을 받은 것이다. 거세 바람을 타고 고려군이 퍼붓는 화살이 거란군 진영으로 소낙비처럼 쏟아졌다. 반대로 거란군의 화살은 바람의 역풍을 받아서 고려군에게 날아가지 못했다. 하늘이 고려를 돕는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강감찬은 이때를 놓치지 않고 총공격 명령을 내리자 사기가 오를대로 오른 고려군은 맹렬하게 거란군을 공격하였다.

거란군은 전세가 무너지자 달아나기가 급급했다. 한편 고려군은 끝까지 이들을 쫓아가 공격하였는데 거란군의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으며 포로로 잡힌 병사와 획득한 말과 낙타, 병장기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결국 고려에 쳐들어왔던 10만 명의 거란 군사 중 살아서 돌아간 자가 겨우 수천 명에 불과하였다.

귀주대첩에서 소배압의 거란군은 참패하여 궤멸당했고, 소배압은 겨우 목숨만 건진 채 거란으로 도망쳤다. 결국 고려와 거란의 전쟁에서 소배압은 참혹한 패배를 하였다. 이렇게 강감찬이 거란군을 맞아 귀주에 크게 승리하였다고 하여 이 전투를 ‘귀주 대첩’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란, 귀주대첩 이후 고려 침공 포기

소배압이 패전했다는 소식에 거란의 황제는 크게 빡쳤다. 거란 황제는 소배압을 보자 마자 “네가 적을 얕잡아보고 적국 깊이 들어가 이 지경이 되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려는가? 내가 너의 낯가죽을 벗긴 뒤에 죽일 것이다.”까지 하였다니 그 분노가 무척 컸을 것이다. 하기야 10만명이라는 대군을 끌고 가서 살아온 병사가 얼마 안되었니 거란 황제로서는 돌아버릴 지경이었을 것이다.

거란의 황제였던 성종은 패장이 되어 돌아온 소배압에게 거친 욕설을 퍼붓었지만 실제로 귀양을 보내지는 못했다고 한다. 소배압은 선제였던 경종의 부마이자, 자신에게는 매제이고 장인이자 사촌형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귀추대첩에서 박살난 거란은 이후부터는 아예 고려를 침입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이로서 거란과의 기나긴 전쟁은 강감찬의 성공적인 활약으로 인해서 고려의 승리로 끝나게 된 것이다.

현종의 끝 없는 신뢰를 받은 강감찬

1020년 거란의 제3차 침공을 잘 막고 강감찬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때가 그의 나이 만 74세나 되는 고령이었다. 나이도 정말 많이 먹어서 고령이 된 그는 벼슬도 이제 사양한다. 그러나 현종은 벼슬에서 물러나고자 하는 강감찬에게 지팡이를 선물로 주고 3일에 1번만 출근토록 명령했다. 이 점을 보더라도 현종이 강감찬을 굉장히 신뢰한 것은 분명하다.

역사 속 강감찬 평가

강감찬이 그 당시 위기에 빠진 고려를 구하고 귀주대첩을 성공적으로 이끈 대단한 인물이기에 역사 속에서도 그의 이름은 성대하게 전해진다.

대단하도다, 하늘이 이 백성을 사랑함이여. 국가에 장차 화란이나 패망이 올 때에는 반드시 세상에 이름난 현인을 낳아 국가의 화란이나 패망을 위하여 대비하는 것이다. 기유(1009)년, 경술(1010)년에 역신이 난을 꾸미고 강한 적국이 와서 침략하여 내부의 분쟁과 외적의 화란으로 국운이 위급하게 되었으니 이때에 강공(姜公)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나라를 다스렸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공이 조정에 들어와서는 국가의 모의에 참여하고 밖에 나가서는 정벌을 맡아, 화란을 평정하며 삼한을 회복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힘입게 되었으니, 하늘이 낳아서 이 백성의 화란과 패망을 대비한 이가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이에 참여하리오. 아아, 성대하도다.
《고려사절요》현종 22년, <강감찬 졸기>의 사관 논평

강감찬은 역사 속 큰 인물이었다는 것이 정평이다. 그래서 문곡성의 화신처럼 여겨진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는 성품도 청렴하고 검약하여 집안 살림을 돌보지 않았으며 옷이 더럽고 해져도 계속 입었다고 한다. 이러한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지는 것을 보면 강감찬은 욕심이 없는 청백리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그는 ‘한국의 곽자의’라는 평가를 받는다.

강감찬은 환갑이 넘어서 자신의 역할을 다한 인물이다. 그 당시 그 나이면 이미 살만큼 산 수명임에도 불구하고 현종의 즉위와 함께 출세길이 열렸지만 결코 자신을 권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3차례에 걸친 고려와 거란 전쟁에 있어 큰 공을 세운 후 말년에 문하시중의 직위를 받았지만 그는 권세를 누리지 않았다. 강감찬이 고려의 최고 재상이라는 문하시중 벼슬까지 지낸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배우자와 아들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기록이 한 줄 도 없다. 배우자는 성씨조차도 남아 있지 않고, 아들로는 강행경(姜行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고만 열전에 적혀 있다니, 이것만 봐도 강감찬이 얼마나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는지 추측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보통 권신들과 다르게 강감찬은 권력의 회오리 바람 속에서도 숙청되지 않고 평안한 말년까지 보낼 수 있었다. 또한 강감찬은 사후에도 구국(救國)의 영웅(英雄)으로 배향(配享)을 받는다. 따라서 고려 시대 이후에도 강감찬의 인물에 대한 평가는 계속 한국사에서 으뜸이 된다.

강감찬으로부터 오는 생각

오늘날 대한민국은 난세이다. 내우외환(內憂外患)의 연속이기도 하다. 정치는 날이 갈수록 시끄럽고 경제는 해가 갈수록 어려워진다.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할 강감찬 같은 인물이 절실하다.

요새는 모두가 자기 잘 났다는 세상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렇게 잘 났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결코 잘 난 사람이 아니다.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고 정말로 국민을 위해 일 할 사람이 필요한 때이지만, 세상을 구하겠다는 의인(義人)은 보이지 않고 이상한 사람들이 판치는 형국이다. 강감찬 장군과 같은 인물이 지금 우리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현실이 참으로 도탄(塗炭)에 빠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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