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 강조의 정변에 의문이 있다

KBS-2TV에서 고려거란전쟁 역사 드라마가 방영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역사 드라마가 TV에서 한동안 방영되지 않다가 참으로 오랜만에 보니 사람들도 여기에 관심이 크다. 고려거란전쟁에 있기 전 강조의 정변이 나오는데 드라마를 보면서 여기에 먼저 <왜, 강조의 정변이 일어났는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면 강조의 정변에 있어서 몇 가지 의문이 발견된다.

알고 보면 한반도에서 수 많은 국가들이 흥망성쇠하는 가운데 우리 역사는 사실 정변의 연속이었다. ‘정변’이란 말 그대로 기존의 통치 체제를 뒤집기 위한 봉기를 말한다. 특히 무력을 동원한 군사적 봉기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무신정변, 위화도 회군, 5.16 등 많은 정변은 다수의 인물들이 얽히고설킨 흥미로운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천추테후-김치양-강조의정변

강조의 정변

고려와 거란과의 전쟁이 발발하기 이전에 강조의 정변은 왜 일어났는가?

강조의 정변, 왜 일어났는가?

때는 바야흐로 고려의 7대왕 목종이 18세에 즉위하면서 모후인 천추태후가 섭정하였다. 천추태후(千秋太后, 964~1029)는 왕건의 손녀이며 경종의 비, 목종의 어머니였다. 천추태후는 조선 시대에는 나라를 어지럽힌 음탕한 여인으로 묘사되고 비난을 받기도 하는데 이것은 조선 시대의 성리학적 사관에 입각한 것이라는 평도 있다. 아무튼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기 직전은 천추태후가 고려의 조정을 좌지우지 하던 시절이다.

강조의 정변 배경

강조의 정변의 배경에는 천추태후의 불륜이 하나의 원인이다. 고려의 제5대 왕인 경종은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었는데 경종의 부인 중 한 명이었던 헌애왕후 황보씨는 졸지에 젊은 과부가 되었다. 과부가 된 헌애왕후가 허벅지를 송곳으로 퍽퍽 찌르면서 독수공방하기를 몇 날이었는가? 그러다가 어느날 김치양이라는 자가 승려 행세를 하고 나타났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불륜

김치양은 무슨 재주가 있었는지 헌애왕후가 머물던 천추궁에 출입하기 시작했다. 김치양은 양기가 강한 놈이라고 한다. 하여서 그는 음경을 수레바퀴에 걸 수 있을 정도였다는 썰도 있다. 결국 둘은 운우지정(雲雨之情)을 맺고, 둘에 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그러자 이러한 소문을 들은 고려의 제6대 군주이자 헌애왕후의 동복오빠였던 성종은 성질이 빡쳤다. 당장 김치양을 붙잡아 곤장을 치고 왕궁에서 쫓아내고 그를 멀리 유배 보냈다. 여기까지는 불륜사건이 간단하게 종지부를 찍는 듯 보였다. 헌애왕후가 천추궁에 있었기에 여기서부터는 천추태후라 한다. 헌애왕후가 바로 천추태후이다.

그러나 천추태후는 경종이 죽자 얼씨구나하면서 쾌재를 부르고 김치양을 사면 복권시킨다. 자신과 불륜 문제로 귀양을 보냈던 정부 김치양을 조정으로 다시 컴백시켰다. 한편 목종은 20세가 넘어도 후사를 얻지 못하였고, 그는 갑자기 병석에 누워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그러자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 사이에서 얻은 불륜의 씨앗을 목종의 후계를 이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는 어마어마한 음모를 꾸민다.

고려 왕씨가 세운 나라의 근본이 되는 왕을 왕씨(王氏)가 아닌 김씨(金氏)로 바꾼다는 어마어마한 간계를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획책하였다. 이 대목만 본다면 천추태후는 황당하기도 하고 무서운 여자 같기도 하다. 천추태후는 불륜으로 간통해서 얻은 아들을 바로 왕으로 만들 심산이었던 것이다.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왕위 계승 음모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기들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고자 계획을 착착 진행합니다. 조정의 신료들을 포섭하고, 대량원군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밉니다. 대량원군을 죽이려고 자객을 보내거나 또는 음식에 독을 타서 보내기도 하지만 대량원군이 왕이 될 팔자인지 모든 위기를 벗어납니다. 이때 대량원군을 도와준 스님이 바로 진관스님이라 합니다. 그래서 후에 대량원군이 고려 현종이 된 후에 진관스님을 위해 사찰을 지으니 이것이 바로 진관사입니다.

​천추태후의 이러한 계획을 알아채린 목종은 아무리 어머니이지만 왕씨가 아닌 김씨로 왕위의 적통을 바꾸려는 것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목종은 왕욱의 아들인 대량군을 자기의 뒤를 잇게 하려고 했다. 그리고 무슨 일 생긴다면 서북면도순검사 ‘강조’에게 왕궁을 호위할 것을 몰래 명하였다.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 나라 안에서는 온갖 썰이 돌았다. 임금은 병환이 몹시 위중해 오늘 내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데 김치양 일당이 왕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 대목에서 어찌 보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던 것 같다. 왕위를 빼앗으려면 은밀하게 진행을 하여도 부족할 판에 동내방네 소문이 다 났으니 이것이 어찌 성사될 수 있겠습니까? 인터넷이나 SNS가 없었던 고려 시대에 대중에게 이렇게 왕위 찬탈에 대한 계획이 저잣거리까지 소문으로 돌았다면 누가 봐도 수상하니 성공하기는 어렵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도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꾸준하게 목종의 후계자로 자신의 불륜의 씨앗으로 올린다는 야무진 꿈을 현실로 만들고자 합니다.​

강조의 정변 과정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목종이 죽으면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올리는 일에 열중했는데, 이때 갑자기 목종이 죽었다는 헛소문이 시중에 돌았다. 그러자 강조는 김치양 일당을 척결하고, 목종이 원하는 대로 대량군을 임금으로 앉히려고 하였다. 이때 강조는 5천명의 군사를 개경으로 끌고 들어오던 중이었던 중간에 목종이 아직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러자 강조는 입장이 아주 곤란해졌다. 자칫 잘못하면 김치양이 아니라 강조 자신이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온 반란군이 될 처지에 몰릴 수 있었다. 그러자 강조는 목종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부하들과 의논한 뒤에 대량군을 맞이하고, 개경으로 들어가서 목종에게 퇴위를 강요하였다.

결국 목종은 황당하지만 스스로 화를 불러일으킨 셈이 되었다. 강조는 목종을 폐위 시킨 후 대량군을 내세워 왕으로 올렸다. 그리고 김치양 부자를 죽이고, 천추태후와 그 일당을 모두 귀양 보냈다. 한편 강조가 폐위 시킨 목종은 수하를 시켜서 시해한다.

여기서 목종만 놓고 보면 목종도 참으로 ‘왕’ 이전에 불쌍한 ‘인간’입니다. 자신의 어머니는 다른 남자와 불륜에 빠져서 아들까지 얻고, 자신이 부른 신하는 왕의 자리를 빼앗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목종은 무능력한 사람같기도 합니다. 자신이 왕이면서 남색에 빠져서 유충정, 유행간이라는 간신과 놀아났으니 이 또한 어리석습니다.

일부에서는 목종이 동성애에 빠진 것이 천추태후가 강하게 억압을 줘서 이것을 풀려고 남색을 즐겼다고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좌절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엽기적인 행각을 해야 한다면 이 또한 이상한 짓입니다. 혹자들은 목종이 사람이 너무 착하고 순한 사람이고 세상 물정 모르는 이였다 고도 합니다. 그래서 강조의 정변으로 쫓겨나 자신의 어머니인 천추태후가 귀양을 갈 때 말이 한 필이라 자신이 말머리를 붙잡고 직접 모셔 갔다고 합니다.

​강조의 정변 결과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비롯한 7명은 처형되었다. 이주정을 포함한 30여 명은 유배를 보냈다.

폐위된 목종은 양국공(讓國公)이라는 칭호를 받았지만 감시를 계속 받았다. 천추태후와 함께 충주로 향했는데 폐주 목종이 적성현에 이르자 강조가 부하 김광보를 보내 사약을 올렸으나, 목종은 마시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에 김광보가 폐주를 호위하는 부하들에게 “강조가 (목종이) 약을 거부하면 군사들을 시켜 죽이라고 명령했다. 따르지 않으면 우리가 멸족을 당하게 된다.” 라고 협박하여 강조의 명령대로 그날 밤 목종은 시해되었다. 그리고 폐주가 자살했다고 거짓으로 보고했다.

천추태후 황보씨는 황주로 돌아가 21년 동안 더 살다가 현종 20년, 숭덕궁(崇德宮)에서 66세로 자연사했다. 그러니까 천추태후는 궁에서 쫓겨났지만 아무런 일도 없이 늙어 죽은 것이다.

김치양 일당에 의한 고려 조정의 혼란을 수습하고 당장의 문제는 해결하였다는 것에는 일단 백성들도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목종까지 시해하고 자신이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것에 대해서는 강조가 비난을 피하기 어려웠다. 또한 이러한 강조의 정변은 결국 거란에게 고려의 침입을 정당화하는 구실을 주었다.

고려에서 벌어진 정변을 알고 거란 황제 성종은 강조의 이신벌군(以臣伐君)을 문책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고려로 쳐들어왔다. 그런데 거란 성종의 속셈은 1차 침입 시기에 서희의 외교수완에 말려 양보했던 강동6주를 다시 찾고 싶었던 것이다. 거란 성종은 40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쳐들어와 1010년 11월 통주에서 강조의 군사를 대파하고, 결국 강조는 여기서 붙잡히고 일생을 끝내게 된다.

강조의 최후

『고려사』권127「열전」40 ‘반역’ 1에 강조의 최후가 묘사되어 있다.

契丹主, 解兆縛, 問曰:”汝爲我臣乎?”
對曰 :”我是高麗人, 何更爲汝臣乎!”
再問, 對如初。
又剮而問, 對亦如初。
問鉉雲, 對曰:”兩眼已瞻新日月 一心何憶舊山川?”
兆怒, 蹴鉉雲曰:”汝是高麗人 何有此言!”
契丹遂誅兆。
거란주가 조의 포박을 풀고 물었다: “넌 내 신하가 될 것이냐?”
(강조가) 답하니: “난 고려 사람이다, 어찌 너(汝)의 신하가 되겠느냐?”
다시 묻자 처음과 같이 답했다.
다시 살을 베어가며 묻자 답은 여전히 처음과 같았다.
현운에게 물으니 답하길: “두 눈이 이미 새 일월을 담았는데 어찌 옛 산천을 기억하겠습니까?”
조가 분노해 현운을 차며 말했다: “너는 고려 사람인데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
거란은 결국 조를 주살했다.

강조의 정변에서 의문점

강조의 정변은 그런데 좀 이상하다. 강조의 정변을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강조가 왕위를 찬탈하려는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당을 척결한 사건으로 단순하게 볼 수 있지만 이면을 조금 살펴보면 이상한 의문들이 떠오른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따라서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적 기록들은 당시 권력을 가진 자와 그 세력들에게 유리하게 쓰여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그 당시의 정확한 진실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의문도 제기된다. 강조의 정변에 있어 최후의 승자는 강조가 아니라 현종이다. 따라서 현종의 집권 정당성을 위해 이전의 권력자들인 천추태후나 김치양, 목종은 물론 정변의 주인공인 강조에 대한 기록들도 어쩌면 왜곡된 면이 있을 수 있다.

목종은 정말로 무능력한 군주가 아니었을 수 있다

알려진 것에 의하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에 의해 목종은 시달리고 국정에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맨날 남색에 빠져서 동성애에 몰두한 왕이라고도 묘사된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고려의 국왕으로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기록을 보면 ‘김치양과 천추태후가 나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하여 전횡을 일삼는데 어머니에게 가로 막혀 이를 저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되려 유행간 등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더욱 정치를 어지럽게 만든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 라는 것이다. 그러나 목종의 의욕적인 국정 운영 기록도 있어 이것이 진짜인지 의심이 드는 정황들도 많다.

목종은 자신의 뜻에 따라 유행간과 유충정을 권신으로 만들고, 방해가 되는 이주정을 지체없이 서경으로 보내는 등 인사권을 마음대로 행사했다. 그러니까 왕이 자신이 인사권을 휘둘렀다는 것은 그래도 실권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렇다면 왕으로서 권위는 있었다는 것이다.

목종은 대량원군 즉위 계획을 진행하면서 강조를 비롯한 최항, 채충순, 김연경, 황보유의, 문연, 고적, 이성언 등 상당한 신하들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였다. 정말로 권위가 없는 허술한 왕이었다면 어떻게 신하들에게 이런저런 지시가 먹혔겠는가?

그러나 기록상으로는 ‘김치양이 인사권을 독점하여 온 조정이 그의 일파로 가득 찼다.’고 하여서 위와 같은 목종의 국정 상황과는 배치된다. 또한 목종의 젊은 나이와 정통성으로 볼 때 아무리 어머니가 날 뛴다고 하여도 군주로서의 권력을 행사하지 못할 이유는 없는 것이었다.

목종은 천추태후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또 하나 이상한 것은 목종과 천추태후와의 관계이다.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서 쫓겨가는 판에 손수 말고삐를 잡고 어머니 천추태후를 극진하게 모시고 갔다는 기록이다. 사실 자신이 왕에서 폐위 된 것이 어머니 천추태후 때문인데 아무리 효자라도 둘이서 사이좋게 귀양길을 떠났다는 것은 목종과 천추태후와 관계가 기록에서 전해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강조는 왜 천추태후를 죽이지 않았는가?

강조의 정변에서 가장 큰 원인이었던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왕위 찬탈 음모에서 김치양은 죽여 버렸다. 그런데 천추태후는 죽이지 않았다. 하물며 목종까지 시해를 했는데, 천추태후는 살려서 고이 보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왕위를 빼앗으려는 음모에 있어서 ‘목종’은 피해자나 마찬가지인데 ‘네가 못난 놈이니, 너나 죽어라’하고 목종만 죽은 꼴이다.

천추태후는 이후에도 천수를 누리다고 죽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강조는 왜 주범인 천추태후를 살려주었는가? 강조의 정변을 보면서 이러한 의문을 품지 않았다면 역사드라마를 봐도 재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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