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임사홍 그는 정말 간신이었는가

누가 그랬던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말이다. 조선 왕조 때 연산군 시절에 임사홍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이 나오는 영화나 또는 이야기에서 천하의 소인으로 묘사되는데, 과연 정말 그는 간신이었는가? 임사홍에 대해 한번 알아보자.

임사홍은 정말 간신이었는가

조선시대에 왕과 신하 간에 얽힌 이야기들은 조선왕조실록과 야사 등을 통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충신에 관한 썰도 있지만 간신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조선시대에 있어 간신의 대명사로 알려진 임사홍, 그는 누구인가?

임사홍 프로필

성명 : 임사홍 (任士洪)
아명 : 임사의 (任士毅)
본관 : 풍천 임씨(豊川 任氏)
자 : 이의 (而毅)
출생 : 1445년 한성부
사망 : 음력 1506년 9월 2일 (향년 61세)
직업 : 정치가, 관료, 외교관
붕당 : 훈구파 (궁중파)

조선시대에 왕과 신하 간에 얽힌 이야기들은 실록과 야사 등을 통해 전해진다. 조선시대에는 충신에 관한 썰도 있지만 간신에 대한 이야기도 많다. 연산군 시절에 간신의 대명사로 알려진 임사홍, 그가 정말 간신이었는지 상식적으로 알아 보자.

연산군에게 폐비 윤씨 사건을 일러바친 자

임사홍은 연산군에게 성종 시절에 있었던 폐비 윤씨 사건을 고자질한 인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그로 인해 갑자사화가 발생되고 연산군이 미쳐 날뛰게 만든 계기를 제공한 인물이라고도 한다. 또한 그는 연산군에게 여자를 바치는 채홍사 역할로 희대의 간신 짓거리를 했다는 악평을 받는다.

임사홍은 원래 똑똑했다

임사홍은 원래 똑똑한 인물이었다. 그는 1445년 태어나서 세조 시절이었던 1465년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였다. 또한 그는 21살이 되던 1466년(세조 12년) 사재감사정으로서 춘시 문과에 3등으로 급제하여 처음에는 순조롭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임사홍은 글씨도 잘 쓰고 시문에 뛰어났으며 중국어도 아주 능통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젊은 나이에 행정고시를 합격하여 관직생활을 아주 잘 시작한 셈이다.

이후 그는 관압사, 선위사 등의 관리로 명나라에 가서 외교력을 보이기도 하고 승문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등 많은 활동을 했다. 이렇게 관리의 능력을 잘 보였던 임사홍의 능력을 크게 평가한 성종은 그를 문관으로 등용하여 이후 홍문관교리,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대사간, 예조참의 등의 요직을 맡겼다. 그러니까 조선시대에 소년 시절에 과거에 붙어서 승승장구를 한 것이다.

임사홍은 세조와 예종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22세의 나이에 경연관에 선정되기도 했다. 어린 임금을 가르치는 스승의 역할을 맡은 것이니, 임사홍이 무척 똑똑한 것은 분명했다. 이후 성종이 장성하여 친정을 시작할 때는 임사홍이 언관으로 재직하면서 왕과 신하들의 잘못을 밝혔다. 이때 성종은 당시 막강한 권세를 누리고 있던 조정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언관의 영향력을 키웠다. 이처럼 젊은 시절부터 임사홍은 나라의 중요한 자리를 거치며 계속 잘 나갈 것 같이 보였지만 결코 그의 앞날은 장밋빛이 아니었다.

임사홍, 할 말은 한다

임사홍이 간신이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안고 있어서 그가 할 말은 안할 것 같지만 의외로 성격은 강직하였다. 그는 어디서나 할 말은 하는 스타일이었다. 어떻게 보면 임사홍이 직설적 화법으로 다른 신하에 비판을 자주 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사림의 눈엣가시가 되어 오히려 신하들 사이에서는 왕따를 당하는 격이었다.

임사홍은 단점이자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직설과 대 놓고 까기는 자신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었다. 워낙 똑똑해서인지 사리분별을 빨리 해서인지 그는 자신의 뜻과 다른 사람들은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왕이나 신하 할 것 없이 모두 임사홍에게 밥이었다. 언관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임사홍은 너무 사람들을 까다 보니 자신의 적만 곳곳에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임사홍은 “정승이라도 법령을 어기면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한다고 주장도 했다. 그러니까 신하들 사이에서는 서로 쉬쉬하여야 하는데 정승이라도 잘못을 하면 깜빵에 보내야 한다는 그의 논리는 가히 파격적이었다. 신하들은 이렇게 막무가내로 직언을 하는 임사홍을 언짢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1478년(성종 9년) 때이다. 이때 4월에 황사비가 심하게 내려서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변괴로 여기고 무서워했다. 이러한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3사(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서 임금에게 간언을 올렸다. 흙비가 온 것은 하늘의 경고로 받아들여 왕이 근신하여야 하고 전국에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도승지를 맡았던 임사홍은 흙비는 변괴가 아니며 국가의 제사가 연이어 있는 시점에서 금주령을 내리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성종에게 간언 했다. 이렇게 임사홍이 금주령에 대한 반대의견을 제시하자 3사는 그를 탄핵하기에 이르렀다. 대간들도 임사홍을 탄핵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보니 성종은 임사홍의 말이 맞는 것 같지만 신하들이 워낙 거세게 들고 나오니 마지못해서 대간들의 뜻을 따르게 되었다.

결국 임사홍은 위의 사건과 함께 유자광 등과 파당을 만들고 현석규를 음해했다는 죄로 의주로 유배를 갔다. 임사홍을 일단 유배를 보냈지만 기회를 봐서 성종은 복권시키려 시도했지만 대간들의 반대는 여전했다. 그러니까 신하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늘 반대하는 것 같은 임사홍을 결코 조정으로 불러 올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신하들이 임사홍의 컴백을 반대하였는데 결국 임사홍은 12년 동안이나 유배지에 머물게 되었다. 사실 말이 12년이지, 그 당시 귀양을 가서 10년 넘게 있자니 임사홍도 환장할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르자 성종은 대신들이 임사홍의 복권을 반대하였지만 그를 유배에서 풀어주고 다시 등용하였다. 왕의 입장에서는 임사홍 같은 신하가 필요한 것이라는 것을 성종은 알아채린 것 같다. 그러다가 성종은 1490년에 임사홍을 명나라에 파견되는 관압사에 임명하여 역할을 맡겼다. 이후 승정원 도승지에 임사홍을 제수하였고 또 선위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는 임무를 맡겼다. 이렇게 보면 성종이 임사홍에 대한 신뢰는 무척 큰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성종이 임사홍에 대한 신임이 계속 이어지면서 대신들은 짜증과 성질이 날 수 밖에 없었다. 놈이 없다면 좋을 텐데 하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성종실록>에도 임사홍에 대한 대간들의 탄핵 상소문이 엄청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만큼 신하들은 임사홍을 싫어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자를 생각해서라도 폐비만은 불가합니다

성종에게 신임을 많이 받았지만 임사홍의 입은 늘 직언을 했다. 임사홍은 성종이 황후였던 윤씨를 폐비로 만드는 일에도 반대를 했다. 1477년 때이다. 성종과 불화를 겪던 중전 폐비 윤씨가 폐위될 위기에 처하자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임사홍이었다. 이때 임사홍은 “원자를 생각해서라도 폐비만은 불가합니다”는 직언을 성종에게 했다. 임사홍이 이렇게 황후 윤씨를 폐비로 하자는 것에 반대한 것에 성종이 만일 그의 의견을 들어줬다면 훗날 연산군의 대량학살은 막았을지 모르겠다. 어찌 보면 임사홍의 머리가 벌써 미래까지 내다보고 이렇게 직언한 것이겠지만, 결국 윤씨는 폐비가 되고 사약을 받는 지경에 이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임사홍의 이미지는 간신으로 입에 달콤한 이야기만 할 것 같지만, 그는 성종에게 직접적으로 윤씨를 폐비로 하는 것에 정면으로 반대한 것이다. 이렇게 소신 있게 당당한 모습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고하는 신하는 어찌 보면 간신이 아닌 충신의 면모가 아닌가?

허송세월을 보낸 임사홍, 복수의 칼날을 갈다

관직을 시작하면서 패기가 넘치고 똘똘했던 20대의 청년 ‘임사홍’은 유배지에서 많은 세월을 보내고 헛된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임사홍도 나이가 50이 되었으니 얼마나 마음속으로 칼날을 갈았겠는가?

1494년 성종이 졸(卒)했다. 드디어 연산군이 왕의 자리에 오르면서 임사홍은 복권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으나 역시 또 신하들이 벌떼처럼 일어나서 그의 복권을 반대했다. 그러다보니 임사홍은 받았던 품계마저 다시 반납당하는 또 한 번의 수모를 겪는다. 이렇게 많은 신하들과 임사홍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고 세월이 흐를수록 앙금만 남았으니 그가 다른 신하들에 갖게 된 원한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었다. 그런데 천우신조(天佑神助)의 기회가 왔다. 바로 임사홍의 넷째 아들인 임숭재가 연산군과 관계가 너무 돈독했던 것이다. 임사홍의 아들인 임숭재는 아버지를 구명하는 상소를 연산군에게 올려서 그의 복권을 호소했다. 원래 임숭재는 성종의 딸이자 연산군의 누이인 휘숙옹주와 결혼하여 왕가의 사위가 된 배경도 있다. 그래서 연산군과는 처남과 매부 관계가 되기도 하지만 사적으로도 같이 술을 먹는 절친이었다. 따라서 연산군이 절친의 요구를 안 들어줄 리 있겠는가? 결국 임사홍은 25년간 세상을 겉돌다가 다시 중앙 정계로 복귀하는 기회를 얻었다.

피바람을 몰고 온 갑자사화

조정의 다른 신하들에게 모함 아닌 모함을 받아서 오랜 세월을 야인으로 지내온 임사홍이 연산군에게 인정을 받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바로 폐비 윤씨 사건을 고하는 것이었다. 결국 1504년에 연산군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키고 신하들을 거의 다 죽이는 형국에 이른다. 연산군의 어머니였던 폐비 윤씨의 사건에 동조하거나 방관한 조정 신료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결국 이 일로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때 죽거나 유배를 당한 신하들이 200여 명에 이른다니 실로 엄청난 일이었다.

<중종실록>에서는 임사홍이 갑자사화 이후 자신을 비난하던 이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반드시 보복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은 중종반정이 성공했기에 임사홍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내린 것이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임사홍은 폐비 윤씨 사건을 연산군에게 알려주는 것을 기회로 하여서 신임을 얻었으며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탄탄하게 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역사의 다른 평가에서는 이미 연산군은 폐비 윤씨 사건에 대해 복수의 칼날을 감추고 있다가 임사홍이 알려준 것을 명분으로 삼아서 폐비 윤씨 사건에 연루된 신하들을 척살한 것이라는 썰도 있다. 이것은 연산군이 절대왕권에 대한 의지가 강했기에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신하들에 대한 탄압과 제거의 명분으로 윤씨 사건과 임사홍을 활용한 측면이 있다는 것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임사홍의 최후, 부관참시의 능욕으로 끝난 그의 인생팔자

연산군이 집권하면서 잘 나가던 임사홍이 죽을 날이 왔다. 화무실일홍 권불십년(花無十日紅 權不十年)이라고 권력은 결코 영원하지 않다. 1506년 9월 2일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이때 임사홍은 중종반정군이 와서 바로 죽여 버렸다. 현장에서 임사홍은 즉결 처분 당한 것이다. 연산군의 신임을 받아서 천년만년 잘 살 것 같았지만 그가 마지막 권세를 누린 기간은 고작 3년 남짓이었다. 중종반정 이후 그의 시체는 또다시 끄집어내어 지고 시신은 부관참시(剖棺斬屍)되었다.

임사홍에 대한 재평가

많은 사람들이 임사홍을 천하의 간신으로 여기지만 어찌 보면 그는 어리석은 왕과 멍청한 신하들 사이에 낀 불행한 신하일 수 있다. 임사홍을 단순하게 연산군 시절에 간신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아쉬운 인물일 수 있다. 어쩌면 연산군은 임사홍을 백분 잘 활용하여 자신의 왕권강화를 이루려는 목적의 꼭두각시로 활용한 측면도 있다.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왕위에 올린 정치세력들은 결코 임사홍에 대해 좋게 평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임사홍을 조선의 대표적인 간신이라고만 보기에는 그의 인물 평가에 있어 안타까운 측면도 있다.

온갖 감언이설(甘言利說)이 판치는 요새 정치판이나 과거 조선시대 정치판이나 다를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다만 선비들이 의관을 갖추고 광화문 경복궁에서 떠들던 부류들이 이제는 양복을 걸치고 용산과 여의도를 거닐 뿐이다. 냉정하게 보면 조선시대 때에 임사홍 같이 직언을 하는 정치인도 별로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상식은 권력이다 nBox.com


error: 상식은 권력이다!
Scroll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