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건국에서부터 망국에 이르기까지 두 민씨(民氏)가 있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 민 씨가 있었고, 또 조선이 망하는 과정에 있어 또 다른 민 씨가 있었다. 그러니까 민씨가 조선의 처음에서부터 끝까지 관여가 되어 있는데, 특히 조선이 망국의 길로 가는데 민씨가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이 시작되면서 민씨가 피를 보았는데 그 원한을 갚듯 또 다른 민씨가 피를 뿌린다.

조선 건국에서부터 망국에 이르기까지 두 민씨(民氏)가 있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무엇하지만, 민씨 일가에 의해서 조선은 시작과 끝에서 그 악연이 따랐다. 민씨의 본관은 여흥이다. 여흥은 지금 경기도 여주이다. 민씨는 우리나라에서 성이 흔하지는 않지만 조선왕조 시대에는 왕비를 4명이나 배출한 가문이다. 한 가문에서 왕비를 네 명이나 왕실에 심었다는 것은 그만큼 힘이 있다는 것이며 동시에 많은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결론적으로는 조선은 민씨 왕비에 의해 망하는 쪽으로 간다.

민씨 일가에 의해서 조선은 시작과 끝에서 그 악연이 따랐다. 조선의 건국 과정과 망국에 이르기까지 민씨 여인 두 명이 연루되었으니 이 또한 조선의 국운이다. 우리의 어리석었던 역사를 미화시켜서만 볼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조선 건국과 함께한 민씨, 원경왕후

조선이 시작되면서 민씨 왕비가 나온다. 그녀는 바로 이방원의 처로 나중에 원경왕후에 봉해진 여자이다. 원경왕후는 이방원이 거사를 치루는 과정에 있어 민씨 일가는 큰 힘을 보탰다. 그러나 이방원은 권력을 잡고 사병 세력을 견제하고자 사병 혁파를 강행하는데 여기에 원경왕후는 반대하는 입장을 보인다. 이방원 왕이 되고 나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자 했으나, 원경왕후는 만만치 않았다.

원경왕후는 조선의 왕을 만든 것이 자신과 민씨 집안임을 이방원에게 상기시켰다. 따라서 “조선의 반은 내 것”이고 조선은 공동명의라고까지 원경왕후는 여겼던 것 같다. 이때 이방원은 부인에게 충격을 받고 갈등이 시작된다. 그런데 사실 민씨는 진짜로 영토의 반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나누겠다는 것이라며 달래듯이 이방원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이방원은 민씨 부인이 권력을 잡고 싶어서 지금까지 날 도운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는다. 그리고는 바로 민씨 일가에 대한 숙청작업에 들어간다. 이것들이 날 왕 위에 올린 것이 바로 지네들이 세력을 잡고 싶어서였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이방원은 민씨들이 외척으로 발호할 것을 경계하면서 싹 죽이기 작업에 들어갔다.

원경왕후 민씨 일가 개박살 나다

이방원은 열이 받아서 민씨 일가 놈들을 죽여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냥 놔뒀다가는 민씨들이 조선을 다 말아 먹을 것 같았다. 그런데 정작 민씨들이 나라를 말아 먹은 것은 그로부터 수 백년 후이다. 아무튼 이방원은 원경왕후 일족인 민씨 일가에 대해 강한 적개심을 불태웠다.

그러던 중 “민무구, 민무질 형제는 주상(태종)께서 세자(양녕)에게 선위 할 뜻을 바치자 ‘얼굴에 기쁜 빛(喜形于色)’을 나타냈습니다. 다시 전하께서 복위하신 뜻을 밝히자 도리어 슬픈 빛을 보였습니다. 역심(逆心)을 품었음이 분명합니다.” 이것은 1407년(태종 7년) 7월, 영의정 이화 등이 올린 상소였다.

민무구, 민무질, 민무희, 민무휼 모두 자진하여 멸문지화

결국 민무구와 민무질 형제는 탄핵 상소를 받고 마침내 ‘자진’의 명을 받는다. 이후 남은 동생들인 민무회와 민무휼 형제도 똑같은 과정을 거쳐 역시 다 자진하게 된다. 결국 원경왕후의 민 씨 4형제는 이화의 첫 상소문 이후 무려 8년 7개월 간의 오랜 탄핵을 받고 모두 불귀의 객이 되었다. 민씨 일가는 이방원을 왕으로 만드는 일등공신의 집안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멸문지화’를 당했으니 사실 어찌 보면 억울하기도 할 것이다.

조선의 망국에 일조한 민씨, 민비

조선이 망할 무렵에 또 한 명의 민씨가 왕비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가 지금 말하는 명성왕후이다. 지금은 우리가 국뽕에 취해서 민비를 명성황후라는 거창한 이름으로 존대의 명칭을 쓰지만 실상 까놓고 보면 그냥 나라를 통째로 똘똘 말아 먹은 여인이다.

민씨 일가에 의해서 조선은 시작과 끝에서 그 악연이 따랐다. 조선의 건국 과정과 망국에 이르기까지 민씨 여인 두 명이 연루되었으니 이 또한 조선의 국운이다. 우리의 어리석었던 역사를 미화시켜서만 볼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흥선대원군의 큰 착각으로 맞이한 민씨 며느리

흥선대원군은 조선말에 후사가 없는 철종 이후에 자기의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것까지는 아주 전략적으로 성공을 했다. 그러나 어린 아들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대원군이 노심초사하던 중에 최악의 수를 두었으니 그것이 바로 민 씨 며느리를 얻은 것이다. 원래 흥선대원군은 세력이 약한 집안의 여자를 끌어당기면 왕권에 별로 문제가 없을 것이라 여겼지만 이것은 큰 착각이었다. 흥선대원군은 민 씨를 왕비로 삼으면서 자살골을 넣은 꼴이다. 그러니까 아주 큰 빅똥을 왕실로 들여와서 조선을 똥판으로 만들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민씨는 왕비가 되면서 온갖 계략을 써서 흥선대원군을 바보로 만들고 수족을 묶었다. 결국 대원군은 아무런 힘도 못쓰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자 민씨들이 대거 왕궁으로 진입하여 권력을 향유하면서 민비의 오빠, 동생, 조카 등은 민씨 일가는 조선말에 엄청 큰 대박이 난 것이다. 한 마디로 집안에 여자 한 명이 왕실로 시집을 잘 가서 가문이 로또를 맞은 것이다. 민씨들은 관직도 사고 팔았다. 매관매직을 하면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또 부정부패는 당연지사였다. 이 당시 민씨들은 큰 돈을 벌었다.

민씨 일가, 조선 말기에 다 해 먹자

민씨 정권의 부패에 대한 불만과 개화 정책에 대한 불안감이 겹쳐지면서 1882년 7월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임오군란이 터지자 민비는 청나라 군대를 불러서 군란을 진압하는 일을 도모했다. 그리고 흥선대원군을 강제로 청나라로 납치해 가도록 한 다음 민씨 정권을 재수립하였다. 한편 이를 계기로 청나라는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일본까지 들어오는 상황이 되었다.

조선이라는 나라에 청나라는 기득권이 있는 것 같이 행세를 하였는데 일본은 또 이를 지켜볼 수 없었다. 결국 조선에 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청일전쟁이 터졌다. 일본은 청국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조선의 내정개혁을 명분으로 1894년 7월 경복궁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도발을 시작했고 중국 본토까지 공격하여 점령해 들어갔다. 여기에 당황한 청국은 부랴부랴 강화 회담을 서둘렀고 일본도 이에 응해 시모노세키조약으로 청일전쟁은 마무리됐다. 한편 조약으로 청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사실상 일본의 조선의 지배에 들어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동학혁명의 원인도 알고 보면 민씨 일가에 있다

청일전쟁이 터지든 말든 나라를 말아먹는데 열중하는 민씨 일가들은 계속해서 매관매직에 몰두한다. 일이 이렇게 가다 보니 지방에서 또라이 같은 놈들이 관직을 매입해서 본전을 땡기려다 양민들을 엄청 착취하다 보니 결국은 이들이 못 참겠다고 봉기하는 사태가 발발했다. 이것이 바로 1894년 동학혁명이다. 알고 보면 동학혁명이 발발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민씨 일가에 있었다.

민씨 일가 세력은 민승호, 민규호, 민겸호, 민태호 등이 왕실의 요직을 맡았다. 또한 민영익, 민응식을 비롯하여 민영환, 민영위, 민치상, 민영준, 민영원 등이 주요 요직을 도맡아 고종의 임기에 있어 민씨가 관직을 모두 점령했다고 해도 될 정도이다. 1880년대 민씨 척족으로서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진출한 인물은 무려 260명 가량이라니 정말 대단한 숫자이다. 이런 자들이 조선의 중요한 직책에 봉하고 나라를 뿌리부터 파 먹기 시작했다.

민비의 비호로 나라는 개판이 되었고 이 와중에 민영휘는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했다. 민영휘는 당시 선혜청 당상직을 수행했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국가 예산을 관장하는 기재부 장관쯤 되겠는데 그 자리에 앉아서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급급했다. 이렇게 조선은 나라가 망해가는 과정에서도 민비를 등에 업고 수 많은 민씨들이 바퀴벌레들 같이 나라를 뿌리 채 파 먹고 있었다.

민비는 대원군 일파를 깨부수는 일에 몰두했다. 또한 무당을 궁내에 들여서 굿을 하거나 명산대천을 찾아 치성한다는 명목으로 국고를 탕진했다. 조선말이 되면서 민씨 일가의 부패상은 하늘을 찔렀다. 결국 1884년 일본과 결탁한 개화파들이 갑신정변을 일으키면서 민씨들이 잠시 힘을 잃었으나 다시 또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민비, 조선을 말아 먹다 죽다

그러나 이후 일본세력의 집요한 작업으로 김홍집의 친일 내각이 들어섰다. 한편 1894년 흥선대원군이 청나라에서 컴백하면서 정치판이 또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제 민비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모든 것은 끝이 있다. 달도 차면 기운다고 조선을 그렇게 말아먹던 민비는 1894년 일본인들에 살해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소위 ‘을미사변’이라고도 한다. 지금은 공식적인 명칭으로 ‘명성황후 시해사건’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 가운데는 민비가 조선의 국모로 마치 대단한 애국자로 죽은 것 같이 울분을 토하지만 알고 보면 자신의 민씨 일가를 위해서 조선이 망하든 말든 부귀영화를 누린 한 여인에 불과하다.

어찌 보면 민비는 머리가 참 나쁜 사람 같다. 자신의 개인적인 사치와 향락을 위해 척족을 조선의 중요 보직에 임하고 재정을 파탄 낸 것은 그렇다고 하자. 그런데 외세에 빌붙어서 조선이 아닌 민씨 일가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으니 어리석음이 참으로 크다. 따라서 민비는 결코 자주독립의 순교자가 아니라 그냥 개인적인 욕심을 부리다가 죽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방원도 민비 때문에 지하에서 한탄 했을 것이다

태종 이방원이 만일 조선이 이렇게 망하는 줄 알았다면 원경왕후의 4형제뿐만 아니라 민씨 집안을 완전히 도륙을 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이 세워졌던 것도 한 때이고, 나라가 망하는 것도 한 때이다. 조선이 건국되면서도 민씨들이 날 뛰었는데, 망할 때도 민씨들이 날 뛰었으니 그것도 조선의 국운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지만 만일 조선이 이렇게 민씨들에 의해 철저하게 망하게 된 것을 이방원이 알았더라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이 민씨 외척으로 인해 왕권이 쪼그라들까 걱정했던 이방원의 걱정은 결국 수 백년이 지난후 민비에 의해 현실화 되었다.

역사는 바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현대에 와서 교과서 등에서 민비를 명성황후로 고쳐 표기하고, 또 대중들은 민비를 역사의 가련한 국모로 알고 있지만 실상 알고 보면 조선이라는 나라를 여자 하나가 가족들과 함께 말아먹은 것이다. 어찌 보면 ‘민씨 가족사기단이 조선을 끝장 낸 것 이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 상식이다. 우리의 어리석었던 역사를 미화시켜서만 볼 것도 아니고,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것이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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