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재평가, 6.25는 한중전쟁(韓中戰爭)이었다

남북관계가 악화되고 정전체제가 계속 유지되는 가운데 한반도는 긴장과 위기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었지만 실질적으로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통상적으로 6.25를 민족전쟁, 한국동란 등으로 남북이 전쟁을 치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따지고 보면 전쟁의 성격은 국내전이 아니고 국제전이었다.

한반도는 과거 5천년부터 늘 북쪽의 대륙세력과 남쪽의 해양세력으로부터 침략을 받는 지리적 특성의 약점에 노출되어 있었다. 사실 알고보면 6.25전쟁은 단순하게 한반도의 북쪽 공산세력이 남쪽 민주세력을 공격한 것이 출발점이지만 귀결점은 중국의 군사적 개입에 의한 국제전이다. 지금의 중국, 당시에는 중공군이 인민지원군이라는 모자를 쓰고 개 떼 같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하여서 결론적으로는 6.25가 한중전쟁(韓中戰爭)의 성격을 갖는다.

우리는 6.25를 민족전쟁, 한국동란 등으로 남북이 전쟁을 치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전쟁의 성격은 국내전이 아니고 국제전이었다. 중국은 6.25전쟁에 노골적으로 개입하여서 한국과 전쟁을 치룬 것이다. 따라서 6.25는 한중전쟁(韓中戰爭)이다.

6.25는 한중전쟁(韓中戰爭)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북한은 전세가 불리해졌다. 이때 1950년 10월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어 한반도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6.25 전쟁에 중국이 개입한다. 1950년 10월 19일 한반도에 들어와서 전쟁에 참여한 이후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질 때까지 중국은 총 병력 약 240만 명 이상을 투입하였다. 6.25전쟁 중 중공군 사상자는 전사자 18~20만 명을 포함해 약 36~40만 명, 질병이나 사고 등으로 인한 사상자를 의미하는 비(非)전투 사상자가 38~ 40만 명이 될 정도로 중국은 노골적으로 한반도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중공군이 쳐 들어왔다

당시에 중공은 연합국 세력이었던 유엔군을 공격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중공군을 국가 공식 차원이 아닌 개인 차원에서 스스로 원해서 참전한 의용군으로 포장하였다. 일명 ‘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자발적으로 넘어간 지원세력이자 역사상 최대의 민병대”라는 개소리를 지껄였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이때 한반도에 들어왔던 중공군은 전원이 정규군인 중국 인민해방군 출신이었다.

대한민국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을 압록강까지 밀어붙이며 6·25 종전과 남북통일을 눈앞에 두는 듯 했다. 그러나 중공군의 침공으로 인해 한반도 통일은 무너졌고 결국은 남북 분단을 가져왔다. 중공군이 개입한 이래 정전협정까지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지루한 공방을 계속하게 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한반도는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중국은 정전 협정 후 지금까지도 중국인민지원군의 6.25 전쟁 참전을 항미원조(抗美援朝 미제에 맞서 조선을 도움) 보가위국(保家衛國 가정과 국가를 지킴)라고 선전 선동을 일 삼고 있다.

중국의 6.25전쟁 개입은 한국과 중국과의 전쟁

6.25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만주로 튀고 중공군이 대신 들어와서 침략을 했다는 점에서 중국은 남한과 전쟁을 한 것이다.

중공군

한중전쟁의 서막 (1950.11.25~12.24)

6.25전쟁에서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북한군을 압도하면서 압록강까지 단숨에 쳐올라갈 대공세를 기획했다. 맥아더는 “일이 빨리 풀리면, 우리 애들 일부는 크리스마스까지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워싱턴에 호언장담을 했다. 그렇게 미군의 대공세가 진행되면서 크리스마스 귀향 공세(Home-by-Christmas Offensive)라는 이름도 따라 붙었다. 그런데 이러한 맥아더의 구상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물거품이 될 처지가 되었다.

1950년 11월 24일, 서부전선의 청천강 전투에서는 월튼 워커 중장이 지휘하는 유엔군(미8군과 한국군, 터키군 포함)이 25만 병력으로 청천강 유역에서 공세를 시작했으나, 약 30만 명의 병력을 가진 중공군이 등장하면서 전세가 불리해졌다. 중공군은 군사 장비가 취약한 한국군을 대상으로 집중공세를 펼쳐서 전선에 유엔군의 돌파구를 뚫었다. 이때 미8군은 포위당하지 않기 위해 후퇴하여야만 했다. 이러한 후퇴는 결국 서울을 내주는 1.4후퇴까지 이어졌다.

한편 동부전선의 장진호 전투에서는 쑹스룬이 지휘하는 6개사단, 총병력 15만의 중공군이 미10군단이 주축인 10여만 명의 유엔군을 포위했다. 송스룬군은 3,000여 명의 병력을 가진 선견대를 분쇄하고, 약 1만 명의 병력을 가진 미해병1사단을 완전히 포위 섬멸하려 했으나, 미해병1사단은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중공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지연작전을 실시, 동해안의 흥남방면으로 탈출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선편으로 피난민들과 함께 남쪽으로 철수하는 흥남철수 작전을 하였다.

6.25전쟁에서 보여진 중공군

중공군은 대부분 경보병으로 이뤄져 있었다. 화력이래야 고작 박격포 정도였다. 그래서 중공군은 포병이나 공중지원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자동차의 기동이 어려운 산악지형에서 보병의 기동력을 십분 활용한 포위전술에 매우 능하였다. 중공군이 즐겨 쓰는 전법은 V자 전법으로 적이 V자의 한 가운데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깊숙히 들어왔을 때 보병의 재빠른 기동으로 양 다리를 닫아 포위망을 완성하는 것이었다. 어찌보면 중국의 고대 병법중 하나의 학익진이다. 학익진(鶴翼陣)은 진법의 일종으로, 학이 날개를 펴는 모양을 진으로 응용하여 만든 것이다. 말 그대로 상대를 원을 그려가면서 둘러싸는 형태이다.

중공군은 학익진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서 매복과 위장을 철저히 하였다. 유엔군은 공중정찰로도 이렇게 포진한 중공군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주간에 잘못 들어갔다가 야간에 숨어있던 중공군들의 공세로 포위당하기 일쑤였다. 일단 중공군들은 포위된 적을 대병력을 동원하여 어떻게든 섬멸하는 포위전술을 구사했다. 중공군은 포위된 적을 섬멸하기 위해 적보다 압도적인 수의 병력을 투입하였다. 이것은 소위 인해전술이다. 인해전술(人海戰術)이란 전투원의 손실을 고려하지 않고 압도적인 인원을 한 곳에 쏟아부어 상대를 압도하는 전술이다. 한자어에서 ‘인해’는 ‘인산인해'(人山人海, 수없이 모인 사람들의 무리가 마치 산처럼 크고 바다처럼 넓다)라는 말이 대변하듯 ‘많은 사람들’ 그 자체, 즉 물질적 양을 표현한 말이다. 그러니까 개 떼 같이 몰려 들어서 물어 뜯는 전법이라고 보면 된다.

대군(大軍)에게 병법(兵法)은 필요 없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중공

우리가 가진 총알보다 그 새끼들 숫자가 더 많다는 거! 아세요?!
영화 <고지전>, 신일영 대위

중공군은 이러한 대공세로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를 좌절시키고 미군을 후퇴시켰다. 미군이 강력한 화력을 가지고 전투를 하여도 인해전술이라는 대담한 작전을 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한국군이나 미군은 엄청난 손실을 보았다.

중공군의 노골적 개입

중공군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공세에 반격을 취한지 겨우 열흘만인 12월 6일 평양을 탈환하고 더욱 남진하였다. 그리고 12월말에는 38선을 지나던 개성까지 이르렀다. 이로서 6.25전쟁에 있어 역전을 통해 우리가 북진통일을 할 수 있었던 가능성은 현저하게 희박해졌다.

모택동은 6.25전쟁에서 외외로 일이 잘 풀리자 한국군과 유엔군을 과소평가하고 아예 한반도를 통채로 “적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다. 그래서 그는 인민지원군에 38선을 넘어 진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할 때 명분은 미군이 38선을 넘은 것을 도발행위로 간주한 방어행위라고 했는데 이제는 중공군이 38선 넘어서 진격하는 개수작을 핀 것이다. 결국 38선이 지나는 개성에서 잠시 정지했던 중공군은 12월31일부터 대공세를 펴서 38선을 넘었다. 결국 유엔군은 중공군의 무지막지한 포위를 피해 서울을 내주고 일단 후퇴했다. 결국 1월 4일에 중공군과 북한군은 3개월만에 또 서울에 재입성했다.

1951년 1월 4일 서울까지 재점령한 중공군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대담하게 공세를 쳐 발라 서울 이남으로 진격을 감행했다. 미군은 부대를 재편성하여 반격으로 나왔다. 한편 그동안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골머리를 앓던 미군들도 그들의 전법에 익숙해져서 고화력 무기를 무차별로 투사해 섬멸하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특히 미국의 압도적인 제공권은 중공군에게 큰 피해를 줬다.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곤란해진 중공군

중공군의 대가리수가 많다는 것은 결론적으로 그들이 먹을만한 보급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워낙 많은 인원을 챙겨야 할 보급에 차질이 생기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중공군에게 있어 장기전과 불필요한 진격은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결국 중공군은 남으로 가던 길을 멈추고 방어에 나섰지만 더욱 강화된 미군의 지상력과 막강한 공중화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중공군을 작살냈다.

결국 1951년 1월 23일, 서부전선의 미8군은 공세로 나왔고(선더볼트 작전), 한강 이남의 중공군을 이북으로 철수시켰다. 동부전선에서도 미10군단이 라운드업 작전을 실시하고 공세로 나왔다. 이런 와중에 중공군은 약체인 한국군에만 공세를 집중하여 한국군 8사단이 완전 궤멸되는 참사가 생겼다. 이 때문에 라운드업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렇게 개 떼 같이 밀려오는 중공군의 공세는 역시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에 의해 찌그러 들었다.

미군의 압도적인 공군력 때문에 중공군의 전력은 지속적인 공세를 취할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미8군은 이렇게 약체화된 중공군에 대한 공세를 펴서 결국 3월 중공군을 서울에서 다시 몰아내고 재수복했다. 이때 맥아더는 만주지역을 핵폭격하자는 제안을 하는 등, 여러가지로 조속한 정전을 원하는 행정부와 충돌했기 때문에, 4월 11일 유엔군 사령관직에서 해임되고, 그 후임은 중공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낸 리지웨이가 임명되었다.

중공군의 춘계 대공세 (1951.4.22~6.10)

유엔군의 반격에 의해서 38도선 이북까지 물러섰던 중공군은 약이 올랐다. 다시 1951년 4월 말 다시 한번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중공군은 대공세를 실시했다. 이것은 3개 야전군 약 70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유엔군을 포착 섬멸하고 서울을 다시 탈취한다는 야심만만한 작전이었다. 중공군은 1951년 4월, 설마리/파평산 전투와 사창리 전투에서 역시 한국군을 공세의 대상으로 삼아 전선을 돌파하려고 했고 4월 30일 서울 북쪽 8km 지점인 의정부까지 도달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고질적인 약점이던 보급 문제와 미군과 영국군을 위시한 유엔군의 막강한 화력이 다시 발목을 잡았고 서울 코앞까지 도달하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끝내 서울 재점령에는 실패했다.

중공군은 전선돌파가 지지부진하자 일단 정지하여 전열을 정비하였다. 중공군은 5월 15일 다시 공세로 나왔으나 5일 후 다시 정지했다. 중공군이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이 기회를 노려 유엔군은 대대적인 반격을 명령했고 급기야는 한 수 아래로 무시하던 한국군에게까지 대패를 당해 화천저수지의 이름을 파로호로 바꾸게 만드는 굴욕까지 당했다. 5월 1일 노동절에 서울에서 시가행진을 하겠다며 자신만만해 한 중공군 수뇌부의 예상과 다르게 춘계 대공세는 4월 말 공세를 시작할 당시의 전선 위치에서 거의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10만이 넘는 사상자만 낸 채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지리한 공방전 (1951.6.10~1953.7.27)

중공군은 춘계 대공세 이후 양측 모두가 서로를 힘으로 완전히 꺾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1951년 6월 10일부터 휴전협상이 개성에서 시작되었다. 개성에서 휴전협상이 열리고 있었지만 판문점 일대를 제외한 전 전선에서는 계속해서 전투가 벌어졌다.

휴전협상의 주 의제는 휴전 이후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와 포로의 처우 문제였다. 공산군은 전쟁 이전 38선으로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러나 유엔군은 현 전선을 군사분계션으로 그대로 유지할 것을 주장하면서 서로 대립하였다. 1951년 10월 유엔군이 추계공세로 전선을 10km 정도 북상시키면서 유엔군에게는 아직 전선을 북상시킬 능력이 있음을 상기시키며 압박을 주자 공산군은 1952년 1월 27일 현 전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설정한다는 데에 동의하면서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는 마무리 되었다.

포로가 된 중공군

휴전 협정에 있어 포로 문제가 중대한 현안이었다. 중공군의 경우는 국민당군 소속으로 있다가 국민당군이 항복하면서 자의에 반하거나 분위기에 휩쓸려 공산군에 편입된 사람이 있었다. 그러니까 공산주의자도 아닌데 졸지에 잡혀서 한반도까지 온 중국인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공산측으로 소환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유엔은 포로의 자유의사를 존중하자고 했지만, 공산측은 송환거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무조건 자신들의 포로 전원 송환을 요구했다.

그러나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과의 별도 협의를 하지 않고 과감하게 2만 7천 명의 반공포로를 임의로 석방하였다. 이때이승만의 신의 한수가 바로 자유포로 석방이었다 이렇게 풀려난 반공포로들은 결국 중립국인 인도에 남겼다가 인도가 자유의사에 따라 처리하는 걸로 마무리 되었다. 이들의 상당수는 대한민국이나 대만행을 택했지만, 남과 북, 중국과 대만 모두를 거부하고 제3국행을 택한 이들도 소수 있었다.

6.25 전쟁의 끝은 한중전쟁(韓中戰爭)

중공군과 유엔군은 휴전협상 동안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고지전을 벌였다. 휴전협정이 조인될 무렵인 1953년 7월 10일경, 중공군 측은 24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금성 돌출부(당시 강원도 금성군, 현재는 북한 강원도의 김화군)에 포진한 한국군(4개사단, 약 9만 명)에 대한 대공세(금성 전투)를 펼쳐 남한군과 미군을 4km 정도 밀어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철원 평야와 화천군 전체를 장악한다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거기에다가 중공군의 사상자가 미군과 한국군의 2배가 넘는 3만에 달했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무조건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중공군측은 이 전투에서 한국군의 최정예였던 수도사단을 패퇴시켰기 때문에, 이를 기념하여 문화대혁명시기에 이 전투를 다룬 “기습백호단(奇襲白虎團)”이라는 현대경극과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니까 중공군이 한국군을 패퇴시켰다고 대대적으로 선전과 홍보를 한 것이다.

휴전협정 직전의 북한 주둔 중국 인민지원군 총 병력은 야전부대 17개 군과 각종 지원부대를 합해 무려 120만 명까지 늘어났다. 중국이 인구가 많다보니 개나 소나 다 한반도로 끌려 온 것이다. 6.25전쟁에 있어 전후방 전 병력을 합해 40~45만 명에 불과했던 북한군보다 중공군이 한반도에 훨씬 많았다. 사실상 공산군 측 전력의 70% 이상이 중공군이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유엔군 총 병력 90만 중 한국군의 병력이 60만으로 다수였음을 보면, 6.25 전쟁 후반기의 대결은 점차 한국군 대 중국군으로 옮겨갔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6.25전쟁은 한국과 북한과의 전쟁이 아닌 한국과 중국과의 한중전쟁(韓中戰爭)이다. 북한이 단독으로 한반도에 전쟁을 치룬 것은 고작해야 4달도 되지 않는다. 6.25전쟁의 대부분은 사실 중공군이 대한민국과 싸운 것이다.

한중전쟁(韓中戰爭)의 결과와 반성

중공군이 한반도 전쟁에 개입한 결과 우리의 역사에 있어 참혹한 시련이 따르게 되었다. 한반도의 남과 북이 분단되어서 하나의 민족이 통일이 되지 못했다. 대규모 중공군의 침략으로 인해서 무고한 대한민국 국군이 엄청난 사상자를 가져왔다. 남의 나라 전쟁에 개입하여서 불행한 씨앗을 잉태 시킨 중국은 과거 5천년 역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결코 앞으로도 우리에게 도움을 줄 일은 없다.

중국의 간사하고 흉악한 한반도 개입은 과거에도 있었지만 현재도 진행중이고 앞으로 미래에도 또한 그럴 것이다. 오죽하면 6.25때 할아버지 김일성을 구해준 중국에 대해 김정은이 이렇게 말했겠는가! “일본이 백년의 적이라면, 중국은 천년의 적이다”라고 김정은은 대 놓고 까 버렸다. 그러니까 북한을 구해준 중국에 대해서도 김정은도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적으로 보면 중국은 한반도에서 생성소멸(生成消滅)하였던 많은 국가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커다란 근원이다. 한반도에 있었던 수 많은 왕조들의 국가안보 최전선은 언제나 북쪽 국경지대였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고조선은 중국 한나라에 멸망했다. 고구려는 당나라에 멸망했다. 고려의 멸망도 어찌 보면 명나라의 압박에 대응하려다 발생한 위화도 회군이 도화선이 된 것이다. 조선말 청일전쟁 직전까지 조선 독립에 가장 위협적인 외세는 일본이 아니라 청나라였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위협적인 존재는 언제나 중국이라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제2차 한중전쟁(韓中戰爭) 예언

6.25전쟁이 제1차 한중전쟁이었다면 앞으로 제2차 한중전쟁의 발발 우려도 따른다. 시진핑의 끝 없는 대만 침공 야욕은 국제사회의 정세 변화와 맞물려 언젠가는 터질 수 있는 사안이다. 만일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한중전쟁(韓中戰爭)의 두 번째 서막이 오를 것이다. 중국은 대만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한반도에도 전쟁을 또 일으킬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2차 한중전쟁(韓中戰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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