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 왕조 500년을 유지하면서 뻘짓거리도 많이 했다. 특히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황당한 짓도 많이 했다. 조선이 중국에 했던 헛짓 중 가장 황당한 것은 정묘호란 때이다. 사실 이때 명나라는 나라가 거의 망해가는데도 조선은 16세기말에서 17세기 전반에 걸쳐 동아시아의 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는 것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인조는 땅 바닥에 대가리를 찧는 수모를 겪는다.
정묘호란 당시 조선의 인조와 대신들의 행태 분석
명(明)나라가 국운이 기울면서 나라가 극도로 피폐되어 주변을 돌아볼 여력이 없을 때, 만주에서 누르하치(奴兒哈赤)가 벌떡 일어나서 여진족을 규합하여 큰 세력을 형성했다. 이때가 대략 1559년∼1626년 사이다. 이때 여진족은 여러 부족들이 통합되어서 나라를 세울 정도로 강력한 세력이 되었고 드디어 후금(後金)을 건국했다. 슬슬 대륙의 판도는 명나라에서 청으로 가는 시기로 국가 교체의 때가 된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세력의 판도가 달라지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도 크게 달라지는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여진을 강력하게 통합시킨 누르하치는 1626년 죽었지만 그의 8번째 아들이었던 홍타이지(숭덕제)가 칸으로 선출되면서 사태는 조선에게 더욱 심각해졌다. 그런데 사실 누르하치는 조선에 대해 그렇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누르하치는 조선과 싸우려는 생각도 없었고 그냥 사이좋게 지내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누르하치는 “조선과 우리는 원수진 일이 없었다. 가급적 싸우지 말고 말로 잘 설득해야 한다!”식이었다. 그러나 누르하치와는 아주 다르게 그의 아들이었던 홍타이지는 조선을 적대적으로 생각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명나라만 떠받들고 여진족인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 아니냐는 생각도 들었다. 홍타이지는 조선이 그냥 자신들과 친한 척만 하는 뿐 언제 명나라와 손 잡고 뒤통수를 치는 것 아니냐는 의심도 했다. 그래서 홍타이지는 조선을 힘으로 제압해서 관계를 사전에 정리해야 한다는 구상도 있었다.
누르하치는 명과 싸우기도 전에 조선과 싸워서 좋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반면 홍타이지는 나중에 우환이 될 수 있으니 먼저 치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생각이 다른 홍타이지가 칸의 자리에 오르니 사태는 심각해졌다. 이때 조선의 왕이었던 인조는 후금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무런 대책도 없이 룰룰라라였다. 그냥 명나라만 받들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이 생각하는 아주 단순한 생각이었고 또한 신하들도 역시 그랬다.
조선, 정묘호란이 닥치기 전 뻘짓거리
동아시아의 패권 구도가 바뀌어 가는데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큰일 날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왕이나 신하들이 사태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 날, 1627년 1월쯤인데 결국 여진의 대군이 조선으로 몰려온 것이다. 조선은 여진족이 쳐들어오자 우왕좌왕하고 대책을 세우지도 못하고 멍 때리고 있었다.
후금은 조선으로 밀물같이 쳐들어왔지만 양민들을 학살하지는 않았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에 일본군이 양민들을 학살한 것에 비하면 그래도 나았다고 할 수 있다. 단지 후금은 양민들을 잡은 뒤에 자신들의 머리 스타일로 변발을 하게 했다. 양민들은 목숨은 건졌지만 머리 모양을 만주족 같이 하였다.
조선의 조정은 난리가 났다.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는데 어찌하면 좋을까 하면서 전전긍긍했다. 신하들은 인조에게 속히 대책을 세워 줄 것을 요청했지만, 인조는 그 대책을 대신들이 구해야지 내가 어찌하냐면서 역정을 냈다. 그 사이에 후금은 계속 조선으로 남하를 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후금이 쳐들어 온 연유를 알고자 사신을 보내면 어떠냐는 발상을 했다.
왜, 쳐들어 왔는지 적에게 물어보자는 발상
적이 쳐 들어 왔는데 왜 왔냐고 묻자는 발상도 웃기지만 실제 누가 사신을 갈 것인지를 놓고도 의견이 분분했다. 어찌 보면 쳐 들어온 적에게 왜 왔냐고 묻기도 전에 적진에 갔다가 아무리 사신이라도 목이 댕강 잘릴 판인데 과연 누가 자진해서 갈 것인가? 신하들은 사신으로 자신이 가는 것에 대해서는 노코멘트할 수밖에 없었다. 조정은 대책다운 대책도 못 세우고 좌충우돌하는 말들만 오갔다. 그러는 와중에 북방에서는 조선군이 연일 참패를 하고 후금은 계속 남진을 했다.
조선이 사신을 누구로 보내냐 마느냐 우왕좌왕 할 때, 거꾸로 후금에게서 서신이 도착했다. 바로 후금의 총사령관으로 온 아민이 보낸 서신이다. 후금의 총사령관 아민이 보낸 서신의 내용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후금과 화친을 하자는 내용이었다. 이때 만일 제대로 후금과 화친을 하였다면 나중에 큰 화(禍)를 피할 수 있었겠지만 어리석은 인조는 그때 그것을 몰랐다. 오히려 후금에게 서신을 받고 바로 답신을 하면 조선이 겁먹고 쫄아보이니 최대한 답신을 늦게 보내는 것이 좋다고 인조나 신하들은 생각을 같이 했다. 그런데 그렇게 아무런 대책도 못 세우는 상황에서 답을 늦게 준다고 달라질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인조는 답신의 형식에 있어 고민을 했다. 답신의 명의를 누구로 할 것인지였다. 후금의 일개 장수가 보낸 서신에 왕이 답신을 하는 것은 격에 맞지 않는다고 보고 도원수 정도의 명의로 하면 합당하다고 대신들은 의견을 모았다. 이때 후금은 계속 남진을 하면서 조선을 작살내고 있는데 조선의 조정은 한가하게 격을 따지고 있었다. 인조와 신하들은 받은 서신에 대해 답신을 누구의 명의로 할 것인지 그리고 언제 보낼 것인지 하는 등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모문룡의 가도 사건, 우리 백성들은 명나라 장수에 죽어간다
후금이 이렇게 조선을 쳐 들어 오는 상황에 당시 가도에 숨어 지내던 모문룡이라는 작자가 수시로 육지로 와서 조선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살육했다. 모문룡은 명나라 말기 장수로 1621년 후금이 요동을 공격하자 후금의 배후에서 싸운다는 명분으로 1629년까지 평안도 철산 앞바다의 가도(椵島)에 머무르며 조선의 백성을 참살하는 등 행패를 일삼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것을 모문룡 가도사건이라고 한다. 가도사건은 광해군 때 1621년에 후금(後金)에 쫓긴 명(明)의 장군 모문룡이 이끄는 군대가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있는 섬인 가도에 주둔하면서 벌어진 조선과 명 그리고 후금 사이에 벌어진 사건 전체를 의미한다. 아무튼 명나라 장수가 후금에게 깨져서 조선의 압록강 하구에 짱 박혔던 것이라고 보면 된다.
모문룡은 후금이 쳐 들어 오면서 잡은 조선의 백성들을 죽이지는 않고 머리만 깎아서 변발을 시켰는데 이들을 잡아서 죽이기 시작한다. 모문룡에게 잡힌 조선의 백성들은 엉뚱하게 명나라 군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꼴이었다. 모문룡은 우리의 백성들을 무참하게 살육하여서 목을 베어 본토의 명나라에 보내서 그것이 자신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 같이 포장을 했다. 그러니까 후금의 병사들이 아닌 우리 조선의 백성의 목을 따서 명나라에 보낸 것이다.
이렇게 자신이 후금과 싸워서 전적을 올린 것 같이 당시의 희대의 명나라 간신이었던 위충현에게 보고 하였다. 그러자 모문룡이 큰 공을 세웠다는 식으로 명나라는 그를 또 칭찬하고 포상을 했다. 이때 모문룡은 위충현에게 수시로 뇌물을 상납하면서 자신의 전적을 자랑했다. 그러니까 중국 놈들은 조선 백성을 목을 따서 자기들끼리 잘했다는 식으로 성과급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이렇게 황당한 사태가 전개되는 가운데 결국 조선은 갑론을박(甲論乙駁)을 하면서 후금의 장수가 보낸 서신에 임금이 답신을 보내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답서를 보냈지만 후금이 받았는지 못 받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계속 전쟁은 이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의주와 안주까지 후금군이 점령했다. 이렇게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후금이 쳐들어 오자 조선의 조정은 안절부절 할 수밖에 없었다.
인조의 엑소더스, 강화도로 가자
조선의 대신들은 인조에게 몽진을 권유했다. 이괄의 난에도 도망다니기 바빴는데 또 후금으로 인해서 궁궐을 빠져나가야 한다니 인조도 참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 인조는 신하들에게 이번에는 어디로 몽진을 가야 하는지 묻자, 신하들은 후금이 물에 약하니 강화도로 도망가자는 의견을 냈다. 결국 인조는 남쪽으로 침공하는 후금을 피해 강화도로 몽진을 가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후금은 남진을 했는데 총사령관이었던 아민은 돌연 고민에 빠졌다. 조선의 왕이 어디로 튀었는데 어디까지 쫓아가야 할지 판단을 내리기는 어렵고 자신의 군사가 고작 3만명이라는 점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기는 곤란하기도 했다. 후금의 아민은 칸이 자신에게 병사 3만명을 준 까닭은 전쟁을 계속하라고 하기보다는 조선을 혼내주고 협상을 통해 자신들이 원하는 답만 얻으라는 뜻이 있다고 봤다.
후금, 조선과 협상을 원하다
후금이 원한 답은 간단했다. 명나라와 단교를 하고 조선과 후금이 형제관계를 맺자는 것이었다. 후금의 입장에서는 이때 조선이 명과 단교를 하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얻을 것이라 봤던 것이다. 그제서야 아민은 인조가 보낸 서신에 답장을 썼다.
두 나라가 화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화친에는 반드시 진심이 담겨야 합니다.
조선이 후금과 화친을 원한다면 명과 관계를 단절하기 바랍니다.
그러고 나서 후금이 형이 되고 조선이 아우가 된다면 그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글로 볼 때는 그냥 친하게 지내자는 형식이지만 이것은 명과 단교하라는 협박조의 답장이었다. 이런 답장을 받자 인조와 신하들은 머리를 맞대고 또 고민에 빠졌다.
목에 칼이 들어온다고 하여도 명나라와 의리를 져 버릴 수 없습니다.
일이 급하니 일단은 저들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고 후사를 도모하면 어떤지요?
격론에 격론을 통해 조선은 답서를 보냈다.
조선은 예의의 나라이며 의리를 목숨같이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황조를 버린다면 귀국은 또 어떻게 우리를 믿겠는가?
문장은 그럴듯하지만 이러한 말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기 어렵다는 말을 완곡하게 한 것이다. 후금은 이러한 조선의 답장을 받자 흥분했다. 이런 식이라면 후금은 그냥 조선을 계속 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후금의 아민은 돌아가지 않고 조선에 그냥 머물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포로로 잡았던 강홍립과 박난영을 보내주면서 유화적인 태도도 보였다. 특히 강홍립은 후금에게 패하고 포로가 된 지 9년이나 되었던 인물이다. 사실 강홍립이 포로로 잡히자 조선의 대신들 가운데 일부는 그를 변절자로 욕하기도 했지만 실상 그는 변발도 거부하고 그냥 조선의 신하로 그냥 남았던 것이다.
강홍립은 후금에게 풀려나서 인조를 만나자 “자신이 이렇게 살아서 임금을 뵈오니 더 무엇을 바라겠는가” 했다. 인조는 강홍립에게 후금의 동태를 물어봤다. 이에 강홍립은 후금이 평양에 머물면서 돌아갈까도 했지만 그냥 계속 진격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은 것 같다고 보고했다. 또한 전하의 답서를 보고 200년간 황조를 섬겼다는 말에 후금이 감동하면서 조선은 의리가 있으니 한번 통하면 오래 지속될 것이라 왕에게 말했다.
조선, 능숙한 사기술로 후금을 기만하다
한편 지지부진하게 협상이 늦어지자 후금은 명과의 단절은 자신들이 양보하지만 조선이 명의 연호를 버리고 왕제를 인질로 보내라고 했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후금은 조선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조선이 이때 선택할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자 조선은 잽싸게 원창 부령 이구를 원창군으로 삼아 왕의 동생으로 가장하여 인질로 보냈다. 사실 이구는 왕의 9촌 숙부인데 동생으로 위장해서 보낸 것이다. 또한 예물과 답서도 후금에게 보냈는데, 황당하게 명의 연호를 그곳에 쓴 것이다. 조선의 답서를 받은 후금은 황당했다. 분명히 명의 연호를 버리라고 했는데 버젓하게 답서에 명의 연호를 적어 보냈으니 이것은 마치 협상했지만 빅엿을 먹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때 답신에 적은 명나라 연호는 천계였다. 천계는 명나라 황제 천계제의 연호이다.
근거 없는 자신감, 그러나 실속은 없다
인질은 가짜로 보내고, 답신에는 명의 연호를 적어 보내는 조선의 당당함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자신감인가? 명나라 연호를 쓴다는 것은 단순한 날짜 표기가 아니다.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충성을 상징하는 중요한 것이었다. 후금은 이러한 조선의 답신을 받자 다시 사신을 보냈다. 후금의 사신은 명나라 연호가 있는 답장을 칸에게 보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자 조선은 고작 글자 하나 갖고 뭘 그렇게 쫀쫀하게 구냐는 식으로 또 자만감을 보였다.
후금의 사신은 칸에게 올린 서한에는 연월일을 표기하지 말자는 의견을 냈다. 만일 명나라 연호가 적힌 서한을 칸에게 올렸다가는 그대로 목이 달아날 것은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의 대신들은 후금의 사신이 이러한 제안을 내자 또 자기들끼리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면서 궁실거렸다. 결국 조선은 명나라 연호를 빼고 국서를 대신 작성하여 보내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그런데 후금의 사신은 형제의 예를 갖추기 위해 예식을 거행하자고 했다. 백마와 흑우를 잡아서 서로 피를 나누어 마시자고 했다. 여기에 조선의 대신들은 기겁을 했다. 어찌 생피를 먹는단 말인가? 그런데 그 피를 누가 먹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조선의 국왕이 그 피를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조정은 이러한 후금의 요청에 대해 난리법석이 났다. 이렇게 후금의 요구에 대해 어찌할 바를 모를 때, 후금 사신 유해는 “말과 소를 잡아 피를 마시는 일은 대신들이 하고 국왕은 향불만 태우면 된다”는 중재안을 내 세웠다. 결국 후금의 중재안을 조선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대신들은 말과 소의 피를 마시게 되었지만 뭐 어떻게 할 없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정묘호란의 불씨, 청나라를 인정 못하겠다
그러나 간신히 수습된 후금과 조선의 관계는 오래가지 못한다. 1636년, 인조 14년에 후금이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다. 이때 청은 조선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중에는 이미 복속한 몽골의 왕족들도 있었다. 그러니까 이때 몽골족이 사신단 일원으로 온 것은 이제 후금이 아닌 청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조선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면서 청은 까놓고 요구했다.
천하의 질서를 바로잡으신 우리 칸께서 마땅히 황제가 되셔야 합니다.
형제국인 조선도 황제로 옹립하는 일을 함께 해야 한다.
조선 조정은 청의 요구에 대해 시끌벅적했다.
청은 오랑캐다, 무찌르자
감히 오랑캐가 황제를 운운하다니…
전하! 이제 더 이상 참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군을 일으켜서 오랑캐들을 무찔러야 합니다.
세상은 변해 가는데 조선은 근거 없는 자신감에 사로 잡혀서 결국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굴욕을 당하게 된다. 청나라가 오랑캐 족속이니 군사를 일으켜서 치자는 말은 조선의 대신들의 판단력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준다. 조선에는 군사로 나설 병력도 없고, 지휘관도 없다. 그런데 누가 누구를 토벌한다는 것인가? 한 마디로 정신나간 작자들이 모여서 합창을 하니 아름다운 곡조 같지만 사실은 쓸데 없는 소리를 지껄인 것에 불과하다. 결국은 띨띨한 신하들 때문에 모지리 인조는 이러저리 끌려다니다가 남한산성에서 개고생을 한다.
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때 인조는 남한산성에 피신하였지만 결국 59일만에 청나라 황제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때는 1637년 2월 24일(정축년 음력 1월 30일)이었고, 이때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항복의 예를 취하였다. 이것을 삼전도의 굴욕(三田渡의 屈辱)이라고도 한다. 인조는 3번 무릎 꿇고 9번 머리를 조아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족(蛇足)
조선은 당시 이괄의 난을 통해 최정예군들은 이미 작살이 난 상황인데 무슨 군을 일으켜서 청을 제압할 수 있었겠는가? 또한 명나라가 망했음애도 상황 파악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남한산성’을 보면 이때 조선의 관리들의 행태와 무능함은 극치를 보여 주고 있다. 광해가 계속 왕으로 있었더라면 그나마 중립외교를 통해 조선은 참화는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은 어느 날 갑자기 창졸(倉卒)간에 당해서 조선이 도륙이 났지만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은 유연하게 대처하였더라면 조선이 그리 본진까지 털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조선의 왕과 지도층이 한심하고 무능해서 영혼까지 탈탈 털린 역사적 사례가 인조와 그 신하들에 의해 각본이 짜이고 연출 된 것이다.
어쩌면 이괄의 난이 성공했다면 어땠을까 한다. 어리석고 멍청한 왕과 간신 같은 신하들이 조선 백성들을 전쟁의 도가니에서 구하기는커녕 원망의 대상이었고 이러한 작자들에 의해 조선이 비실비실 유지되다가 결국은 일본에 의해 식민지 시대는 시작되었다. 역사에 있어서 때로는 새로운 왕조가 적절한 시기에 들어서는 것이 백성들을 위해서도 좋다. 왕의 무지, 신하들의 근거 없는 자신감, 왕이나 신하들 모두가 백성은 안중에도 없음 등의 요소로 똘똘 뭉쳐 있다가 졸지에 엄청난 비극을 조선이 맞이한 것이다.
역사는 멀리서 보면 비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코미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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