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는 때로 황당한 일의 연속이다. 남미에서 대단하였던 잉카 제국이 유명한 전략가도 아니고 스페인에서 돼지를 키우던 무식한 놈에 의해 허무하게 망했다는 사실은 실로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잉카 제국 멸망사
남아메리카에서 1천만 인구라는 어마어마한 잉카 제국이 고작 168명밖에 안 되는 소수의 스페인 탐험대에 의해 어떻게 멸망했는가? 남미 대륙에서 찬란한 문명을 꽃 피운 잉카는 이렇게 쉽게 망할 수 밖에 없는 한심한 부족이었을까?
잉카 제국은 망하기 전까지 남아메리카를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지배했던 어마어마한 대제국이었다. 잉카 제국은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기 이전에 남미에서 가장 큰 제국으로 군림하면서 남아메리카 대륙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통치했다. 지금의 페루, 에콰도르 서부,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서부 등 총 6개국 등 지역이 잉카 제국의 중심이다. 그러나 이렇게 어마어마한 제국이 한 순간에 스페인에서 돼지를 키우던 놈에 의해 폭삭 멸망했다.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이후 유럽인들의 탐욕
인간은 기본적으로 탐욕의 동물이다. 남의 재물을 빼앗기를 좋아하고 자신만의 부를 축적하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스페인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몰려 간 것은 순전히 탐욕 때문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신대륙이 발견되면서 그곳에 황금과 은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너도 나도 이때 한몫을 잡아야 한다는 심리가 팽배했다.
잉카 제국은 우연하게도 금과 은이 많았고 이것은 16세기 유럽에서 금을 중요시하는 통화 단위와 똑같았기에 스페인 사람들은 신대륙에 가면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 당시 스페인 선원들이 1년간 뼈 빠지게 일해서 받는 평균 임금은 불과 금 2분의 1파운드였다. 바다에서 20년 동안 선원으로 일하면 금 10파운드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신세계 정복 전쟁인 카하마르카 전투에 참여했던 기병이 금 90파운드와 은 180파운드를 하사 받았다는 이야기는 가히 로또가 당첨되었다는 말과 같았다. 이것은 배에서 일반 선원으로 일하면 받는 180년 치에 달하는 봉급이었다. 그러자 스페인 사람들은 신대륙에 가서 기회를 잡으면 인생에 있어 큰 거 한 방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 잡혔다. 특히 스페인에서 사회의 밑바닥을 기면서 살았던 신분이 저급한 사람들은 신대륙에 가서 황금이나 얻을 수 있으면 대박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선원은 물론이고 목수, 장사꾼, 구두 수리공, 걸뱅이 등 다양하고 미천한 사람들도 무턱대고 신대륙을 갈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했다. 이제 그들은 황금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스페인에서 돼지를 키우던 무식한 놈, 프란시스코 피사로
그렇게 신대륙을 가고자 했던 사람들 가운데 프란시스코 피사로(1478∼1541)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기마대 장교였던 아버지와 천한 하녀 사이에 태어난 놈이었다. 그래서 그는 명색은 집안의 장남이라고 하지만 교육을 받지 못해 글씨도 몰랐고 유산도 물려 받지 못하고 돼지를 키우면서 살았다. 그러나 피사로도 모두 황금을 찾으러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욕망도 꿈틀거렸다.
결국 어찌어찌해서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멕시코의 정복자 에르난 코르테스와 함께 서인도 제도로 가는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후에 다른 원정대와 함께 페루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파나마에서 시장과 관리인을 하다가 페루를 탐험하고 그곳에 많은 금이 있다는 확신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5세로부터 정복지 총독으로 임명한다는 문서를 받고, 파나마에 돌아와서 형제들과 군인들을 데리고 대규모 약탈 원정에 뛰어들었다.
잉카에 도착한 프란시스코 피사로
잉카 제국에 대해 상세한 정보를 얻은 피사로는 1532년 11월 15일에 고작 인원이라야 얼마 되지 않는 168명을 이끌고 카하마르카에 도착했다. 잉카 제국에 도착한 프란시스코 피사로는 어떻게 하면 잉카인들에게 황금을 빼앗을까 궁리를 하다가 그곳의 황제를 잡아서 족쳐야 한다는 나름대로 전략을 짰다.
1532년 11월 16일에 잉카 제국의 황제였던 아타우알파는 오늘날 페루 북서부 지역인 온천도시 카하마르카에서 다른 귀족들과 쉬고 있었다. 이때 잉카 제국은 통치권을 놓고 내부에서 이복형제와 싸움을 치렀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엄청나게 많은 병력을 거느린 아타우알파 황제는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탐험대가 면담을 요청하자 기꺼이 받아들였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이방인들의 숫자도 몇 명 안 되어 보였고 또한 잉카 제국에서는 손님이 초청을 하면 거부하지 못하는 관습도 있었기에 그렇게 한 것 같다. 그러나 잉카 황제는 그 초청이 바로 스페인 놈들이 파 놓은 음모라는 사실을 모르고 간 것이다.
프란시스코 피사로에게 사로 잡힌 잉카 황제
피사로는 손님으로 찾아온 아타우알파 황제를 포로로 잡았다. 그리고 잉카황제의 경비를 섰던 그의 군대를 완전히 궤멸시켰다. 그런데 이 전투에서 스페인군은 한 명의 사망자도 없었고, 모든 것이 30분 만에 끝났다. 그런데 이것은 스페인 탐험대와 잉카 제국 간의 전투라고 하기도 뭐 하고 그냥 마구잡이 대량 학살이었다.
어리석게도 아타우알파 잉카 황제는 스페인 탐험대에 대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잉카 황제는 자신이 신성한 존재라고 스스로를 여겼고 굉장히 많은 수의 경비대가 보호를 하고 있었기에 감히 자신을 누가 해치리라고는 상상조차 못 한 것이었다. 피사로는 황제가 나타나자 각본대로 움직였다.
황제가 위용이 넘치는 가마를 타고 나타나자 피사로는 탐험대 일행으로 같이 온 도미니크 수도회 신부 벨베르데를 보냈다. 신부는 황제에게 기도서를 보이면서 여기에 그리스도교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어있다고 하며 아타우알파에게 내밀었다. 그러면서 잉카 황제에게 ‘기독교로의 개종과 스페인 국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라’고 다그쳤다. 이 말을 듣자 잉카 황제는 황당하였고 격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는 기도서를 집어던졌다.
아타우알파 잉카 황제는 ‘우리는 누구의 속국도 되지 않는다. 나는 지상의 어느 군주보다 위대하다. 나는 신앙을 바꾸지 않겠다. 너희들이 말하는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바로 그 인간들에게 의해 죽었지 않는가’라고 외쳤다. 이 말이 끝나자 피사로는 바로 공격 명령을 내렸다. ‘산티아고! 돌격하라, 스페인 군대여(Santiago ycierra, Espana).’
그런데 문제는 잉카인들이 난생처음 보는 무기로 무차별 공격을 당했다는 것이다. 피사로는 대포와 총으로 잉카인들을 대거 학살하고 황제를 붙잡았다. 이 당시에 아타우알파 황제를 보호하는 수행원은 약 7,000여 명 규모라고 하니 숫자로만 보면 정말 엄청났다. 그러나 피사로가 이끈 기병 62명을 포함해 모두 168명에 불과했다.
168명의 스페인 병사들이 7,000명에 이르는 잉카인들을 그냥 추풍낙엽처럼 쓰러뜨리고 황제를 붙잡은 것이었다. 전해지는 기록으로는 스페인 탐험대 병사들이 2시간도 안돼서 7,000명 정도의 원주민을 모조리 죽였다고 하니 이것은 전투가 아닌 학살이라 볼 수 있다. 사실 잉카는 대제국이라고 하였지만 건축과 농사만 알았지 전쟁을 위한 도구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잉카인들은 총을 들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종횡무진하는 스페인 사람들을 보고 공포를 넘어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지옥과 같은 사태를 직면한 것이었다. 또한 백인들이 못 보던 동물과 함께 나타나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 전해지는 잉카의 전설은 스페인 탐험대의 출현에 대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것이었다.
황금을 줄테니 풀어 달라는 황제의 간청
아주 우습게 스페인 탐험대의 포로가 된 잉카 황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의 요구는 ‘신에 관한 믿음’이 아니라 ‘황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잉카 황제는 스페임 탐험대에게 원하는 만큼 많은 황금을 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잉카 황제는 피사로에게 ‘감옥에서 자신을 풀어준다면 그 안을 금으로 채워주겠다’고 제안을 했다. 이러한 제안을 받은 피사로는 대박이 터졌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잉카 황제는 자신을 풀어준다는 피사로와 약속을 하였다. 이때 황제가 갇힌 방의 면적은 518㎝×670㎝. 높이는 274㎝였다고 한다. 한편 잉카 황제가 포로로 잡히자 허둥지둥거리었던 8만 잉카 군대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다. 감옥에 갇힌 채 ‘금을 가져오라’는 황제의 지시만 멀뚱멀뚱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잉카 황제 아타우알파의 몸값으로 피사로는 방 한가득 황금을 받았다. 그런데 피사로는 약속대로 황금을 받았지만, 자신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피사로는 황금만 챙기고 몇 달 후에 잡아두었던 황제를 죽였다. 이후 다음 해 11월 피사로는 잉카인들과는 단 한 번의 전투도 없이 잉카의 수도였던 쿠스코에 무혈입성하였다. 그리고 서서히 잉카 제국은 멸망의 길을 걷게 되었다.
잉카 제국의 몰락과 피시로의 죽음
잉카가 쇠망해지자 나름대로 그들은 스페인군에 대항할 반란군을 모았다. 한때 반란군의 숫자는 불어나서 20만 명까지 되었지만 워낙 전투력이 없던 그들은 속수무책으로 진압당하고 힘을 쓰지 못했다. 잉카인들은 계속 스페인 탐험대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결국 1572년에 그대로 제국은 멸망했다. 한편 이러한 와중에 스페인 탐험대도 내부적으로 분열이 되기 시작했다. 엄청나게 많은 황금을 얻었지만 배분의 문제에 있어 서로간 갈등과 욕심이 유발된 것이다.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을 도왔던 알마그로도 자기 몫으로 전리품을 챙겨달라면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처형되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을 묵사발로 만든 피사로도 알마그로를 지지하였던 무리에 의해 살해되니 그때가 1541년이었다.
잉카 제국의 멸망 원인
남미의 엄청난 제국을 건설한 잉카가 그렇게 허망하게 168명 밖에 안 되는 스페인 탐험대에 의해 멸망하게 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일까? 과연 피사로가 천재적인 지략가이면서 전투 능력이 뛰어난 자라서일까? 스페인에서 돼지를 키우고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이 어떻게 전략가가 되어서 잉카제국을 망하게 한 것일까? 그런데 알고 보면 잉카 제국은 스페인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망할 수밖에 없는 한계성을 지닌 제국이라고 하겠다.
첫째, 싸울 무기가 없었다. 잉카 제국은 금과 은이 넘쳐났지만 철을 사용할 줄 몰랐다. 또한 총도 없었다. 잉카의 용사들이 아무리 용맹하게 싸운다고 하여도 구석기 수준의 돌 무기를 들고 있다면 대포와 총으로 무장하고 칼로 덤벼드는 스페인 병사를 도저히 이길 수 없다.
둘째, 정보 전달 능력이 없었다. 특히 문자가 없었다. 잉카인들은 문자가 없이 생활했기에 정확한 정보를 서로 전달할 수 없었다. 잉카인들은 ‘키푸’라는 밧줄과 끈의 매듭으로 소규모 정보를 기록하는 게 전부였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의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서로 알리고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시스템이 전무했다.
셋째, 잉카 부족의 내부 분열이 컸다. 잉카인들이 무려 1천 만명이 되었지만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완벽하지 않았다. 따라서 형태는 대제국이지만 잉카 황제의 폭정에 시달렸던 다른 많은 부족들은 오히려 스페인대에 협력하고 스스로의 자멸을 이끌었다.
넷째, 맹목적 전설에 사로잡혀 있었다. 말을 탄 백인을 보고 적으로 생각하기보다는 신적인 존재로 여기었기에 스페인 병사에 대해 싸울 의지가 애초 없었다. 잉카 전설에 백인들이 못 보던 동물과 함께 나타나서 백성을 구제할 것이라는 헛된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다섯째, 가축의 전염병이 퍼지자 잉카인들은 이에 대한 면역력이 전혀 없었다. 남미에는 말이나 소가 없었다. 유럽인들이 가축을 신대륙에 들여오면서 자연스럽게 동물성 전염병이 퍼졌고 면역력이 없던 수많은 원주민들은 떼죽음의 행렬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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