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씨왕후, 발기(發岐)가 아닌 연우(延優)를 왜 택했을까?

최근 티빙에서 방영 중인 우씨왕후가 때 아닌 인기를 모으고 있다. 공중파에서 사극 다운 사극이 사라져서인지 몰라도 고구려를 배경으로 한 ‘우씨왕후’가 대박이 났다. 고구려 왕실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사태 전개는 사뭇 흥미진진하다. 그래서일까, 고구려 우씨왕후에 대해 궁금함이 더 커진다. 특히 왜 우씨왕후는 발기가 아닌 연우를 택했을까?

우씨왕후, 발기가 아닌 연우를 왜 택했을까?

‘우씨왕후’ 드라마는 고구려 시대를 배경으로 고국천왕이 후사가 없이 갑작스럽게 죽자 왕의 형제 가운데 한 명과 혼인하여 왕후의 자리를 지켜간다는 내용이다. 드라마라는 것이 역사를 그대로 재현한 것은 아니지만 흥미와 재미를 더하다니 긴박감도 있다. 어쨌든 우씨왕후는 남편인 고국천왕이 졸지에 죽자 쫓겨날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형사취수혼’이라는 그 당시 제도를 이용하여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누리는 데 성공한다는 것이 결말이다.

최근 인기사극 우씨왕후에 대한 상식입니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이 죽자 그의 형제들 가운데 형사취수혼을 통해 왕후 자리를 유지한다. 그런데 왜 우씨왕후는 발기가 아닌 연우를 택했을까? 결국 연우는 산상왕이 되고, 고발기는 발기하였지만 자결합니다.

형사취수제,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형이 아들 없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형사취수혼’은 북방 민족 사이에서는 흔한 풍속이었다. 후한서 동이열전을 보면 ‘고구려는 언어나 생활습관이 부여와 유사한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풍속이 있다’고 하였다. 이러한 형수취수혼은 기마민족인 고구려에도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형제역연혼’, ‘수계혼(收继婚)’이라고도 불리는 형사취수에는 남편을 잃고 먹고 살기가 막막해진 형수와 자식을 돌보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중요한 것은 자신의 가문을 지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만일 형이 죽었는데 형수가 다른 곳으로 재혼을 한다면 형의 재산을 다른 남자에게 고스란히 빼앗기게 되는 결과가 된다. 따라서 형수가 다른 남자와 사느니 그 동생이 돌보면서 가문의 재산을 지키는 것이 유리했을 것이다. 유목민족에게는 말이나 가축 등이 엄청나게 큰 재산인데 형수가 그것들을 다 몰고 다른 곳으로 간다면 이 또한 난감했을 것이다. 따라서 씨족사회 특히 유목민족에서는 형사취수혼이 오랫동안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산상왕이 즉위하게 되는 과정을 보면 ‘형사취수‘라기보다는 동생이 형수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형수가 동생을 간택하는 것 같다. 우씨가 재혼할 시동생을 선택하는 ‘형사취제’이다. 이렇게 볼 때 형식상으로는 왕후 우씨가 외면상으로는 취수혼 풍속에 따르는 것 같지만 내면상으로는 매우 정치적인 행위를 꾸민 것이다.

우씨는 왜 이렇게 자신의 마음대로 새 남편을 간택하는 행동을 하였던 것일까? ‘형사취수혼’이라는 제도적 관점에서만 본다면 형수를 취할 첫 번째 권리는 ‘고발기’에게 있다. 그런데 우씨왕후는 ‘고발기’가 아닌 ‘고연우’를 선택했다. 왕의 형제들이 형수를 취한 것이 아니라, 형수가 시동생 가운데 마음에 드는 놈을 골랐는데 그것이 바로 ‘발기(發岐)’가 아닌 ‘연우(延優)’였다.

우씨왕후, 발기를 버리고 연우를 취하다

우씨왕후는 고국천왕이 죽자 주변에서는 어서 튀라는 조언도 듣지만 자신이 새로운 왕을 찾아 나서기를 택한다. 드라마에서는 셋째 왕자인 고발기가 포악무도한 성격이기에 고구려를 맡길 수 없다면서 마치 나라의 안위를 위해 고연우를 자신의 새 남편으로 맞이한다는 정당성을 부여한다. 사실 고발기가 성격이 더러웠는지는 정말 알 수 없다. 어찌 보면 우씨왕후는 고발기 보다는 고연우를 선택한 근본적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씨부인은 먼저 고국천왕이 살아 있을 때 사실 왕후였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자신이 비록 왕후의 신분이지만 고국천태왕과 180년부터 197년까지 무려 17년간의 같이 살았지만 자식도 없었다. 고국천왕이 좋아서 결혼한 것도 아니고 그 당시 고구려 5 부족 가운데 연나부 출신으로 정략적 결혼을 한 입장에서 껍데기 같이 살았을 것이다. 고국천왕도 사실 우씨왕후에 대해서 특별한 애정이 없었던 같다.

이렇게 고국천왕이 우씨왕후와 사이도 별로인데 소원한 부부사이를 더 망가트린 사건이 생겼다. 바로 우씨왕후의 배후인 연나부의 반란이었다. 190년 연나부의 어비류와 좌가려 등은 무리를 이끌고 왕성을 공격하는 역모를 일으켰다. 특히 왕비의 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는 우씨왕후을 든든한 뒷배로 하여서 국정을 농단하다가 나라를 열심히 말아먹었다. 그러다가 결국 고국천왕에게 발각되고 이들을 처벌하려 하자, 우씨왕후의 배경이었던 이들이 강력 반발하면서 고국천왕을 죽여버리겠다고 역모를 꾸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역모는 진압되고 결국 우씨왕후 세력은 스스로 궤멸되는 꼴을 맞았다. 그렇지만 고국천왕은 우씨왕후에 대해서는 처벌을 내리지 않고 눈 감아줬다. 고국천왕은 자신을 죽이려고 덤벼든 일당을 척결했지만 그래도 부부이기에 우씨왕후에 대해서는 그냥 넘어가는 모습을 보였다. 이후 고국천왕은 아마도 우씨왕후에 대해서 그다지 애정도 없고 담담했을 것이다.

​우씨왕후는 왕의 사랑도 못 받고 아이도 없는 상태로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친정 세력이 역모를 하다가 잡혔으니 말도 못 하고 낑낑대면서 왕후로서 권위와 입장도 없었다. 이렇게 우씨왕후는 좌절된 권력욕과 애정의 결핍 그리고 소외감으로 똘똘 뭉쳐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졸지에 고국천왕이 죽으니 자신의 처지가 아주 난감해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우씨왕후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떠 올리고 고국천왕의 동생들을 찾아간다.

우씨왕후 인물관계도

고국천왕이 죽자 왕의 자리를 이을 아들은 없었고, 밑으로 아우는 발기(發崎), 연우(延優), 계수((瀱須)가 있어 이들이 왕위계승서열에 올라있다.

우씨왕후-인물관계도

우씨왕후와 고발기와의 만남

197년 5월 고국천왕이 후사 없이 죽었다. 그러자 우씨왕후는 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숨긴 채 왕의 동생인 고발기를 찾아갔다. 그리고 그와 후사를 논하였다. 그러나 고발기는 뜬금없이 오 밤중에 찾아와 왕의 후사를 논하는 형수가 수상하다고 여기고 그녀를 철저히 외면했다. TV 드라마에서는 발기가 성질이 더럽고 포악하게 묘사되는데, 이것은 어쩌면 아닐 수 있다.

“하늘에 떠 있는 별의 운행은 다 돌아가는 법칙이 있는 것이며, 왕위를 잇는 것 또한 그러하니,
어찌 가볍게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밤늦은 시간에 왕후께서 저희 집에 들른 것 또한 예의에 벗어난 것이 아닙니까.”

​왕제 발기는 왕이 살아 있는데 무슨 말이냐는 식이다.

발기의 입장에서는 형이 죽은 것을 몰랐고, 갑자기 왕의 후사를 밤에 와서 묻는 형수에게 괜한 말을 했다가 자칫하면 자신이 역모의 주역이 되는데 어떻게 쉽게 답변을 할 수 있었겠나? 우씨왕후가 고발기를 찾아간 것은 형사취수에 진짜 관심이 있어 그의 의향을 물으려 했다기보다는 혹시라도 나중에 형사취수의 일순위자를 제쳤다는 오명을 쓰지 않으려고 미리 머리를 쓴 것으로 보인다. 엄밀하게 보면 우씨왕후는 새로운 남편감으로 고발기에게 관심이 1도 없었다.

우씨왕후와 고연우와의 만남

우씨왕후는 왕의 형제 가운데 고연우에 대해 어쩌면 처음부터 연정이나 또는 관심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우씨왕후는 고연우를 만났을 때는 고국천왕이 죽었다는 사실을 바로 밝힌다. 또한 연우는 밤중에 찾아온 그녀에게 야식까지 직접 준비한다고 하면서 고기를 썰다가 칼로 베이자 우 씨가 치마끈을 풀어 상처를 감싸주었다고 하니 이미 서로에게는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한편 우씨왕후는 연우와 형이 죽은 후 대책을 논하면서 고발기를 모함하는 한편 연우에게 자신을 궁까지 호위해 줄 것을 부탁했다.

연우를 꼬셔서 왕궁으로 들어간 왕후 우씨왕후는 왕명을 조작해서 연우를 왕위에 세웠고, 신료들에게 알려 연우를 왕위에 추대하면서 고구려의 역사는 이렇게 또 달라졌다.

우씨왕후가 연우를 초이스한 이유

고구려의 역사가 지금까지 아주 정확하게 내려 오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가지로 헤아려보면 한 마디로 우씨왕후가 고연우를 선택한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에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발기에 대해서는 애시당초 관심도 없었고, 어쩌면 오래전부터 우씨왕후는 고연우와 썸씽이 있었고 교분도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연우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형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후사를 논의했을 것이다.

역사서에는 고연우가 우씨왕후에게 대접할 고기를 썰다가 손가락을 다쳐 피가 나고 치마로 감싸줬다는데, 야설로는 이것은 우씨왕후와 고연우가 관계했다는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그냥 아주 점잖게 완곡하게 둘 만의 관계를 표현 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미 우씨부인과 고연우는 어쩌면 그렇고 그런 사이로 보인다.

우씨왕후는 고연우를 초이스하면서 그의 성격이나 처세에 대해서도 알았을 것이다. 고발기를 선택하면 자신이 국정을 좌지우지 못할 것 같지만, 고연우를 왕위에 올리면 거의 권력을 차지할 것이란 것도 알았을 것이다.

고발기는 억울하다, 그래서 발기했다

발기는 고국천왕이 죽은 것을 몰랐다. 당연히 발기의 입장에서는 우씨왕후가 갑자기 찾아와서 왕의 후사를 논의하다가 잘못 말하면 자기가 죽는 꼴인데 발기 입장에서는 굉장히 조심스럽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옛날 왕조 시절엔 왕의 후사에 대해 언급하는 것 자체가 자기 목숨을 거는 행위가 될 수 있다. 조선시대 때만 보아도 후계자 문제를 잘못 말했다가 죽은 사람이 부지기수이다. 우씨는 발기가 새가슴이기에 분명 왕의 후사에 대해 거절당할 것을 알고도 일단 발기를 찾아간 것이다. 차기 왕으로 가장 유력한 인물이 고국천왕의 바로 아랫동생인 고발기를 제치지 않았다는 명분이 필요했던 것이고, 우씨왕후의 마음은 이미 고연우에게 있었다. 이것은 우씨왕후가 연우와 이야기를 논하면서 자신의 새로운 남편이자 다음 왕으로 삼아야겠다고 판단된 시점에서 말한 것이 아니라, 집에 찾아가자마자 바로 알렸다는 점에서 바로 드러난다.

우씨왕후는 “대왕이 돌아가셨으나 아들이 없으므로, 발기가 연장자로서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하겠으나, 첩에게 다른 마음이 있다고 하면서 난폭하고 거만하며 무례하여 당신을 보러 온 것입니다.”라고 <삼국사기>와 <고구려본기>에 기록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쩌면 이것은 그냥 나중에 역사에 대의명분용으로 적힌 것이고 이미 고연우와 우씨부인은 내통하고 있었으며 무언의 합의가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연우, 우씨왕후의 새 남편으로 산상왕에 오르다

원래 고발기가 고국천왕이 죽은 뒤에 가장 유력하게 고구려의 왕위를 잇는 것이 맞다. 그러나 우씨왕후의 장난으로 고발기는 밀려나고 고연우가 왕위에 올랐다. 그가 바로 고구려의 제10대 왕인 산상왕이다.

고발기, 분기탱천하여 발기하고 자결하다

자신이 원래 왕위에 올라야 했는데 우씨왕후의 농간으로 쫓겨난 신세가 되자, 고발기는 분기탱천했다. 고발기는 동생인 고연우가 왕위에 오른 것에 대해 발기했다. 발기는 동연으로 가서 그곳의 수장이었던 공손도에게 병력을 빌려 달라고 했다. 고발기의 자초지종을 들은 공손도는 병력을 빌려줘서 성공하면 떡고물도 생기고 자신의 세력도 커질 것 같아 그의 요청을 들어줬다. 고발기는 공손도에게 빌린 3만 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고구려로 쳐 들어왔다. 고발기의 난이라고도 한다.

그렇지만 고발기의 발기는 거기까지 였다. 산상왕의 막냇동생이었던 고계수는 형이 쳐들어오는 것을 막아 진압했다. 발기의 난을 막은 계수는 형인 발기를 붙잡아서 잘못을 꾸짖었지만 같은 형제이기에 처형을 하지는 않았다. 고발기는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하는데 여인의 농간에 속았다는 모멸감과 왕실과 나라에 큰 위기를 몰고 왔다는 죄책감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결국 고발기는 발기했다가 죽었다.

우씨왕후, 권력의 화신으로 55년을 살다

드라마로 보여지는 우씨왕후는 고구려의 정치판을 좌지우지하는 여걸로 묘사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꼼수를 써서 산상왕을 왕으로 올려놓고 자신이 왕비로서 상당한 권력을 가진 것에 불과하다. 또한 산상왕도 그녀 덕분에 왕이 되었기에 나중에는 후비 하나 들이는 것도 꺼려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이다. 산상왕은 왕이지만 우씨왕후의 눈치를 보았기에 나중에 자식도 후비를 통해 얻지만 이 또한 우여곡절을 겪는다. 우씨왕후는 두 번의 왕후에 재위하면서 47년, 왕태후로 7년, 총 55년을 왕실에서 권력을 갖고 놀았다.

우씨왕후는 산상왕을 왕으로 만들고 꿀을 빨다가 234년 죽었다. 그런데 유언으로 자신의 두 명의 남편 중 고국천왕이 아닌 산상왕의 무덤 곁에 묻어달라고 했다. 취수혼의 경우 여자가 죽으면 원래 본 남편(고국천왕)의 무덤에 합장하는 것이 도리인데, 우씨는 산상왕 무덤 옆에 자신의 장지까지 선택하여 그녀가 정말로 누구를 더 사랑했는가를 알 수 있다.

고구려 왕들 가운데 장수왕의 아들이었던 고조다(高助多)는 왕위 1순위자였지만 왕의 자리를 잇지 못했다. 왕이 되어야 하는데도 왕이 되지 못한 고조다(高助多), 훗날 사람들은 그를 쪼다라고 했다. 그런데 고조다(高助多) 이전에 고발기(高發岐)도 역시 쪼다와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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