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거란전쟁에 있어 김훈 최질의 난은 현종의 잘못이다

고려 현종은 고려 왕조가 성립되고 거의 100년이 지난 시기에 왕위에 올라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한 군주로 평가한다. 또한 고려거란전쟁을 겪으면서 고려를 수호하고 국난을 극복한 유능한 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는 법으로 고려의 현종이 총명하였다고는 하지만 국사를 행함에 있어 잘못된 판단을 내려 김훈과 최질의 난을 불러 오기도 했다.

김훈 최질의 난을 놓고서 일부는 무지막지한 무신들이 칼로 현종을 위협한 국정농단 사태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유가 없는 결과가 없다. 이 당시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상당한 원인 제공은 바로 현종에게 있었다.

고려 현종은 고려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군주로 평가가 된다. 그러나 고려거란전쟁 시기에 있어 야기된 김훈 최질의 난은 현종의 실책이 원인이었다. 무신의 녹봉인 영업전을 빼앗어 문신들에게 지급하도록 한 한심한 조치가 결국 김훈과 최질의 난을 불러왔다.

김훈과 최질의 난

고려 현종 재위기에 김훈, 최질 등의 고위급 무신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1014년 음력 11월부터 1015년 음력 3월까지 약 4개월 간 무신 김훈과 최질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김훈과 최질은 누구인가?

김훈과 최질은 고려거란전쟁에 있어서 나름대로 수훈을 세운 장수들이다. 김훈은 통주 전투에서 강조가 이끄는 30만 고려군이 거란군에게 대패하자 좌우기군장군을 맡아서 고려군 중군과 좌군의 전열을 수습하고 거란에 대응하는 큰 공을 세웠다. 최질은 고려군 우군의 전열을 통주성에서 지켜내는 큰 공을 세웠다. 이렇게 거란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전과를 인정받아서 김훈과 최질은 상장군의 자리에 오른다.

한편 이때 고려 조정에서는 문관은 무관을 겸 할 수 있지만 무관은 문관을 지내지 못하였는데 김훈과 최질은 이것이 못 마땅하였다. 그렇게 무신들의 불만이 팽배한 가운데 거란과의 전쟁 이후 나라가 궁핍해지면서 중추원의 일직원 황보유의가 중추원사 장연우와 함께 현종에게 건의하여 경군(京軍)의 영업전(永業田)을 거두어 백관의 녹봉(전시과)에 충당하게 하니 무관들은 분노가 폭발했다. 그러니까 무관의 월급으로 주었던 영업전을 빼앗어 문관에게 준 것이다. 여기서 무관들은 빡 돌아 버린다.

고려, 최초의 무신의 난

흔히 고려 시대 무신의 난을 의종 시대 정중부를 수장으로 이의방과 이고 등이 획책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실제로 고려 시대 최초의 무신의 난은 바로 김훈과 최질의 난이다.

음력 1014년 11월 1일에 상장군인 김훈과 최질이 여러 위(衛)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궁궐에 난입했다. 월급이었던 영업전도 빼앗긴 마당이었으니 무관들이 돌아버린 것이다. 무신들은 자신들의 월급이었던 영업전을 문신들에게 지급하도록 현종을 꼬신 중추원사 장연우와 일직 황보유의를 잡아서 채찍질하고 매질하여 반병신을 만들었다. 그리고 현종에게 김훈과 최질은 이들을 유배보낼 것을 건의하였다. 상황에 이 지경에 이르자 현종은 무신들의 횡포에 겁을 먹고 장연우와 황보유의를 제명하고 유배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왕을 겁박하여 권력을 장악한 김훈과 최질은 상황을 보니 자신들이 마음대로 국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음력 1014년 11월 3일에 김훈이 상참(常叅) 이상의 무관은 모두 문관을 겸하게 현종에게 요구했다. 현종은 또 쫄아서 이들의 요구도 들어줬다. 그리고 문신들의 중심이었던 어사대(御史臺)를 혁파하고 무신 중심의 금오대(金吾臺)를 설치하였다. 또한 삼사(三司)를 혁파하고 도정서(都正署)를 설치했다. 이제는 무신들이 나라를 좌지우지 하는 시대가 된 것 같았다.

음력 1014년 11월 8일에 개경 북쪽 여러 사찰의 승려들이 병사를 일으켜 개경에 쳐들어 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에 김훈과 최질은 혹시 자신들을 치러 오는 것이 아닌가 놀랐지만 이는 뜬소문이었다.

음력 1014년 12월 5일이 되자 김훈과 최질은 민심을 얻고자 모든 죄수들의 형량을 줄이거나 유배지를 조정하였다. 그러니까 민심을 얻으려고 나름대로 머리를 썼다. 그래서 개경 내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고, 7품 이상이면서 20년 이상 된 관료들은 관복을 달리 해 주는 등의 조치도취했다. 또한 태조의 공신 자손 중 벼슬 없는 자들을 등용하였고 역대 공신들의 관작을 추증하기도 했다. 한편 관료들의 전시(田柴)를 더 지급했다. 아울러 백성들의 조세(租稅)의 절반을 감하고, 체납된 조세도 감면해주었다. 그러니까 김훈과 최질은 정권을 잡고나서 백성들로부터 지지를 받는 일이 급하다는 것을 알았으니 머리가 그래도 돌아간 것은 인정해 줄만 하다.

집권하고 몇 달 만에 김훈과 최질은 엄청 바쁘게 국정의 로드맵을 다시 짜기는 했는데 세상의 일들이 어찌 마음 먹은대로 되겠는가?

김훈과 최질의 최후, 이자림의 등장

음력 1015년 2월이 될 무렵이다. 이때 화주에서 방어사를 역임하고 서경에서 장서기를 하며 사람들의 인심을 두루 얻은 이자림이란 인물이 있었다. 이자림은 몰래 중추원의 일직인 김맹(金猛)을 만나 “왕께서는 어찌 운몽지유(雲夢之遊)를 본받지 않으시는가” 라며 계책을 제안했다. 운몽지유는 한 고조 유방이 자신이 천하를 통일하고 제후왕들을 토사구팽(兎死狗烹) 할 때 써 먹은 수법이다. 유방이 초왕 한신을 사로잡은 계책이 바로 ‘운몽의 연회’이다.

김맹은 기가 막힌 이 계책을 현종에게 은밀히 알리자 현종이 이를 즉시 받아 들였다. 그리고 계획을 진행하기 위해서 현종은 이자림을 권서경유수판관(權西京留守判官) 직에 임명하고 그가 잘 알고 있는 서경으로 보낸다. 그리고 김훈과 최질을 잡아 죽이기 위한 계획을 착착 진행했다. 이자림도 역시 서경에서 이들을 잡아 죽일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

현종은 이자림의 계책대로 김훈과 최질 등 당시 권신들을 서경으로 데리고 연회를 열었다. 그리고 김훈과 최질에게 술을 엄청 먹였다. 그동안 쩔쩔 매는 왕의 모습을 봐 왔던 김훈과 최질은 아무 생각 없이 술만 퍼먹다 대취했다. 이때 이자림은 그들이 취하자 김훈과 최질의 일행 19명을 죽이고,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체포하고 귀양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김훈과 최질의 난은 한 바탕 겨울밤의 꿈으로 끝났다.

현종은 김훈과 최질의 난을 진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이자림을 아주 높이 평가했다. 훗날 이자림은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아서 아예 왕가도(王可道)라고 이름도 바꾼다. 그만큼 현종으로부터 총애를 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김훈과 최질의 난은 현종의 잘못이다

김훈과 최질이 난을 일으킨 것은 잘못이다. 그러나 더 큰 잘못은 바로 현종에게 있다. 자신이 왕의 신분으로 신하들에게 공평한 처사를 하고 현명한 판단을 하여야 하는데 무신을 냉대하고 문신을 우대한 것 자체가 실책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려 시대 왕들의 무신 냉대는 결국 훗날 의종때 무신의 난을 자초한다.

인간의 문제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먹고 사는 것으로부터 기인한다. 무신들이 칼을 들고 궁으로 난입한 근본 이유는 당시 중앙 군대인 경군의 영업전을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비롯한 문신들이 자기들의 전시과(녹봉)로 돌려버리는 몰상식한 짓을 하는데 현종이 승인한 것 때문이다. 따라서 거란의 침입 때 목숨을 바쳐가며 싸운 무신들은 월급으로 받았던 영업전마저 빼앗기는 뒤통수를 세게 맞은 셈이 되었고, 여기에 중앙 군대의 구성원들까지 모두 거지꼴이 되니 칼을 들고 나온 것이다.

KBS-TV 사극 드라마를 보면 ‘박진’이라는 가공의 인물이 마치 뒤에서 엄청난 모사를 해서 김훈과 최질의 난을 조장하는 것으로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다 가짜다. 박진이라는 인물은 역사책에도 나오지 않는 인물이다. 김훈과 최질이 일으킨 반란은 무신들이 제대로 대우를 받지 못했던 극한 상황에서 현종이 일을 잘못 판단해서 야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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