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인간에게 있어 태어남과 죽음이 있고, 탄생 이전에는 무엇이 있고 사후에는 또 무엇이 있는가? 삶과 죽음이 반복되는 윤회(輪廻)는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생과 사의 순환이 어디서 과연 멈추는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는데 과연 그는 어디로 돌아갔는가.
삼사라(Samsara) – 생사유전'(生死流轉), 윤회(輪廻)
윤회(輪廻)에 관해 ‘삼사라’는 영화 이야기를 꺼내 본다. 이 영화는 2004년 우리나라에서 개봉한 영화로 아주 오래 되었지만 불교의 내면을 다룬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삼사라 영화에서는 판 나린 숀 쿠(타쉬), 종려제(페마)가 주연을 맡았다. 이 영화를 보면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고뇌를 겪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과연 궁극적인 삶의 목표는 무엇일까 자문하게 된다.
삼사라 뜻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의 고뇌, ‘삼사라’는 ‘윤회’를 뜻한다. ‘삼사라’는 산스크리트어로 ‘생과 사의 순환’이라는 뜻이다. 또한 ‘다른 곳으로 옮겨진다’ 또는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윤회의 모든 과정을 뜻하는 ‘삼사라’는 모든 생명은 그것이 쌓은 카르마(업보)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상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한다. 따라서 ‘삼사라’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영원한 것이다.
영화 삼사라 줄거리
타쉬와 페마의 이야기를 통해 삼사라의 의미를 깨닫는다.
타쉬는 수행을 하고 사원으로 돌아 가는 길에 폐허가 된 사원을 지난다. 거기에서 돌 무더기에 쓰여진 문구가 눈에 들어 온다. 그 돌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무심코 보여지는 문구 한마디는 앞으로 전개될 영화 삼사라의 핵심적 내용을 미리 암시한다.
구도의 길을 가는 승려가 고된 수행을 마치고 어느 날 마을로 내려갔다. 그 승려(타쉬)는 그곳에서 인간의 욕망과 세속의 번뇌를 알게 된다. 마을로 내려 간 그는 구도승으로 그때까지 몰랐던 것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의문을 품고 속세의 여자인 페마와 결혼을 한다. 그리고 평범한 범인으로 아이도 낳고 사는 보통의 생활 속에서 살게 된다.
업연 속에 쌓인 남자와 여자, 타쉬는 5세라는 어린 나이에 불교에 귀의를 하였지만 속세로 돌아온 수도승이고, 페마는 그 수도승의 아내이다. 타쉬는 운명적 여인을 만나 아들(카르마)을 낳고 살게 된다. 그렇다면 타쉬의 고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타쉬는 수도승의 길을 포기하고 페마와 혼인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지만 마을 사람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겪는다. 그리고 인간적 욕망을 어찌 하지 못하고 또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갖는다. 그는 보통 사람으로 살면서 번뇌를 끝 없이 하고 인간사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살면서 그의 삶은 어느 하나도 타쉬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타쉬가 세속적 인간으로 살아가면 살아갈수록 더 큰 후회와 갈등만 그에게 주어졌다. 그러한 지친 일상의 삶에서 타쉬는 다시 세속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승려로 되돌아 가고자 하였으나 이 또한 쉽지 않은 길이라는 것을 된다.
이 삼사라는 영화를 통해 인간은 결국 고뇌와 번민에 시달리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번뇌를 벗어나는 것도 해답을 찾는 것도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속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타쉬는 파계승이라 단언할 수 있다. 속세에서 평범한 인간으로 사는 타쉬가 또 다른 생의 구도를 찾고자 하지만 과연 그 길은 어디에 있는가?
인간이 살면서 욕망과 업의 연속선상에서 얻는 고뇌와 해답은 과연 무엇인가? 생(生)이라는 수레바퀴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결국 자신의 욕망과 운명의 결과 즉 업(業)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원래 승려 타쉬가 수행 생활은 잘하였으나 결국은 욕망에 끌려 환속을 하고 다시 그 속에서 겪는 갈등이 결국은 타쉬의 업연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고고한 수행을 닦았던 그의 이름도 타쉬라는 인간이었고, 타락한 욕망의 소유자로 번민 속에 갈등하는 그의 이름도 타쉬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본질을 벗어나지 못하고 욕망의 굴레에 얽매여 어찌 할 줄 모르는 그는 지금 우리와 같은 평범한 이일 수 있다.
타쉬는 불경이나 외는 절간을 벗어나 세상으로 돌아가 만족하게 살 수 있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보이지 않는 고뇌로 또 고통을 벗어 나지 못하고 있었다. 타쉬가 동네에서 살면서 겪는 마을 주민들과의 갈등은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겪어야 필연적인 고민과 삶의 궤적이기도 하다. 그래서 어쩌면 자신 안의 내적인 갈등으로 방황하던 타쉬가 원래의 수도승으로 가고자 하는 것은 다시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순환적 궤도에 놓인 진정한 인간의 모습이기도 하다.
보통 사람보다 더 못하게 살아가던 타쉬에게 어느 날 도반이었던 친구 승려가 방문한다. 그는 스승의 임종이 가까웠다고 알려주면서 스승의 편지를 전달한다. 편지에는 다음의 글귀가 있었다.
난 삼사라를 향해 귀의하게 됐구나.
우린 다시 꼭 만날 것이다.
우리가 재회하는 그날…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 시키는 것과
한 가지 욕망을 정복하는 것 중
어떤 게 더 중요한 지를 알게 되겠지.
여기서 한 가지 욕망은 아마도 불교의 최고 목표인 열반을 의미하는데 이 편지를 읽고 타쉬는 깊은 상념에 빠진다. 자신이 수천 가지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살아왔지만 결국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타쉬는 아내와 아이가 잠든 사이에 집을 떠나다시 구도자의 길을 간다. 마치 부처님이 야소다라 왕비와 아들 라훌라를 남겨두고 새벽에 홀연히 떠나듯 말이다.
돌을 바다에 던져라
타쉬가 구도를 하기 위해 길을 걷다가 어느 무너진 오래된 사원 앞에 다다르자 놀랍게도 그곳에는 자신의 아내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내는 야소다라 왕비의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이 그 왕비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타쉬의 무책임한 행동을 꾸짖는다. 아내는 이렇게 말한다.
” 당신이 불도를 사랑한 열정이 내게 보여준 사랑만큼만 강했어도… 당신은 지금 이 현세에서… 부처가 됐을 거예요.”
이 말은 타쉬가 사랑에 대한 열정은 강했지만 정작 불도를 이루려는 열정은 강하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만일 타쉬가 불도를 이루려는 열정이 강했다면 크게 깨달아서 부처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했고 탐진치에 찌들어서 평범한 범부보다 못한 삷을 살았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자 타쉬는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아내에게 말하지만 그녀는 염주가 든 단지를 남편에게 주고 그냥 떠난다.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타쉬는 그 자리에서 절규를 한다. 그렇게 땅을 뒹굴며 절규하다 잠이 들었다가 깨어난 타쉬의 눈에 무언가가 보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3년간 명상을 마치고 난 후에 사원으로 가던 길에 보았던 바로 그 돌이었다.
그 돌에는 여전히 “어떻게 해야 한 방울의 물이 영원히 마르지 않을까?” 라고 적혀 있었다. 이제는 수도승도 아니고 속인도 아닌 어정쩡한 처지에서 그 돌의 문구를 바라보던 타쉬는 그 돌을 쥐어 들었다. 그러다가 그리고 돌을 돌리자 글씨가 쓰여 있었다.
“바다에 던지면 되느니…”
결국 ‘삼사라’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바다에 던지면 된다”는 해석을 어찌 해야 될지는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南無觀世音菩薩
열반(Nirvana)의 대척점에 있고 , 영겁의 재생과 윤회가 벌어지는 세계를 뜻하는 불교용어 ‘삼사라(Samsara)가 깨달음이 없는 일반 중생에게 던지는 화두는 무엇일까? 어쩌면 많은 중생들은 끊임없는 윤회를 하면서 이 세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미련한 존재이기도 하다. 윤회를 벗어나는 것이 바로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南無觀世音菩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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