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장량(張良), 멈출 때를 알고 성공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장량(張良)은 중국 전국시대, 초한쟁패기, 전한 시기에 있어 가장 뛰어난 전략가이자 정치가였다. 자는 자방(子房)이고 시호는 문성(文成)이다. 그는 세계사를 통틀어 훌륭한 참모의 대명사이며 당시 소하(蕭何)와 한신(韓信)과 함께 ‘건한삼걸’ 중 한 명이다.

사마천(司馬遷)은 장량(張良)에 대해 높은 평가를 내렸다. 장량은 아주 탁월한 식견을 지닌 ‘하늘이 내린 참모’라고 사마천은 평했으며 가장 이상적인 책략가로 그를 뽑았다. 장량은 전략적인 지혜를 발휘하여 위기에 빠진 유방을 구하고 한나라를 건국하고 천하를 통일하는 대업에 크게 기여한다. 이러한 연유로 유방 한고조는 장량을 두고 “군막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에서 벌어진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장자방이다”라는 극찬하였다.

이러한 평가만 보더라도 장량은 당시 상식이 아주 풍부한 사람이었으리라 사료된다.

장량은 전투에서 지더라도 전쟁에서 이기는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다.

장량(張良)은 중국 초한전쟁에 있어 가장 뛰어난 전략가였다. 자는 자방(子房)이다. 그는 가장 훌륭한 참모의 대명사이다.  ‘지지(知止: 멈출 때를 안다)’와 ‘성공불거(成功不居: 성공한 곳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라는 장량의 철학은 바로 위대한 상식이다.

장량, 천재적인 전략가이자 참모

장량, 그는 누구인가

장량은 출신 성분 자체가 조금 남 다르다. 유방이나 한신 등이 별 볼일 없는 흙수저 출신이었다면 장량은 한나라의 최고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니까 금수저 출신으로 보면 된다.

천하를 도모하는 유방에게는 장량이라는 걸출한 전략가가 있었다. 그는 초한전쟁에서 긴 안목을 가지고 적절한 전략을 세워서 유방을 대세로 이끌었다. 물론 항우에게도 범증이라는 뛰어난 전략가가 있었지만 항우는 끝내 그를 믿지 못해 내치고 말았다. 하지만 유방은 장량의 전략과 조언을 충실하게 이행하면서 위기도 벗어나고 초한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대업을 이루었다.

망한 나라의 금수저

장량의 조부 장개지(張開地)는 한나라의 세 명의 왕 밑에서 상국(相國)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張平)도 역시 상국을 지냈다. 상국이라는 벼슬은 오늘날 가히 총리급에 해당되는 벼슬이니 조부와 부친이 모두 상국을 지냈다는 것은 그의 집안이 대단한 가문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BC 230년에 진나라가 강성해지면서 장량의 조국은 무참하게 망했다. 장량의 아버지나 할아버지도 고관대작이었던만큼 나라가 망하지 않았다면 장량도 태평성대의 세월을 맞아 그 역시 상국의 벼슬을 했을텐데 그에게는 그러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당시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장량은 벼슬을 할 나이도 아니었다. 당시 장량의 집에서 일하는 가노(家奴)만 300명이 넘었다고 하니 어마어마한 권세를 누리는 집안이 나라가 망하면서 같이 망한 것이다.

진시황 시해 계획 실패와 도망

장량은 자신의 조국이 망하자 복수를 결심한다. 그는 자신의 전재산을 모두 팔아 조국을 망하게 한 시황제를 복수할 자금을 마련했다. 복수를 할 수 있는 동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난 장량은 창해공(滄海君)이라는 자를 알게 된다. 창해공으로 하여금 기원전 218년경에 박랑사(현재의 허난성 부근)를 지나는 시황제의 행차를 노리게 했다. 무게가 120근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시황제가 탄 수레를 부수어 그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수레에 타격이 가해지면서 암살은 실패하고 장량 등은 도망쳐야 했다.

장량은 하비(下邳)로 달아나 숨어 지냈는데 어느 날 장량이 다리 위를 산책하다가 한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은 장량을 몇 번 시험해 본 후 그에게 책 한 권을 건네 주었다. “이 책을 읽으면 제왕의 스승이 될 수 있고, 10년 후에 그 뜻을 이룰 것이다. 13년 뒤에는 제수(濟水) 북쪽에서 나를 만날 수 있는데, 곡성산(穀城山) 아래의 누런 돌이 바로 나일 것이다” 하며 떠났다고 한다. 노인이 준 것은 『태공병법』이라는 책이었는데, 장량은 이 책을 기이하게 여겨 항상 익히고 소리 내어 읽었다고 한다.

한편 하비에서 장량이 만났던 인물 가운데는 항백도 있었다. 항백은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었던 항연의 아들이자, 훗날의 서초패왕 항우의 숙부이다. 이때 항백은 살인죄를 저질러 위기에 처해있었는데, 장량이 항백을 숨겨주면서 둘은 이때 친분을 갖는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친분으로 인하여 실제 큰 득을 본 사람은 유방이라는 인물이다.

유방과 운명적 만남

누가 말했던가?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말이다. 바로 장량이 유방을 만난 것이 그러한 운명의 시작이다.

장량은 진가를 찾아가던 중에 유방과 우연하게 만나게 된다. 이때 유방은 옹치의 배반으로 근거지를 잃고 곳곳을 헤매다니는 유랑의 신세였다. 그러니까 유방은 당시로서는 그냥 전전하고 다녔다. 장량을 만날 당시 유방은 하비의 서쪽 지역을 공격하고 있었는데, 유방은 장량에게 처음에는 말을 관리하는 자리인 구장(廐將) 직위를 주고 부하로 삼게 된다.

유방은 장량에게 신기하게 마음이 쏠렸다. 장량에 비교해 보면 유방이 살아온 인생이 너무 달랐지만 의외로 코드가 잘 맞았다. 장량은 유방을 자주 찾아가서 자신이 알고 있는 태공병법에 대해 설명하곤 했다. 유방은 장량이 알려주는 병법을 듣고 열심히 들으면서 태공병법을 실전에서 다양하게 활용했다고 한다. 사실 놀기만 좋아하고 주색잡기가 특기였던 유방에게 있어 장량은 자신이 몰랐던 것을 알게 해준 것이다.

장량은 태공병법을 다른 사람에게도 설명을 해줬지만 보통 관심이 없거나 잘 이해하지 못해서 아쉬워했다. 그러던 차에 자신의 병법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으니 장량으로서는 기분 좋은 일이었다. 장량도 유방의 그러한 진지한 태도에 신이 나니 둘은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유방은 병법을 배운 적이 없었다. 사실 천하를 자신이 잡고 싶어도 어찌보면 무식한 놈은 유방이요 유식한 사람이 장량이다. 유방은 난생 처음 들어보는 병법을 접하자 흥미가 무럭무럭 솟아났다. 유방은 배운 게 없어 일반적인 전투법이라는 것도 잘 몰랐다. 그러다가 장량이 설명하는 태공병법을 익히자 너무나 기뻤던 것이다. 장량도 자신의 병법을 알아주고 지지해주는 사람을 만나 기쁘니 패공(沛公)은 필시 하늘이 낸 사람일 것이라고 여기고 그냥 유방의 휘하에 머물기로 결정한다. 이것이 장량과 유방이 서로 함께 하는 운명이 되었다.

장량의 지혜로 유방을 살리다

건달에서 유덕한 인물로 유방을 만들다

건달이자 동네 조폭이었던 유방은 진나라 제국의 수도였던 함양의 궁궐에 들어서게 되자 그냥 눈이 헷가닥 돌아버린다. 어마어마하고 찬란한 궁궐에 머물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짓을 다 해보려던 유방에게 번쾌(樊噲)가 나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 했다. 그러나 돌아버린 유방은 번쾌의 말은 무시하고 즐기고 향락을 즐기려고 했다.

이렇게 유방이 정신이 반 쯤 나갔을 때 장량이 나섰다.

“진나라가 포학무도 해서 패공께서 이곳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무릇 천하사람들을 위해 진나라의 남은 포악한 잔적들을 제거하려면 마땅히 청렴하고 검소한 것을 그 본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막 진나라 도성에 입성하자마자 그 즐거움만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사람들이 말하는 ‘걸(桀)을 도와 학정을 펼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충언은 귀에 거슬리지만 어떤 일을 행하는 데는 이롭고, 성분이 독한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다고 했습니다. 원컨대 패공께서는 번쾌의 간언을 받아들여야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장량은 유방에게 강한 조언을 던졌다.

그러자 번쾌가 말할 때는 대꾸도 안 하던 유방은 장량이 이렇게 간언을 하자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졌다. 그래서 유방은 아쉽지만 보물과 계집들을 놔둔 채 그대로 함양에서 나와 주변에 주둔하였다. 그러자 함양 백성들은 유방의 군대가 와서 약탈을 할까 걱정했는데 아무런 일도 없자 모두 안심했다. 또한 유방은 여기에 여러 현의 사람들을 불러 위로하자 크게 인심이 동하면서 “패공이 진나라 왕이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 하고 거꾸로 걱정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니까 장량의 말로 인하여 유방은 큰 덕을 지닌 인물로 백성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된다. 인기짱의 비결은 알고 보면 장량의 간언 때문이다. 유방은 자신이 점령한 지역에서 한 판 세게 놀고 싶었던 것이 실제 속마음이었다.

홍문연에서 유방을 살리다

유방의 해피한 날도 잠시였다. 거록에서 진나라군을 학살시킨 항우가 성난듯 달려 오고 있었다. 이때 유방은 누군가의 말을 듣고 항우가 못 오게 함곡관을 막았는데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항우의 화만 돋군 셈이 되었다. 항우는 무려 40만의 병력을 이끌고 다가오고 있었다.

사실 이때 유방은 항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이때 기막힌 우연이 발생한다. 항우가 유방을 공격하기 직전에 과거 장량에게 도움을 받았던 항백은 유방이 문제가 아니라 장량까지 해를 입을까 걱정했다. 항백은 장량에게 은혜를 입은 일도 있고 해서 밤중에 몰래 장량을 찾아가서 조언을 줬다.

장량은 지금 일어나는 긴급한 상황에 대해 유방에게 이 모든 일을 말해주었다. 항우가 지금 여기 쳐들어오는 상황에 대해 이야기를 듣자 유방은 떨기만 했다. 장량은 화가 나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함곡관을 막았습니까?” 따지니 유방은 무안해져서 “생각없는 간신배한테 내가 속아서…”라고 변명했다.

장량은 “그럼 항우를 이길 자신이 있었단 말입니까?” 라고 꾸짖었다.

유방은 쪼다같이 아무런 말도 못하다가 “나는 결코 항우와 대적할 수 없소. 이제 어찌 하면 좋겠소?” 라고 장량에게 대책을 알려달라고 매달렸다. 이러한 유방를 구하고자 장량은 계획을 세웠고, 항백을 데려와 유방과 만나게 한 뒤 둘의 자식 간에 혼인의 약속을 맺게 하였다. 이후 크게 유방으로부터 대접 받고 나서 항우의 진영으로 돌아온 항백은 유방을 변호해준다.

항백은 항우를 설득시켰다. “패공(유방)은 결코 자네에게 거역할 뜻은 없었다네. 지금은 세상이 어지럽고 곳곳에 비적들이 날뛰고 있으니, 안전하게 관문을 막아 백성들을 안심시키려고 했던 것일세.” 그 말을 옳다고 여긴 항우는 유방에 대한 화를 풀고 싸울 생각을 그만두었다. 유방은 다음 날 백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항우를 찾아와 사죄하였고, 여기에는 장량도 같이 따라왔다.

그러나 이렇게 상황이 돌아가는 가운데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은 예리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범증은 지금이 바로 유방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연회가 벌어질 때 범증은 수 차례 항우에게 사인을 주며 유방을 죽이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항우가 계속해서 모른 체하자, 범증은 슬쩍 밖으로 나가 항장(項莊)에게, ‘검무를 추는 척 하면서 유방을 찌르라’는 명령을 전했다. 항장이 칼춤을 추며 유방에게 접근하자, 사태가 돌아가는 것을 눈치챈 항백은 유방을 지켜주고자 “검무는 둘이서 어울려 추는 것이 더 멋지지 않겠소?” 라고 일어선 다음 직접 검무를 추며 항장에게 맞섰다. 장량이 이러한 상황을 번쾌에게 알리자 그도 난입하면서 유방을 암살하려는 범증의 계획은 흐지부지되었고, 덕분에 유방은 살아났다.

공성신퇴(功成身退)

한고조 5년(기원전 202년) 2월, 유방은 드디어 정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하지만 건국 초기라 도읍을 어디로 정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유방의 심복과 대신들은 대부분 산동(山東) 출신이기 때문에 모두 낙양(洛陽)을 수도로 정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누경은 관중의 지세가 갖는 중요성을 역설하며 관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장량이 누경의 주장에 동의하며 험준한 삼면의 지형으로 방비에 유리한 데다가 기름진 땅이 천 리에 달하고, 물길로 군대와 물자 수송이 유리하니 천혜의 요새인 관중을 수도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장량의 설명을 들은 유방은 즉시 수레를 타고 서쪽을 향해 나아가 관중에 도읍하였다.

한고조 6년 정월에 유방은 건국 공신들에게 봉지(封地)를 나누어 주었다. 장량은 체질이 유약한 사람이라 독자적으로 군대를 통솔한 적은 없었지만 초한전쟁에서 그가 세운 큰 공이 인정되었다. 그래서 유방은 “장막 안에서 계책을 세워 천 리 밖에서 승리를 결정지었으니, 이것은 모두 자방의 공로다. 스스로 제나라 땅에서 3만 호(戶)를 고르라”고 하였다. 한나라 초기 신하들의 식읍(食邑)은 조참에게 내려준 1만 630호가 가장 컸으니 거의 세 배에 달하는 정말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엄청나게 파격적인 대우였다. 그러나 장량은 이를 정중하게 거절한다. 그러자 유방은 그를 유후(留侯)로 책봉하고, 소하(蕭何)와 함께 1만 호의 봉지(封地)를 받게 했다.

장량은 후에 병치레가 자주 있다는 핑계를 대고 궁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 두문불출하며 지냈다. 이때 그는 늘 입버릇처럼 “세속의 일일랑 버리고 적송자(赤松子)를 따라 노닐고자 바랄 뿐이다” 하면서 오곡을 끊는 벽곡(僻谷)과 도인법(導引法)으로 몸을 가볍게 하였다. 마침 한고조가 승하하고 태자가 뒤를 잇자 여후가 장량의 은덕에 감격해 하며 그의 건강을 염려하여 억지로 음식을 먹게 했다. 이에 장량은 거절하지 못하고 다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그 후 8년 뒤 장량도 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문성후(文成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장량의 처세에서 배우다

장량은 자신이 큰 공을 이루었지만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남으로써 자신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의 사당에 남아 있는 ‘지지(知止: 멈출 때를 안다)’와 ‘성공불거(成功不居: 성공한 곳에는 머무르지 않는다)’ 같은 글자는 장량의 그러한 철학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자세가 삶에 있어서 정말 중요한데 실제로 이렇게 보통 사람이 살기는 어렵다. 먹으면 먹을 수록 양양이라고 더 높은 자리에 가려하고 더 많은 차지하려는 것이 미련한 중생들이다. 반면 장량은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살아가고자 했다니, 정말 지금 견주어봐도 대단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장량은 이렇게 말 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한나라의 재상을 지냈고, 이윽고 진나라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하자, 만금의 재산을 아까워하지 않고 한나라를 위해 강포한 진나라에 원수를 갚으려고 하다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오늘 이 세 치 혀로 황제의 스승이 되고 만호의 봉읍을 받았으며, 그 지위는 열후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포의로 시작한 사람으로는 지극히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이라 나는 이것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이제는 인간 세상의 일을 모두 잊어버리고 적송자(赤松子)의 뒤를 따라가 노닐고자 한다.”

세상의 주인이 바뀌고 나라가 세워지는 과정에서 장량과 같이 토사구팽을 당하지 않고 자신의 발자취를 고스란히 역사에 남긴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한때는 유방을 위해 일 했던 한신과 팽월은 죽임을 당했고 경포도 반역을 일으켰다가 결국에 유방에게 진압을 당해 죽었다. 이들과 달리 장량은 자신이 어디에서 서야 하는 줄을 알았고 성공한 후에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항상 과업에 충실했지만 더 큰 욕심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천수(天壽)를 다할 수 있었다.

항룡유회(亢龍有悔), 하늘 끝까지 올라가 내려올 줄 모르는 용은 후회할 때가 있다는 뜻을 장량은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같다. 이 말은 오를 만큼 올라갔으면 분수를 지켜 만족할 줄 알고, 겸손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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