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방(劉邦)은 중국의 통일왕조인 한나라를 건국한 창업군주이자 초대 황제이다. 중국 역사에 있어 진 시황제, 이세황제와 초 의제에 이어 네 번째로 황제라는 칭호를 공식적으로 쓴 인물로, 그의 휘는 방(邦)이다. 우리는 그를 보통 유방(劉邦)이라고 부른다.
평민 출신으로 최초로 황제로 올랐다니 어찌보면 그 당시로서도 매우 획기적인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기존의 지배층이었던 제후나 귀족 출신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지렁이 같은 피지배층에서 황제라는 지존의 자리를 차지한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흙수저가 금수저 보다 훨씬 좋은 다이아몬드수저가 된 사람이 바로 유방이다.
큰바람 일어나자 구름이 흩날리누나.
온 세상에 위세 떨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나니,
어떻게 하면 용맹한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는지.
대풍가(大風歌)
유방은 진(秦)나라 말기에 대혼란이 일자 자체적으로 세력을 일으겼다. 그리고 초한대전에서 당시에 영웅이었던 항우(項羽)를 꺽고 천하를 얻었다. 중국 전 역사를 통틀어서 이와 같이 평민이 패업을 이루고 황조를 연 사례는 거의 없다. 유방 이후에 평민이 황제가 된 사람은 딱 한 사람인 주원장이라는 인물이 명나라를 건국했는데, 아마도 이러한 일은 중국사에도 거의 없었던 것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은 한낱 평민이었던 유방이 어떻게 잘난 항우를 상대로 승리한 것일까? 많은 궁금증을 갖고 있다. 그래서 <상식은 권력이다> 에서 유방에 대해 인물탐구를 해본다.
유방, 그는 어떻게 성공했는가
한고조 유방은 기원전 256년 혹은 247년에 중국 패현(沛縣) 풍읍(豊邑)지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유방이 성공하고 나니까 지어진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유방의 어머니는 신기한 태몽을 꾸고 그를 낳았다. 꿈에 뇌성벽력이 치고 하늘이 시커멓게 변했는데, 근처에 있던 태공이 그 모습을 보자 유온의 배 위쪽에 교룡(蛟龍)이 떠있었고, 유온의 몸에 태기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그 사람이 유방이라 한다. 아무튼 아주 오래전 옛날 이야기니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유방은 태어날 때부터 비범함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유방의 외모와 언변
유방은 일단 그 당시에 꽤 잘난 얼굴로 추정된다. 유방은 콧날이 높고 이마가 넓어 용의 얼굴을 닮았다고 전한다. 또한 수염이 아주 그럴 듯해서 멋있었다고 한다. 용의 얼굴을 닮았다는 것이 유방의 어머니 태몽에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인기가 동네에서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동네 깡패치고는 외모나 풍채가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은 동네에서 꼬붕들을 데리고 술집에서도 잘 놀았던 에이스였기에 장가가고도 여자들 상대로 썸을 잘 탔던 걸로 보인다. 따라서 얼굴도 잘나고 언변이 상당히 좋았던 것으로 보인다. 유방은 정장(亭長)의 벼슬을 하고 나서부터는 자기 밑의 부하를 설(薛, 산동선 등현) 땅으로 보내 죽피관(竹皮冠, 대나무 껍질로 만든 관)을 만들어 오라 했다. 그리고 어디로 외출할 때는 무조건 이를 쓰고 다녔는데, 허세를 위한 용도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특이한 것은 유방이 나중에 황제가 되고 나서도 이 죽피관은 계속 착용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래서 유방의 초상화를 보면 넒은 이마와 콧날, 죽피관이 강조된다.
유방의 젊은 시절
유방은 사실 한미한 집안의 평민으로 보잘 것 없는 청춘을 보내고 있었다. 유방은 젊은 시절에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백수 건달이었다. 그러니까 말이 백수 건달이지 사실 알고보면 지금의 동네 조폭이나 양아치 같았다고 보면 된다. 유방은 농사를 짓거나 일을 하지도 않으면서 틈만 나면 술판이나 갖는 난봉꾼이었다.
유방은 동네 양아치 같은 친구들을 모아서 건달 놀이나 하고 툭하면 싸우거나 똥폼만 잡고 다녔다. 그래서 동네에서는 사고뭉치로 소문이 나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방이 갖고 있는 특유한 인간적 매력으로 인하여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그를 미워하기보다는 오히려 따르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심지어 여공이라는 인물은 유방을 보자 그가 아주 남다르게 특별한 관상을 지녔다고 하면서 그 자리에서 딸을 주어 결혼을 시켰다. 훗날 그녀가 바로 중국 역사상 ‘3대 악녀’의 수좌(首座)에 올라 있는 ‘여치’이다.
유방의 첫 직업
유방이 한 평생을 백수로 지낼 것 같았는데 뜻하지 않게 진시황 능을 건설하는데 있어 인부들을 관리하는 ‘정장’이라는 시덥지 않은 벼슬을 맡았다. 말이 벼슬이지 이것은 사실 동네 잡부들을 관리하고 인솔하는 역할이었다. 이것이 유방의 첫 직업이었다.
그러나 진황능을 만드는데 동원되는 인부들은 그곳 건설현장에 끌려 갔다가는 죽을 것 같으니 하나 둘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인솔 책임을 맡았던 유방은 졸지에 자신도 책임이 있기에 죽음을 면치 못할 것 같은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유방은 진시황 능 건설에 인부들을 데리고 가다가 기왕에 이렇게 된 것 남은 사람들에게도 도망을 권하고 자신도 도망을 쳐 버렸다. 이 대목만 보면 유방이 처세에 아주 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대세를 따르는 것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도망을 치다가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유방을 따르기를 원했다. 이렇게 유방의 유랑자 도망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9년에 진승과 오광의 난이 발생하자 각지의 백성들이 진나라의 관리를 죽인 후 반란을 일으키는 일이 생겼다. 이때 생명의 위협을 느낀 태현의 현령은 마을에서 그래도 유명했던 유방을 불러들여 함께 자신도 진나라의 반기를 들려 했다. 그러나 막상 현령의 요청을 받은 유방이 부하들을 이끌고 우르르 현으로 몰려오자 여기에 공포심을 가진 현령은 성문을 닫고 유방을 외면했다.
현령은 양아치가 개떼 같이 몰려온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유방이 왔어도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유방은 현령이 죽어야 마을이 무사하다는 편지를 담은 화살을 성안으로 쏘아 보냈다. 이러한 유방의 편지를 본 동네 백성들은 현령을 때려 죽이고 성문을 열어 주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면서 자연스럽게 유방은 현을 차지하고 다스리게 되었다. 뭐 특별하게 힘을 쓴 것도 아니고 어찌하다 보니 유방이 동네를 차지한 꼴이다. 이런 것이 바로 운이라는 것이다.
유방의 거병과 관중 차지
얼마 후 다른 제후들도 진나라를 정벌하기 위한 군사를 일으켰는데 마침 항우의 숙부 항이 초나라를 부활시켰다는 소식을 듣고 유방은 항량의 군에 가담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후 항량이 진나라의 명장 장한에게 패배하면서 목숨을 잃게 되는 참사가 발생했고 기세가 오른 장한은 조나라로 진군한다. 그러나 조나라가 망하면 장한의 다음 목표는 초나라가 될 것이 뻔했기에 초나라는 조나라를 구할 지원군을 파견하면서 동시에 진나라 영토에 대한 공격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때 초회왕(楚懷王)은 “관중에 먼저 입성하는 사람이 관중의 왕이 될 것이다.” 라고 공언했다. 그러나 항우는 장한 같은 일개 장수를 잡기보다는 진나라 자체를 멸망시키는 것이 항량의 복수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유방과 함께 관중으로 가길 원했지만 회왕의 주변에 있는 신하들은 잔혹한 성격을 가진 항우보다는 평소 백성들에게 관대했던 유방이 관중으로 가기를 바랬다. 그래서 서쪽으로 나아가던 유방은 툭하면 학살을 일삼는 항우와 달리 백성들에게 늘 관대한 모습으로 보여졌다. 따라서 유방은 가는 곳마다 각 지역의 성주들로부터 항복을 쉽게 받았다. 드디어 진나라에 수도로 가는 마지막 길목 중 하나인 무관을 점령하고 남전의 진나라의 대구까지 격파한 유방이 회상이라는 지역까지 도달하자 당시 진나라의 왕이었던 자영은 유방에게 항복을 청했다.
유방도 자영의 항복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의 목숨을 살려주었다. 그리고 유방은 원래 성격대로 진나라의 보물과 미녀들을 자신이 다 차지하는 흥청망청 놀려고 했지만 부하들이 그러지말라고 조언을 했다. 번개와 장량이 유방을 설득하자 그는 그곳을 점령한 병사들에게 진나라의 보물에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절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렇게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내세워 백성들의 민심을 끌어들이는 데 주력하니까 백성들은 유방에 대해 더 환장했다. 일반 백성들이 볼 때는 점령군인 줄 알았는데 자비롭게 자신들을 살펴주니 얼마나 유방을 고맙게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알고 보면 이것이 유방의 생각이 아니라 유방의 부하들이 그렇게 조언을 해서 된 것이다.
유방은 엄격하기 짝이 없었던 진나라의 법을 폐지해 버린 채 남을 죽인 자는 목숨을 잃고 남을 다치게 한 자는 처벌하고 물건을 훔친 자는 감옥에 가둔다는 세 가지의 간단한 법만을 공표했다. 이러한 유방의 행동은 훗날 그가 천하를 통일하게 만드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하지만 유방보다 늦게 도착한 항우는 유방이 관중의 왕이 되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성질이 급하고 포악한 항우는 유방이 관중을 선점했다는 것에 성질이 나서 그를 죽여버리려는 마음도 먹는다. 유방은 졸지에 관중을 먼저 먹었다가 항우에게 죽임을 당할 처지에 이른다. 이에 깜짝 놀란 유방은 항우의 숙부인 항백에게 사정을 했다. 유방 자신은 결코 항우에게 대적할 마음이 없으며 항우가 가져야 할 진나라의 보물들을 도적들이 훔쳐갈까 봐 자신이 잠시 지키고 있었을 뿐이라며 사죄한 끝에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된다.
사실 알고보면 만일 이때 항우가 유방을 죽였다면 역사는 아주 달라졌을 것이다.
파촉왕에 봉하다
아무튼 이후 천하의 지배자가 된 항우는 각지의 왕을 정했다. 그리고 위협적으로 느꼈던 유방은 중국의 왼쪽 구석에 있는 ‘파촉’이라는 오지의 왕으로 임명해 버렸다. 그리고 파촉에서 관중으로 나오는 길목에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장안과 그 부하들을 배치시켜 유방이 늙어 죽을 때까지 파촉에서 나오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파촉에 있던 유방에게는 항우의 밑에 있던 한신이 있었다.
유방은 소하의 추천을 받아 한신을 대원수로 임명한 후 촉에 들어간지 겨우 4개월 만에 다시 관중으로 진격했다. 그리고 자신들의 앞길을 막고 있던 장한과 그 부하들을 한신의 번뜩이는 계책을 이용해 모두 물리쳐 버렸다. 그리고 유방은 다시 관중 지역으로 진출하면서 각 지역의 제후들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유방의 세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커져 갔다. 한편 기원전 205년 항우가 제나라에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러 간 사이 유방은 자신을 따르는 제후들을 불러모은 후 56만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군을 이끌고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을 점령한다.
유방, 항우의 본진을 털다
평소 유방을 별 볼일 없는 인물로 깔보았는데 그가 자신의 본거지를 털었다는 소식에 항우는 극도로 돌아버린다.
항우는 유방을 쳐부수겠다면서 급하게 3만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팽성을 되찾기 위해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진군했다. 그러나 항우의 3만 병력은 유방의 많은 병사들과 비교하면 전력의 차이가 무려 19배 정도로 적었다. 따라서 유방을 비롯한 연합군은 당연히 병사 수가 많은 자신들이 무조건 이길 거라 믿으며 항우 군에 맞섰지만 결과는 대참패였다.
이미 전투력이 막강한 초나라 정예병들은 유방의 연합군들을 개박살냈다. 유방의 연합군은 사실 숫자만 많을 뿐 제대로 군사훈련도 받지 못한 오합지졸의 엉성한 군대였다. 항우가 이끄는 군대가 파죽지세로 쳐들어오자 유방의 군대는 곳곳에서 전멸하고 나중에는 병사들이 공포에 질려 싸울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도망쳤다.
결국 팽성의 동쪽인 곡수 사수에서 유방의 10만여 명의 병사들이 떼죽음을 당했고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도 무참하게 살해되고 10만 명은 물귀신이 되었다. 그러니까 항우가 이끄는 군대 3만명과 유방의 군대는 질적으로 달랐던 것이다. 항우의 군대가 특전사나 공수부대였다면 항우의 군대는 그냥 민방위군 같이 허접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깨지는 것은 당연했다.
유방의 더러운 인간성
유방의 연합군이 개박살 나는 사태에 이르자 그는 무조건 살기 위해 도망쳤다. 유방은 살기 위해 마차를 타고 정신없이 도망치던 와중에 자신의 아들들과 딸을 발견하고는 마차에 애들을 태웠다. 그런데 초나라의 추격꾼이 뒤에서 보이기 시작하자 초조해진 유방은 마차의 속도를 빠르게 하려고 자기 아이들을 마차 밖으로 던져버리는 짓을 저질렀다.
유방은 내가 지금 잡혀서 죽을 지경이니 자식이고 뭐고 다 필요없다. 마차가 무거워서 속도를 못 내서 빨리 도망치기 힘드니 자기 자식을 밖으로 버린 것이다.
유방이 자식들을 도망치는 마차에서 내던지자 같이 가던 하후영(夏候榮)이라는 장수가 깜짝 놀라며 아이들을 다시 태운 뒤 출발했다. 이후에도 도망치는 중에 유방은 수시로 또 아이를 마차 밖으로 던지면 하후영이 또 아이들을 다시 마차에 태우는 일이 세 번이나 반복되었다. 여기에 빡친 하우영은 유방에게 화를 냈다. 그러나 오히려 유방은 하후영을 찔러 죽이려 했다. 그러니까 인간성이 여기서 드러난다. 사람은 위기에 처하면 그의 본모습을 알 수 있는데 유방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자신의 자식이든 부하이든 다 죽이고 나만 살자는 것이 엿 보인다.
화가 난 하후영은 하찮은 짐승도 자신의 새끼가 귀한 줄은 아는 법인데 “폐하께선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라며 유방을 꾸짖었다. 아버지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아니면 하후영에게 겁을 먹은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후로 유방은 더 이상 자식들을 던지지 않았다. 그렇게 황당한 도망을 하면서 간신히 유방은 항우 군의 추격을 피하는데 성공한다.
간신히 살아 남은 유방, 시간을 벌다
이렇게 튄 유방은 이후 한신을 하북 지역으로 보내 그곳을 평정하게 하고 자신은 형양에 남아 항우를 상대하며 한신에게 시간을 벌어 주려 했다. 유방은 사실 자신이 항우에 상대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항우와 정면승부를 피하고 버텨보려 했지만 결국에는 성이 초나라 군에 의해 함락되기 직전인 상황까지 간다. 그런데 이때 항우의 부하였다가 유방에게 항복한 진평이 아는 책사가 항우와 범증과의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책을 성공시킨다. 결국 범증이 유방의 책략에 의해 제거되면서 사태가 반전된다. 이후 유방은 부하들의 희생으로 간신히 항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관중으로 다시 돌아간 유방은 다시 병력을 모아 다시 항우와 맞붙는 시간을 벌었다.
한편 유방의 군대는 초나라의 후방을 교란하며 항우 군에게 가는 보급을 끊고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이 먹을 식량이 부족해진 항우는 당시 인질로 잡고 있던 유방의 아버지를 끌고 나와 유방에게 항복할 것을 강권했다. 만일 유방이 항복하지 않으면 아버지를 커다란 솥에 삶아서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유방은 태연한 모습을 보였다. 자신의 아버지를 삶아 죽이면 나에게도 그 국물을 한 사발 나눠 달라고 맞받아 쳤다. 이렇게 항우가 인질극을 벌여도 통하지 않자 초조해진 항우는 유방에게 일대일로 싸워 승자를 가리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항우와 일대일로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유방은 말로 항우를 약 올렸다.
유방은 지난날 항우가 관중으로 먼저 입성하는 사람이 왕이 되기로 했던 약속을 깨버린 점을 질책했다. 또한 수 많은 사람들을 학살한 점 등 항우의 잘못이 크다는 것을 일일이 얘기하며 그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유방은 항우에게 10가지 죄가 있다고 떠 벌렸다.
첫째, 너는 懷王(회왕)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스스로 關中王(관중왕) 자리에 올라 나를 巴蜀(파촉)으로 쫒았으니 그 죄가 하나요.
둘째, 너는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찾아온 卿子軍(경자군)의 宋義(송의) 장군을 죽였으니 그 죄가 둘이요.
셋째, 너는 趙나라를 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그 사실을 보고도 하지 않았으니 그 죄가 셋이요,
넷째, 秦나라의 대궐을 불태우고, 始皇帝(시황제)의 무덤을 파헤쳐 수많은 財物(재물)을 네 마음 대로 훔쳤으니 그 죄가 넷이요,
다섯째, 秦나라 二世 皇齊의 아들 子瓔(자영)을 이유 없이 죽였으니 그 죄가 다섯이요,
여섯째, 秦나라의 罪없는 군사들을 20여만 명이나 생매장시켜 버렸으니 그 罪가 여섯이요,
일곱째, 점령지의 관리들을 積弊(적폐)로 몰아 쫒아내고, 네 심복들을 그 자리에 앉혔으니 그 죄가 일곱이요,
여덟째, 義帝(의제)를 쫒아내고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으니 그 죄가 여덟이요,
아홉째, 義帝를 弑害(시해)하여 시체를 강물에 버렸으니 그 죄가 아홉이요,
열번째, 이왕 왕위에 올랐으면 善政(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잘 살도록 해야 하거늘, 사람 잡는 부역은 물론 네 측근들의 각종 비위로 백성들의 怨聲(원성)이 하늘까지 닿았으니 그 罪가 열이로다.”
이러한 유방의 말에 열 받은 항우는 숨겨뒀던 쇠뇌를 꺼내 유방을 쏴버렸다. 이렇게 말로 항우를 약 올리다가 항우가 쏜 화살에 화살을 맞은 유방은 큰 부상을 입었다.
유방, 전세를 역전시키다
일단 화살을 맞은 유방은 뒤로 물러나고 항우는 군사들을 이끌고 나간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하는 막강한 모습이 보여졌다. 그러나 항우에게는 대세를 보는 눈이 너무나도 부족하고 감정적으로 행동하면서 점점 사태가 꼬이기 시작하였다.
항우는 옆에서 항상 전략을 그려주던 책사 범증을 스스로 내친 후부터는 싸움을 한번 져본 적도 없는데 이상하게 전세가 불리해지는 괴이한 상황에 처했다. 또한 팽월이 계속해서 초나라의 후방을 들쑤시고 다니는 와중에 한신은 드디어 하북 지역을 모두 평정하였다. 이렇게 되면서 유방과 항우간의 싸움은 상황이 완전히 뒤집어졌다.
유방의 천하통일, 황제에 오르다
결국 기원전 202년 마침내 항우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유방이 천하를 통일하였다. 이렇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유방은 어느 날 신하들과의 연회 자리에서 자신이 항우를 이기고 천하를 차지하게 된 이유를 말해보라고 건들거렸다. 그러니까 내가 이제 황제에 올랐는데, 너네들이 그런 연유를 아느냐는 아주 오만한 질문이다. 이때 신하들은 항우는 오만하고 사람을 무시하였기에 그렇게 망했다고 하였다.
유방은 어떻게 성공했는가
그러자 유방은 고개를 저으며 “항우는 뛰어난 계책을 가진 책사인 범증 한 사람조차 제대로 쓰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비록 항우에 비해 나은 점은 없지만 뛰어난 계책을 짜내는 책사들을 잘 썼다”고 자랑했다. 자신은 장량, 소하, 한신 등과 같은 인물들을 적절히 썼기 때문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는 말을 남겼다. 이에 신하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신은 장기판의 말들을 잘 써서 공략에 성공했다는 아주 간단한 말을 어렵게 한 것이다.
유방은 일단 머리가 당시의 사람들보다 영악하고 좋았던 것이 분명하다. 유방은 스스로의 장단점을 파악하고 상대편을 내편으로 만드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인재를 씀에 있어서 빈부귀천, 출신 등을 따지지 않고 자신에게 필요한 재능을 갖춘 사람을 모두 중용했다. 그러니까 탁월한 용인술을 유방은 알고 있었다. 진나라 이전 6국 시대의 한(韓)나라 재상 장량(張良),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의 출신이자 항우의 부하였던 한신(韓信), 개고기 장사꾼이었던 번쾌(樊噲) 등 유방은그들을 자신이 천하를 도모하는 일에 있어 사냥개로 잘 썼던 것이다. 유방은 자신이 어려울 때 그리고 도움을 받고자 할 때는 아주 간사하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서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그러다가 사냥이 끝나니 모든 사냥개들을 삶아 버렸다. 이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냥개가 바로 장량이다. 장량은 유방의 실체를 미리 알고 있었기에 도망쳐서 목숨을 건진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신은 멍청하게 짖다가 그냥 덜컥 죽임을 당한다.
유방을 보는 관점에 있어서는 어떤 역사가들은 탁월한 리더십을 꼽기도 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결국은 유방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잘 이용해서 성공했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유방이 양아치에서 조폭으로, 조폭에서 건달로, 건달에서 벼슬아치로, 벼슬아치에서 황제로 되어 가는 과정에 있어 얼마나 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이용되었겠는가?
사실 알고보면 유방의 성공요인은 별거 아니다. 사람을 부려 먹으면서도 그 사람의 마음을 샀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당시 수준의 사람들과는 달리 상식이 꽤 높았던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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