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항우(項羽), 항우는 왜 실패했는가

인간의 역사를 보면 아주 오랜 세월이 흘러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 되는 이가 있다. 삼국지 이전에 초한지를 보면 중국에서 천하를 통일하는 과정에 있어 항우(項羽)와 유방(劉邦)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초한지를 통해 승리를 한 인물은 유방(劉邦)이다. 그러나 항우도 알고 보면 유방에 못지 않은 영웅이고 어쩌면 유방보다도 더 유능한 인물일 수 있다. 그러나 하늘은 항우가 아닌 유방의 손을 들어줬다.

오늘 <상식은 권력이다>에서 항우에 대한 인물탐구를 해본다. 항우는 고대 중국 진나라 말기의 장수이자 초한전쟁 당시 서초(西楚)의 패왕이었다. 성은 항(項), 이름은 적(籍)으로 우(羽)는 자(字)다. 다만 본명보다는 자로 더 널리 알려져 있어 우리들에게는 오늘날 보통 항우(項羽)로 주로 불린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는다.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

초한지에서 천하를 평정하면서 주인공이 될려다 실패한 인물, 바로 항우에 관한 상식입니다. 항우가 타고난 배경도 좋았고 초반에 운세도 좋았는데 왜 역사에서 그는 패배자가 되었는지 곰곰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초한지로 상식의 핵심을 꿰 뚫어 보시기 바랍니다.

초한지의 영웅, 항우(項羽)

초한지를 보면 항우는 엄청난 괴력은 물론이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대단한 무장으로 평가된다. 중국 역사상 최강의 무력을 갖고 있다고 평가받는 항우는 일명 ‘서초패왕’이라고도 한다.

중국 초나라의 군주였던 항우는 몇 천 명의 병사로 수 십만 대군을 쳐부수고 혈혈단신으로 기병 수 백 여 명을 상대하는 등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정말 대단한 인물이다. 항우는 거록대전과 팽성대전을 통해 고작 3만의 군사로 60만 대군과 정면으로 맞붙어 상대를 초토화 시키고 별다른 피해도 없이 적군 30만 명을 일방적으로 살육했다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공포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없다.

항우의 괴력과 엄청난 힘

항우의 괴력과 군사적 능력은 가히 그 당시에 최강이었다. 그래서 유방도 처음에는 항우를 무척 두려워하였고 바짝 업드려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중국인들이 허풍이 세고 과장되게 역사를 기록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어쨋든 항우는 대단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

항우는 비교할 대상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무력과 카리스마로 진시황 이후 순식간에 중국 천하를 평정하고 정점에 올랐다. 그러나 항우의 이러한 초반 기세등등은 오래가지 못한다. 항우는 자신의 주변에 있는 뛰어난 인재들을 제대로 쓸 줄 몰랐다. 그래서 결국은 막장에 드라마틱한 삶의 처지에 놓이고 우미인과 로맨스 이야기는 후대에 패왕별희(覇王別姬) 등 수많은 이야기 거리를 던져주었고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항우는 기원전 232년 초나라의 팽성에서 태어났다. 성은 항이 본명은 적이며 우는 그의 자인데 그의 할아버지는 초나라 최후의 명장이라 불리는 항연이었다. 또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초나라의 장수를 지낸 명문 중의 명문이었다. 그러나 항우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을 때는 이미 조국인 초나라가 멸망하고 난 뒤였다.

타고난 야심가

항우와 같이 살고 있던 작은 아버지 항량은 조카를 위해 글과 무술을 가르쳤지만 항우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자 화가 나서 그를 꾸짖었고 그러자 항우는 그은 제 성과 이름을 쓸 줄 알 정도면 되고 검술 역시 제 한 몸을 지킬 수 있으면 충분하다는 자만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어쩌면 여기서 우리는 항우의 기질을 알 수 있다. 태어난 성분이 좋고 주변 환경이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겸손해 하지 않는 인품은 결국 그가 크게 되어도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항우는 어느 날 진시황이 자신이 살고 있는 회계 지역을 방문하자 그 행렬을 구경하다 갑자기 ‘언젠가는 내가 저 자리를 차지하고 말테다’라는 말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니까 항우는 벌써 어린 나이부터 천하를 가지려는 야심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우가 청년기에 접어들 때 진나라의 상황은 그야말로 개판이었는데, 역사적으로 늘 재현되는 일이지만 “세상이 혼란 할 때는 먼저 먹는 놈이 장땡이다”. 항우는 바로 이 점을 간파하고 역사의 땅따먹기 현장에 뛰어 들었다.

진시황의 폭정으로 백성들은 심한 고통을 받았고 뒤를 이은 2대 왕제 호해(胡亥)는 또라이였다. 호해는 천하의 간신이었던 환관 조고(趙高)에 국사를 맏기고 술과 미녀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가 기원전 209년 진승과 오광의 난을 기점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자 각 지역은 중앙관리였던 진나라 관리를 때려 죽이고 난이 일어 났다.

진나라에 반기를 들지 않는 관리들은 모두 목숨을 잃는 분위기가 되자 항우가 살고 있던 회계의 태수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그 지방의 유력자 있던 항우의 숙부 항량을 끌어들여 난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항량은 은통과 같은 인물과 뜻을 함께하기에 너무 그릇이 작은 소인배라 판단하며 조카인 항우에게 몰래 지시를 내린다. 얼마 후 은통 항량이 회담을 나누던 장소에 갑자기 항우가 나타나 단칼에 은통의 목을 베어 버렸고 이후 항량이 직접 회계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때 항우는 은통의 목을 밴 후에 달려드는 군사들 100여명을 혼자서 모두 죽여버렸다니 가히 힘이 좋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진나라에 대항하여 함께 싸우기 위해 찾아오는 이들이 많았는데 이 중에는 훗날 항우의 숙적이 되는 한고조 유방도 있었다. 처음 운명적 만남에 있어 항우가 한참 잘 나갈 때 유방은 매우 한미한 존재였다.

항우의 정신적 지주였던 항량이 이끄는 본대가 진나라의 명장 장한이 이끄는 부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항량이 전사하게 되었다. 항량을 죽인 장한은 곧바로 조나라를 공격했고 조나라가 무너지면 다음은 항우 자신들의 차례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지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관중에 나중에 갔어도 패권을 차지한 항우

당시 초나라는 진나라의 중심지인 관중으로 진군할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관중으로 진군 할 병력과 조나라를 도울 병력을 따로 나눠야 할 상황이었다. 초나라의 회왕이 진나라의 중심지인 ‘관중에 먼저 들어가는 사람이 천하의 왕이 될 것이다‘라고 선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항우는 조나라를 돕기보다는 관중으로 진군하는 쪽에 서기를 원했다. 그러나 회왕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항우가 얼마 전 양성에서 사람들을 잔인하게 생매장 한 것을 지적하면서 잔혹한 성품의 항우를 관중으로 보내면 민심이 모두 돌아설 것이기 때문에 백성들에게 관대한 유방을 보내는 것이 낫다고 설득했다. 결국 서쪽에 있는 관중으로 먼저 향하는 것은 유방이 되었다. 항우는 별다른 성과도 없는 조나라 원군으로 간다는 사실의 불만을 품었지만 군을 참고 회왕의 명령에 따랐다.

당시 조나라 구원군의 대장은 항우가 아닌 송이라는 사람이었는데 송이가 조나라를 도울 생각은 하지 않고 시간만 끌고 있자 항우가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제거한 후 군사들을 이끌고 출전하게 되었다. 송이가 쓸데없이 시간만 끌자 조나라는 몹시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항우는 즉시 자신의 부하인 영포에게 2만의 병사를 줘서 선발대로 먼저 보냈다. 선발대가 시간을 버는 동안 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본대를 도착한 항우는 타고 온 배를 모두 부숴버리고 병사들에게 3일치 식량만 나눠준 후 남은 식량 또한 모두 버리면서 죽음을 각오한 채 전투에 임했다.

얼마 후 초나라와 진나라의 운명이 걸린 거록 대전이 시작되었다. 무려 아홉번이나 되는 어마어마한 혈투를 버린 끝에 항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초나라 병사들은 항우의 지휘 아래 엄청난 전투력을 발휘해 한 사람이 진나라 병사 열명을 당해낼 기세를 보여줬는데 병사들이 내지르는 소리가 천지를 뒤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이때 항우를 제외한 다른 제후들은 거록 주변에 진지를 세우고 전투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양군이 보여주는 치열한 전투에 압도 당해서 아무도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벌벌 떨면서 전투만 지켜보았다고 한다.

마침내 항우는 진나라 군을 섬멸하고 난 후 주변에 있던 제후의 부대를 불러들였다. 이때 모든 제후들이 무릎을 꿇고 기어서 항우에 진영으로 왔는데 감히 고개를 들어 항우를 바라볼 수 없었다 한다. 이로써 항우는 대번에 모든 제후들을 장악하며 상장군이 되었다.

이후 항우는 진나라의 주력군을 이끌던 장한의 항복을 받아내면서 사실상 진나라의 멸망을 결정지었다. 그리고 곧바로 진나라의 수도 함양으로 진군하였다. 그러나 이때 항우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당시 항우에게 항복한 20만 명 가량의 진나라군 포로들이 있었는데 진군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이들 모두를 생매장을 죽여버리는 끔찍한 대학살을 저지른다.

회왕이 관중으로 먼저 들어서는 사람을 천하의 왕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했는데 항우가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던 진나라 패잔병들은 항우가 엄청난 학살을 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어차피 항복해 죽을 바에는 싸우다 죽자며 격렬하게 저항한다. 따라서 항우는 유방보다 늦게 도착을 하는 어리석은 결과를 맞이하였다.

홍문의 회(鴻門之會)

회왕과의 약속대로 라면 유방이 왕이 돼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자신이 모든 면에서 유방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항우는 이를 순순히 인정할 수 없었다. 때문에 항우는 열 받아서 거느리고 있는 병사를 이끌고 유방을 작살내 버리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러한 항우의 소식을 듣자 유방은 졸지에 맞아 죽을 것 같았다. 이에 유방은 항우의 숙부에게 중재를 부탁했고 그렇게 항우와 유방은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 근처에서 홍문회 회담을 갖는다. 홍문의 회(鴻門之會)는 항우와 유방에 있어서 일생일대의 엄청난 사건이었다. 어찌보면 유방이 이 날 죽었다면 중국의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항우의 책사였던 범증은 유방의 재능을 꿰뚫어보고 오늘이 자리에서 반드시 유방을 죽여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렇지만 유방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항우는 별다른 명분도 없이 죽일 수는 없다며 그를 살려주었다. 괜히 알량하고 쫀쫀하게 자만감으로 만땅 해피하였던 항우는 유방을 쪼다로 봤지만 이것은 그에게 너무 큰 실책으로 돌아온다.

결국 유방이 살아서 도망가자 범증은 분통이 터졌다. 범증은 어린애와 함께 큰일을 도모할 수 없다고 한탄하면서 이번 기회를 날려 먹었으니 이제 우린 앞으로 유방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항우에게 크게 소리 쳤다. 그런데 알고 보면 범증이 간파한 유방의 정체는 사실 아주 무서운 놈이었던 것이다. 결국 범증의 말대로 이날 항우의 방심은 끝내 파멸을 불러온다.

이후 항우는 성안에 있던 백성들을 학살하고 이미 유방에게 항복했던 진나라의 왕 자영도 죽였다. 항우는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 취미생활인데 유방을 죽이지 않는 꼴갑을 떨다 결국은 자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항우는 신나서 진나라의 궁궐에도 불을 질러 모든 것을 전소시켰다. 사실 항우는 약간 정신이 나간 힘이 센 놈에 불과할 수 있다. 항우가 그곳에 머무는 동안 얼마나 많은 파괴와 학살을 저질렀던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풍요로웠던 관중 땅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다.

유방은 파초로, 항우는 팽성으로

항우는 자신에게 왕 자리를 넘기고 조용한 삶을 살기 위해 떠나는 초나라 회왕 마저 암살하는 치사함을 보였다. 그리고 눈에 가시로 여겨졌던 유방은 험지의 땅인 파초의 왕으로 임명해 사실상 유배를 보냈다.

그런데 항우는 이렇게 세상을 평정한 것 같았는데 중원 전체를 다스리기 좋은 위치에 있는 관중 지역에 남아야 한다는 신하들의 건의를 무시한다. 항우는 자신의 본거지인 팽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관중을 포기하고 대학살을 저질렀으며 한때 자신이 모시던 회왕 마저 살해한 사건들은 훗날 항우가 유방과 대결해서 패배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중국 역사상 최고의 명장 중 하나라고 불리던 한신도 당시에는 항우의 부하였는데 그 능력을 인정하지 않던 항우는 그가 내는 의견도 무시하였다.

항우의 대접에 실망한 한신은 유방을 찾아갔다. 유방은 그를 대원수로 임명했고 마침내 기원전 206년 8월 하초에 들어간지 겨우 4개월 만에 한왕 유방은 대원수 한신을 앞세워 관중 방향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유방이 빠져 나올까 미리 배치해 둔 진나라의 명장이었던 장한의 군사들이 있었지만 항우의 예상과 달리 한신의 지략으로 장한의 군대는 개박살난다.

한신은 장한을 꺽고 파죽지세로 관중 지역까지 평정해 버린다. 이에 항우는 열 받아서 유방을 응징하려 했지만 이때 제나라에서 반기를 드는 바람에 본거지인 팽성을 비워둔 채 반란을 진압하러 떠날 수밖에 없었다. 얼마 후 항우가 반란을 진압하고 또다시 항복한 군사들을 생매장하는 사이 유방은 자신의 밑에 수많은 제후를 불러 모으며 무려 60만에 가까운 대병력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유방은 항우의 본거지인 팽성 마저 점령해 버린다.

유방에게 본진이 털린 항우

자신의 본진이었던 팽성을 유방에게 개 털렸다는 소식을 들은 항우는 돌아버린다. 항우는 정예병 3만 명만을 이끌고 팽성을 되찾으러 떠났다. 그런데 자신들을 상대하러 온 항우의 병력이 고작 3만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소식을 들은 유방은 처음에 깔 보았다. 고작 3만명으로 우리를 상대하겠냐면서 유방은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 정예병의 위력은 유방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력했다. 항우와 초나라군은 밤중에 팽성의 서쪽인 소연에 도착한 뒤 그때부터 동쪽으로 진군하며 눈 앞에 보이는 한나라 군을 모조리 쓸어버리기 시작했다. 유방의 군사를 무 썰듯이 써는 항우의 기세에 한나라 연합군은 깨갱하면서 제대로 된 싸워 보지도 못하고 튀기에 바뻤다. 이때 10만 명 정도의 병사들이 항우가 이끄는 초나라군 에 무참히 죽는다.

항우의 등장에 놀라서 남쪽으로 도망친 병사들 추격해 온 항우 군의 손에 또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니까 항우가 나타나자 유방이 읶는 군대는 한 마디로 군대도 아니었다. 항우의 군사들이 유방을 따라온 군사들을 얼마나 많이 죽였던지 한나라 군의 시체로 막혀 물이 흐르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팽성 전투 이후에도 항우는 탁월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참모인 범증의 뛰어난 계책까지 더해지면서 유방과 싸움에서 계속 승리를 거둔다. 한 마디로 항우와 유방은 이때까지만 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방에게 항복한 진평이 항우와 범증의 사이를 갈라 놓는 이간책을 쓰면서 결국에는 항우가 범증을 내치게 되는 엄청난 일이 발생되었다. 항우의 치졸한 모습에 실망한 범증은 고향으로 내려간 후 병에 걸려 죽고 말았는데 이후 항우는 그냥 하락세 인생을 걷게 된다.

무너지는 항우, 사면초가

한동안 항우는 유방과 싸움에서 계속 승리를 거뒀지만 항우가 유방과 대치하는 틈을 타 하북 지역을 평정한 한신까지 합세하면서 전선은 달라졌다. 결국 항우는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 군의 포위망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게다가 한나라군 참모 장량의 계책으로 사방을 포위한 초나라 진영을 향해 고향 노래를 들려주니 가족 생각이 난 병사들은 야밤을 틈타서 탈영을 하고 상당수가 한나라에 항복한다. 여기서 나온 사자성어가 바로 사면초가(四面楚歌)이다. 사면초가는 사방에서 초나라 노래가 흘러나온다는 뜻이다. 즉 적에게 포위되어 아무런 희망이 없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태를 말한. 진퇴양난(進退兩難)의 다음 단계라고 보면 된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막판에는 항우의 곁을 지키는 병사는 수 백명에 불과해졌다. 이제 항우는 자신들의 고향인 강남으로 가기 위해 오왕이라는 지역으로 향한다. 항우는 자신을 막는 모든 것을 쳐부수면서 포위망을 돌파하는 데는 기적적으로 성공했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병사들이 죽었다. 결국 항우와 나중에 끝까지 남은 병사들은 고작 28명 뿐이었다.

항우는 도망에 도망을 가다가 마침내 강에 도착했는데 그때까지 자신을 따르던 병사들 26명을 모두 강남으로 향하는 배에 태웠다. 끝까지 살아 남은 병사들은 모두 배에 탔지만 항우는 스스로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을 남기며 병사들만 떠나 보낸다. 이후 항우는 단신으로 적진에 뛰어들어 수 백명을 죽인 후 많은 부상을 입자 스스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한다.

항우와 우미인, 해하가(垓下歌)

항우는 최우의 순간을 맞이하면서 애첩 우희에게 시 한 수를 읊었다. 그것이 바로 ‘해하가(垓下歌)’이다.

‘힘은 산을 뽑고 기운은 세상을 덮지만/ 때는 불리하고 오추마도 달리지 않는구나/ 오추마가 달리지 않으니 내 어찌하랴/ 우야, 우야. 너를 장차 어쩌란 말인가(力拔山兮氣蓋世 時不利兮騶不逝 騶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그의 애통한 노래를 듣고 우희는 ‘한나라 병졸들 이미 우리 땅을 모두 차지해/ 사방에 들리느니 초나라 노랫소리뿐이네/ 대왕의 드높던 뜻과 기개마저 다하였으니/ 하찮은 이 몸 어찌 살기를 바랄 수 있으리(漢兵己略地 四面楚歌聲 大王義氣盡 賤妾何聊生)’라며 눈물을 지었다.

그리고 항우는 자신의 검을 뽑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후 우희의 무덤가에 한 송이 꽃이 피어났는데 사람들은 이를 보고 ‘우미인초(虞美人草, 개양귀비)’라고 불렀다.

어찌보면 항우는 중국 역사에 있어 최고이자 최강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천부적인 능력으로 거병하고 고작 2년 만에 진의 멸망을 이끌고 유방을 포함한 모든 제후들을 무릎 꿇리고 중국의 강력한 패자로 등장했지만 매우 짧은 시간에 또 무너졌다.

항우는 무력과 카리스마에 있어 세계사를 통틀어도 최강의 인물이다. 역사서인 사기를 보면 항우는 엄청난 폐기와 카리스마로 군중들을 제압했고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누구도 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지막 전투에서는 항우가 큰 소리를 지르며 돌격하니 모든 적군들이 놀라서 엎드리며 길을 터 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항우, 그는 왜 실패했는가?

<상식은 권력이다>에서 항우에 대한 인물탐구를 하면서 그냥 그의 행보만 늘어 놓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항우가 타고난 배경도 좋았고 초반에 운세도 좋았는데 왜 그는 패배자가 되었는지 곰곰이 새겨 볼 필요가 있다.

항우의 실패요인

  1. 지나친 자만심이 있었다.
  2. 인재를 알아보지 못했다.
  3. 남을 믿지 못하고 의심이 많았다
  4. 장기적인 안목이 부재했다.
  5. 판단력이 부족했다.

항우가 실패한 요인을 여러 가지로 분석하는 역사가들이 있다. 그런데 공통된 것은 항우가 자만심이 컸으며 인재를 알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또한 남을 믿지 못하고 장기적인 안목도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력이 부족했다고 꼽는다. 엄청난 힘을 가진 장수로 싸움에는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지략은 떨어지고 하늘이 준 자신의 기회를 놓친 인물이 바로 항우이다. 만일 항우가 홍문지회에서 유방을 죽였다면, 한신을 등용했더라면, 범증을 내치지 않았다면 중국의 초한지는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한비자는 ‘군주의 등급’을 이렇게 간파했다. “군주 중에서 하급인 ‘하군(下君)’은 오로지 자신의 힘과 지혜를 소진하고, 중급인 ‘중군(中君)’은 남의 힘을 발휘하게 하고, 상급인 ‘상군(上君)’은 여러 사람의 지혜를 발휘하게 한다.” 여기에 비춰 볼 때, 항우는 기껏해야 군주의 등급 가운데 하급인 하군(下君)이다. 항우는 천하를 얻으려는 전쟁에 있어 힘이 센 대단한 장수였음에는 틀림이 없으나 훌륭한 군주의 자질은 부족한 사람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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