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 상식 – 알기 쉬운 생활 속 불교용어 모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많이 쓰는 불교용어 모음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알고 보면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만큼 불교가 우리의 생활에 밀접하게 오랜 기간 동안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평상시에 대화나 또는 말을 하는데 있어서 불교 용어를 쓰는데, 이러한 말의 유래를 알아보는 것도 상식입니다.

불교용어 모음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많이 쓰는 불교용어 모음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많이 쓰는 불교용어 모음입니다. 일반적으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알고 보면 불교에서 유래한 용어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만큼 불교가 우리의 생활에 밀접하게 오랜 기간 동안 같이 했다는 것입니다. 불교 용어를 아는 것도 상식입니다.

가람(伽藍)

산스크리트 상가라마(saṃghārāma)를 음역한 승가람마(僧伽藍摩)의 줄임말이다. 중원(衆園), 원(園), 사원(寺院) 및 승원(僧園) 등이라고도 한다. 일반적으로 ‘절’과 같은 의미이다. 본래는 출가 수행자들이 공동으로 수행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토지와 건축물을 포함한 종합적인 의미로 사용한다.

가피(加被)

부처나 보살로부터 힘과 도움을 받는 일을 뜻한다. 가비(加備), 가우(加祐), 가위(加威)라고도 하며, 줄여서 가(加)라고도 한다. 본래는 ‘우위에 있다’, ‘지탱하다’, ‘거주처’ 등을 의미한다. 불교에서는 불보살이 자비심으로 중생에게 영묘한 힘을 부여하여 이익을 주는 행위를 가리킨다. 징관(澄觀, 738~839)의 『화엄경소』에 따르면, 가피는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이루어지며, 현가(顯加)와 명가(冥加)의 두 가지 형태로 구분된다. 현가란 눈에 보이는 가피로서, 불보살이 몸[身業]과 입[口業]을 통한 위신력으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불보살이 손으로 중생의 정수리를 쓰다듬어[摩頂] 보살의 위의(威儀)를 증장시키는 것, 혹은 말로써 변재(辯才)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 등을 말한다. 명가란 눈에 보이지 않는 가피로서, 불보살이 마음[意業]의 위신력으로 일으키는 가피이다. 불보살이 중생의 지혜를 증장시켜 ‘두려울 바 없음[無所畏]’을 얻게 하는 것 등이다. 이는 은밀하여 드러나지 않으므로 ‘명가’라고 한다.

갈등(葛藤)

칡과 등나무처럼 얽히고설킨 것을 비유하는 말로, 선에서는 언어문자 자체 또는 언어문자에 사로잡혀 속박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리저리 뻗어 뒤얽혀 있는 칡과 등나무처럼 얽히고 설킨 것을 비유하는 말로, 선(禪)에서 언어문자 자체 또는 언어문자에 속박되는 것을 뜻한다.

감로(甘露)

하늘의 신들이 마시는 영묘한 술 또는 약으로, 붓다의 교설을 비유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이다.
아밀리다(阿密哩多)라고 음사하기도 한다. 산스크리트어의 원래 의미는 ‘불사(不死)’ 또는 ‘불멸(不滅)’이다. 인도 신화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암브로시아(ambrosia)와 같이 하늘의 신들이 마시면 죽지 않는 영묘한 술이나 약을 뜻했다. 그 맛이 꿀처럼 달기 때문에 감로라고도 하였다. 불교에서는 붓다의 가르침이 달고 그 가르침을 통해 죽지 않는 경지인 열반을 얻기 때문에 이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붓다의 가르침을 감로법(甘露法)이라 부르기도 한다. 밀교에서는 아미타불을 다섯 여래 중 한 명이라 하여 중시하며 감로왕여래(甘露王如來)라고 불렀다.

강당(講堂)

인도에서 설법을 강(講)하던 장소이다. 현대에는 학교, 관공서 등에서 많은 사람이 한 군데 모여 의식이나 강연 등을 들을 수 있는 큰 장소를 뜻한다.

거사(居士)

출가하지 않고 재가자로 있으면서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남자를 칭한다. 불교에 귀의한 재가의 남자 수행자를 말한다. 초기 경전에서는 인도의 사성계급 가운데 세 번째인 바이샤(vaiśya)의 역어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으나 점차 뜻이 확대되어 재가자로서 불교에 귀의하여 수행하는 남성 일반을 가리키는 용어가 되었다.

건달(乾達)

간다르바(gandharva)는 산스크리트어의 단어이다. ‘음악의 신’이라는 의미였고, 이게 중국에서 한자로 음을 따서 ‘건달’로 표기된 것이다. 그런데 근면 성실을 강조하던 우리 조상님들이 보기에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것은 옳은 행동이 아니었기에 완전히 의미가 바뀌었다.
인도신화에서는 천상의 신성한 물 소마(Soma)를 지키는 신. 그 소마는 신령스런 약으로 알려져 왔으므로 건달바는 훌륭한 의사이기도 하며, 향만 먹으므로 식향(食香)이라고도 한다. 식향(食香) ·향음(香陰) ·심향(尋香) 심향행(尋香行)등으로 한역되며 두 가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긴나라와 함께 제석천의 음악을 담당하는 신이며,고기와 술을 먹지 않고 향만을 먹는다. 항상 부처님이 설법하는자리에 나타나 정법을 찬탄하고 불교를수호한다. 인도에서는음악을 직업으로 하는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둘째는 사람이 죽은 뒤 다른 몸을 받기 전인 영혼신(靈魂身), 곧 중음신(中陰身) ·중유(中有) 등으로 한역한다. 태어날 다른 곳을 냄새로 찾아 다닌다고 하여 심향행이라고도불린다. 모두사자의 갈기와 같은 관을쓰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건달패”라는 용어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빈둥 노는 사람, 또는 불량배 집단을 일컫는 말이 건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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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식(乞食)

출가 수행자가 바른 예법에 따라 음식 등을 구하는 행위이다. 수행승이 의식주에 대한 탐착을 버리기 위해 닦는 12두타행(頭陀行)의 하나로, 출가 수행자가 바른 예법으로 음식 등을 구하는 행위이다. 팔정도 중에 바른 생활[正命]이 곧 걸식이다. 출가 수행자가 생업을 통해 생활하는 것은 옳지 않은 생활[邪命]이라 하였다. 걸식을 통해 자기 수행을 하며, 아울러 보시하는 사람들이 복을 지어 선업을 쌓는 기회를 주는 데 그 의의가 있다. 걸식도 예법이 있다. 율장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걸식한 음식은 오전 중에 다 먹어야 하고, 목숨을 지탱할 정도로만 적게 받으며, 재가(보시자)에 폐를 끼치지 않을 것 등의 여러 가지 규율이 정해져 있다.

겁[劫]

헤아릴 수 없도록 긴 시간을 뜻한다. 고대 인도에서 시간을 나타내는 가장 긴 단위로 사용되었고, 불교에서는 이것을 수용하여 일정한 숫자로 나타낼 수 없는 무한한 시간 혹은 세월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하였다. 겁은 줄인 음사어로 갖춘 음사어는 겁파(劫波)이고, 대시(大時), 장시(長時) 등으로 의역한다. 겁파(劫波)라고도 한다. 세계가 성립되어 존속하고 파괴되어 공무(空無)가 되는 하나하나의 시기를 말하며, 측정할 수 없는 시간, 즉 몇 억만 년이나 되는 극대한 시간의 한계를 가리킨다. 그 길이를 《잡아함경(雜阿含經)》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방과 상하로 1유순(由旬:약 15 km)이나 되는 철성(鐵城) 안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100년마다 겨자씨 한 알씩을 꺼낸다. 이렇게 겨자씨 전부를 다 꺼내어도 겁은 끝나지 않는다. ​겁을 소(小) ·중(中) ·대(大)로 나누어 이 세계의 성(成) ·주(住) ·괴(壞) ·공(空)이 진행되는 기간을 일대겁(一大劫)이라고 하기도 한다. 석가가 발심해서 성불할 때까지 수행에 소요된 시간을 삼아승기겁(三阿僧祇劫), 백대겁(百大劫)이라고 한다. 아승기(asamkhya)는 무수(無數)라고 옮기며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이다.

게송(偈頌)

불전 문체의 하나, 혹은 불교 한시의 통칭이다. 불전(佛典)은 산문 혹은 운문으로만 구성된 것도 있으나, 산문과 운문의 복합체인 경우가 많다. 게송은 불경에 등장하는 운문을 한자문화권에서 통칭하는 말이다. 기야(祇夜), 가타(伽陀), 가송(歌頌)과 동의어이다. 불경의 양식과 성격을 열두 가지로 나눈 것을 12분교(十二分敎)라 하는데, 이중 운문 형식에 해당하는 것은 기야(祇夜, geya, ⓟgeyya)와 가타(伽陀, ⓢgāthā)이다. 기야는 산문 경전 본문 내용을 요약 서술한 노래로서, 응송(應頌) 또는 중송(重頌)이라 번역한다. 가타는 독립적으로 노래한 것을 가리키는데, 이를 풍송(諷頌)이라 번역한다. 기야와 가타를 중국에서 한시 형태로 번역하였고, 이로부터 동아시아에 게송 문학이 발전하였다. 한자어 ‘게송’은 범어 가타(gāthā)의 음역어인 가타 혹은 게타를 약칭한 ‘게(偈)’에 찬송의 뜻이 담긴 ‘송(頌)’을 추가하여 합성한 어휘다.

격외법문(格外法門)

일정하게 규정된 격식을 벗어난 법문을 말한다. ‘격’이란 규격(規格), 격식(格式)의 의미로 문자와 사유의 확고한 형식을 나타낸다. 주로 선종(禪宗)에서 고정적인 틀을 넘어서 자유로운 경계에 들어서도록 유도하는 방법의 법문을 가리킨다. 선종은 자유자재로 문자를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경전에 얽매이지 않고 별도의 방법으로 전한다는 교외별전(敎外別傳),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이심전심(以心傳心) 등을 종지로서 표방한다. 이러한 사유 방식 곳곳에 잠재되어 있는 선법(禪法) 중 하나가 격외법문이다. 격외의 법문은 ‘규정된 수행의 절차와 단계[格]’에 따르지 않고 일상의 현장에서 그때마다 마주치는 상황에 조응하여 자기 자신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즉각적으로 자각하도록 학인을 이끄는 방식이다. 이러한 격외법문은 무수히 다양한 형태를 보여 주고 있다. 부처가 무엇인지를 묻는 제자에게 부처는 “똥막대기”라고 대답한다든지, 불법의 대의를 묻는 제자에게 “뜰 앞의 잣나무”라고 대답하는 등 어떤 인식의 규격으로 이해하려 해도 들어맞지 않는 응답을 한 예가 격외의 법문이라 할 수 있다.

결집(結集)

불전(佛典)을 올바로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을 말한다. 많은 자격 있는 사람들이 모여 불전(佛典)을 올바로 평가하고 편찬하는 일을 의미한다. 인도에서는 전후 4차례의 결집이 있었다고 한다. 제1회 결집은 석가의 입멸(入滅) 직후 500명의 유능한 비구(比丘)들이 라쟈그리하(王舍城)교외 칠엽굴(七葉窟)에 모여 마하카샤파(Mahkyapa:大迦葉)의 주재로 열렸다. 우팔리(:優波離)가 율(律)을, 아난다(阿難陀)가 경(經)을 그들이 듣고 기억하는대로 외고, 다른 사람들의 승인을 받아 확정했다고 한다.그 후 석가 입멸 후 100년경에 계율에 대해 이론이 생겼으므로, 바이샬리(毘舍離)에서 야샤스)가 주재하는 제2차 결집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700명의 고승이 모였다 한다. 남방의 전승에 의하면 제3차 결집은 불멸(佛滅) 후 200년경에 아소카왕(阿育王) 치하의 서울 파탈리푸트라(華氏城)에서 열렸으며,모갈리푸타 티사의 주재로 1,000명의 비구가 모여 경 ·율 ·논(論) 전부를 집성했다고 한다. 제1 ·제2 결집에 관해서는 남방불교나 북방불교 모두가 다 전하지만,제3차 결집에 관해서는 북방불교에서 언급을 하지 않고 있다. 제4차 결집은 2세기경, 카니슈카왕 밑에서 파르슈바(脇尊者) ·바수미트라(世友) 등의 주재하에 카슈미르의 비구500명이 모여 삼장(三藏)에 대한 해석을 가하였는데, 그것이 《대비바사론(大毘婆沙論)》이 되었다 한다. 그러나 남방불교에서는 믿지 않고 있다.

관념(觀念)

사람의 마음 속에 나타나는 표상·상념·개념 또는 의식내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는 불교용어로 진리 또는 불타(佛陀)를 관찰사념(觀察思念)한다는 뜻이며, 심리학용어로서의 관념은 그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나 대개 표상과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 뜻은 다소 차이가 있으나 표상 쪽이 약간 더 구체적이다. 관념은 영어의 ‘idea’이고, 표상은 독일어 ‘Vorstellung’의 번역어인데 현재는 대개 동의어로 사용된다. 일반적으로 감각적 혹은 공상적 표상에서 이성적·지적 표상에 이르는 넓은 뜻의 표상 일반, 혹은 그 어느 하나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된다. 철학용어로서는 감각적·감성적 표상에 대립하는 것으로 지적 표상 또는 개념, 나아가서는 그 복합체를 의미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고해(苦海)

고통으로 가득 찬 윤회의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말이다. 고해는 윤회의 세계인 삼계육도(三界六道)에 빠져 끝없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아득하여 끝이 없는 것과 같다. 이는 마치 큰 바다에 빠져 고통을 받으면서도 벗어나기 어려운 것과 같기 때문에 그러한 현실 세계를 바다에 비유한 것이다. 또 중생이 윤회의 세계를 끝없이 왕래하는 것을 수레바퀴에 비유하고, 벗어나기 어려운 것을 바다에 비유한 고륜해(苦輪海)를 줄여서 윤해(輪海)라고도 한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죽는다는 뜻으로, 궁극적으로 자신이 소유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이다. ‘공수(空手)’는 빈손을 의미한다. 빈손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손’이다. 이는 또한 돈이나 물건 따위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즉 사람이 태어날 때 빈손으로 왔듯이(來) 죽을 때도 빈손으로 간다(去)는 의미로서, 재화를 탐내거나 권세를 추구하는 것은 부질없으니 욕심을 버릴 것을 시사하는 교훈적인 글귀이다. 한편으로는 인생의 허무함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기도 한다.

공(空)

① ‘텅 빈, 존재하지 않는’이라는 의미 ② 『반야경』의 공 사상이나 중관 사상에서는 ‘자성이 존재하지 않는,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등의 의미이다. 불교는 초기부터 산란한 마음을 가라앉히고 깨달아야 할 대상을 집중해서 관찰함으로써 그에 대한 올바른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지(止, śamatha)와 관(觀, vipaśyanā)을 중요한 수행 방법으로 간주하였다. 그에 따라 공은 사성제(四聖諦), 삼법인(三法印) 등과 함께 지관의 수행을 통해서 얻어야 하는 중요한 지혜 가운데 하나로 여겨졌다. 공이 중요한 지혜로 여겨졌던 이유는 세간의 여러 사물을 공, 즉 ‘텅 빈 것, 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깨달아 앎으로써, 여러 사물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끊어 버리고 윤회에서 벗어나 열반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공양주(供養主)

① 사찰에서 음식을 만드는 소임을 맡은 사람 ② 공양물을 시주하는 사람 ③ 공양물을 시주할 것을 권하는 사람 등을 의미한다. ① 사찰에서 음식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공사(供司), 반두(飯頭)라고도 한다. 사찰에서는 새벽 일찍 일어나 예불을 시작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오전 6시면 아침공양을 하고 오전 11시 30분경에 점심공양을 하고, 오후 5시경 저녁공양을 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공양주는 이와 같은 시간에 맞추어 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소임을 맡게 된다. ② 삼보(불·법·승)에 재물을 시주(施主)하는 사람을 공양주라고 한다. 시주(施主)란 보시를 하는 것, 혹은 보시를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단월(檀越, dāna-pati)과 같은 말이다. ③ 공양물을 시주 할 것을 권하는 사람도 공양주라고 하는데, 이때 공양주는 화주(化主)와 같은 말이다.

공부(工夫)

선 수행에 정진하는 모습, 또는 선 수행의 일환으로 일상에서 행하는 일체의 행위를 뜻한다.
선 수행 자체를 일컫는 말로서 수행과 동일한 의미로 쓰인다. 선 수행에 전념하고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몸의 공부인데, 일상의 걷고(行) 머물며(住) 앉고(坐) 눕는(臥) 일체의 행동거지에서 항상 올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둘은 마음의 공부인데, 정신을 하나의 대상에 집중하여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도록 집중하여 삼매를 유지하는 행위를 말한다. 몸과 마음이 일여하게 유지되는 경우에 대하여 신심일여(身心一如)의 공부라고 말한다.

공즉시색(空卽是色)

공이 곧 색이라는 뜻으로,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서 근본 도리를 드러내는 문구 가운데 하나이다. 공(空, śūnya) 그대로 색(色, rūpa)이라는 뜻으로서,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서 근본 도리를 드러내는 문구 가운데 하나이다. ‘공(空, śūnya)’은 불변의 실체(實體) 또는 자신의 독립적 본성[自性]은 얻을 수 없다(不可得)는 도리로서 색 등의 만법이 지니는 이치이며, ‘색(色, rūpa)’은 시각 대상이 되는 물질을 의미한다. 이 공은 색의 소멸에서 오는 공이 아니라 색 그대로의 공이기도 하다. ‘즉’이란 서로 다른 두 대상이 완전히 일치한다는 말이 아니라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떼어 내려도 떼어 낼 수 없다는 뜻이다. 색을 버리고서 별도의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있는 그대로가 바로 그것이므로 ‘즉’이라 한다. 화엄종의 설을 빌리자면 공과 색이 불가분의 관계로 상호 침투해 있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라는 의미이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대승불교에서 큰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이다. 큰 자비의 서원에 의거하여, 세간에서(世) 어려움에 처한 중생이 부르는 소리(音)를 살펴서(觀) 언제 어디서든 구제해 준다는 보살이다. 관세음보살은 대승불교의 4대 보살 중 한 분이다. ‘관세음’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로키테슈바라(avalokiteśvara)에 대한 구마라집(鳩摩羅什, 344?~413?)의 번역이다. 이를 축법호(竺法護, 236?~313?)는 광세음(光世音)으로, 현장(玄奘, 602~664)은 관자재(觀自在)로 옮겼다. 이 산스크리트어 표현은 아바로키타(avalokita, 觀)와 이슈바라(īśvara, 自在)의 합성어로서, ‘중생을 구제하는 데 자재하다’는 뜻으로 ‘관자재’에 가깝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발견된 『법화경』 단간 중에는 아바로키타스바라(avalokitasvara), 즉 아바로키타(avalokita, 觀)와 스바라(svara, 音)의 합성인 것도 있다. 이 경우는 구마라집의 번역인 ‘관세음’이 적절하다. 또한 광세음(光世音)이라는 역어에 관해서는 아바로키타(avalokita)가 아로카(āloka, 光明)로 되어 있었을 개연성도 제기된다. 동아시아에서는 구마라집이 번역한 경전이 지금까지도 널리 유통되고 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이 가장 대중적인 역어로 정착되었다. 관세음보살은 수많은 대승경전에서 등장한다. 반야경(般若經)류 경전에서는 사리불에게 대승의 핵심 사상인 공(空)을 가르치는 분으로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서도 예로부터 관음신앙이 널리 유행하였다. 대표적인 관음성지로는 강원도 양양에 소재한 낙산사(洛山寺)를 들 수 있다. 낙산사라는 명칭은 관세음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알려진 인도 남부 보타락가산의 명칭을 딴 곳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남해 보리암(菩提庵), 강화 보문사(普門寺) 등 관세음보살의 영험담이 전해지는 관음도량이 전국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구두선(口頭禪)

선수행에 대하여 이론은 해박하지만 그에 대한 실제의 행동이 따르지 않는 모습을 말한다. 선(禪)은 좌선(坐禪)이라고도 한다. 이 경우에 선은 가부좌의 자세로 마음을 집중하여 사유하는 행위가 수반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몸으로 실천하는 수행이라는 행위가 따르지 않고 언설이나 문자 또는 관념을 앞세워 그것을 선이라고 주장하는 모습을 구두선(口頭禪)이라고 한다.

기특(奇特)

이가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귀엽게 보고 칭찬할 때 쓰이는 의미이다. ‘기특하다’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말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신통하여 귀염성이 있다.> 이 풀이에 따르면 ‘기특하다’는 말하는 이나, 글 쓰는 이보다 나이가 어리거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사람을 귀엽게 보고 칭찬할 때 쓰이는 말임을 알 수 있다. 즉 할아버지가 손주놈을 일컬어 ‘기특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낱말이 애초에불가(佛家)에서 사용될 때에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일> 곧 중생제도(衆生濟渡)의 측은지심( 惻隱之心)을 지니고 무색계(無色界)의 천상에서 인간으로 내려오신 인류구원의 사건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극락(極樂)

아미타불이 머물며 설법하고 있는 곳으로, 안락함이 가득한 이상향을 말한다. 안락하고 자유로우며 고통이 없는 즐거운 세계이다. 원어를 음역하여 수마제(須摩提)·수가제(須阿提)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의 정토를 지칭한다. 정토(淨土), 안양(安養), 낙방(樂邦), 무량수불토(無量壽佛土), 무량광불토(無量光佛土), 무량청정토(無量淸淨土), 서방 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 서방극락, 극락세계 등 다양한 이칭이 있다. 『아미타경』에 따르면 “이 세간에서 서쪽으로 10만억 불국토를 지난 곳에 있으며 그 국토에서는 아미타불이 지금도 설법하고 있다. 그 국토의 중생들 누구나 어떠한 괴로움도 없이 모두 즐거움만 받기 때문에 극락이라 한다.”라고 한다. 극락의 다른 말인 정토에는 아미타불의 서방 극락정토 외에 약사불(藥師佛)의 동방 정유리세계(淨琉璃世界), 아촉불(阿閦佛)이 있는 묘희국정토(妙喜國淨土), 미륵(彌勒)이 있는 미륵정토 도솔천(兜率天) 등이 있다.

나락(奈落)

윤회의 세계 중 가장 하위에 속하는 세계로 온갖 고통으로 시달림을 받는 곳이다. 산스크리트어 나라카(nāraka)의 줄인 음역어로 나락(那落), 날락(捺落)이라고도 하고, 갖춘 음사어는 나락가(那落迦)이며 고구(苦具), 불락(不樂), 지옥(地獄) 등으로 의역한다. 윤회의 세계인 삼계를 구성하는 여러 중생계 중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세계로서 오도(五道) 또는 육도(六道)의 하나이다. 지옥은 전생에 지은 악업의 대가로 태어나며 즐거움은 없고 오직 고통만이 있는 곳이다. 순수한 불교용어 중 하나로 지옥(地獄)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산스크리트 naraka(나라카)의 발음을 그대로 옮겨 쓴 것으로, 본래는 밑이 없는 구멍을 뜻한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일반용어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극한 상황’을 이르는 말로 바뀌었으며, 지옥을 뜻하는 말로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어려운 곤경에 처했을 때 흔히 ‘나락에 떨어졌다’또는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고 표현한다.

나무(南無)

부처님, 보살 등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며 귀의하는 것이다. 산스크리트어 나마스(namas)의 음역어로 나모(南牟), 나막(那謨), 나마(那摩), 납막(納莫) 등이라고도 하며, 경례(敬禮), 공경(恭敬), 귀경(歸敬), 귀례(歸禮), 귀명(歸命), 귀의(歸依), 신종(信從) 등으로 의역한다. 예경의 대상에게 귀의하고 믿고 따른다는 뜻으로 사용하는데, 나를 구제해 주실 것, 나를 제도해 주실 것, 대상을 향해 무릎을 꿇는 것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나무삼보(南無三寶, namo-ratna-trayāya)는 불(佛)·법(法)·승(僧) 삼보에 귀의한다는 뜻이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묘법연화경(南無妙法蓮華經) 등과 같이 부처님의 명호나 경의 이름 앞에 나무를 붙여서 그 부처님이나 경에 귀의한다는 뜻을 나타낸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은 아미타불에게 귀의한다는 뜻이다. 여섯 글자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육자명호(六字名號)라고도 한다.

노파심(老婆心)

할머니가 손자를 돌보듯 친절하고 자세하게 가르치는 마음을 말한다. 노파심절(老婆心切), 파심(婆心)이라고도 하며 자비심의 극치를 담고 있다. 노파는 간절하고 자상하게 학인을 이끄는 스승에 비유된다. 노파심이 간절하였다는 것은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는 뜻이다. 선종의 문헌에 쓰이는 노파심은 일반적 개념의 친절하고 세세한 마음이 아니라 친절하고 자세한 방편으로 선법의 핵심을 드러내는 말로 사용된다.

늦깍이

늦게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나이가 들어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만학(晩學)비구, 만출가(晩出家) 등이라고도 한다. 상대어는 올깍이로 어린 나이에 머리를 깎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어린 나이에 승려가 된 사람을 가리킨다. 다른 말로 동진출가(童眞出家), 동자삭발(童子削髮) 등이라고도 한다. 그 뜻이 나이가 많아서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나 남보다 늦게 사리를 깨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다반사(茶飯事)

항상 있는 일이려니 하는 뜻이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 심상다반(尋常茶飯), 가상다반(家常茶飯) 등이라고도 한다. 일상의 흔하고 당연한 일을 차 마시고 밥 먹는 것에 비유한 말이다. 일상의 평범한 생활과 행주좌와(行住坐臥)하는 온갖 행위 그리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온갖 광경에 진실이 구현되어 있으며, 이 일상을 떠나서 별도의 도는 있지 않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와 맥을 같이하여 쓰이는 대표적 용어 가운데 하나이다.

다비(茶毘)

시신을 태워서 그 유골을 매장하는 장법(葬法)이다. 불교가 성립되기 이전부터 인도에서 행해오던 장법이다. 이 법에 의해 석가모니도 그 유체를 화장하였는데, 그 이래 다비는 불교도(佛敎徒) 사이에 널리 행해졌으며,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국 ·일본 등으로 전래됨에 따라 이 장법도 중국 ·한국 ·일본 등에서 널리 행해지게 되었다.

대중(大衆)

여러 계층의 많은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불교 경전에는,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이르셨다’거나 ‘부처님께서 기원정사(祈園精舍)에 계실 때 대중을 위해 설법하셨다’는 말이 자주 나온다. 또 불교에서는 신도들을 일컬을 때 사부대중(四部大衆)이니 7부중(七部衆)이니 하는 말을 쓰는데, 사부대중은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 등 출가하였거나 출가하지 않은 남녀 신도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고, 대중은 출가 여부에 관계없이 부처에게 귀의한 신도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독송(讀誦)

경전을 소리 내어 읽거나 외우는 일이다. 비구가 닦아야 할 두 가지 수행 방식(二學) 가운데 선사(禪思)와 함께 꼽힌다. 경문을 보고서 명확하게 읽는 것을 독(讀), 경문을 보지 않고서도 외움에 막힘없이 통하는 것을 송(誦)이라고 하며, 경문을 익혀 뜻을 이해하는 것을 독, 소리 내어 읊어 정신적 풍모를 쌓는 것을 송이라고 한다. 경문을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읽어야 하고, 그 뜻을 기억하여 잊지 않고자 한다면 외워야 한다. 독송은 경문을 익히는 원인이고 수지(受持)는 경문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결과이다. 독송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경문을 눈으로 읽으면서 그 이치를 마음으로 비추어 보는 묵독을 간경(看經)이라 하며, 불전 앞에서 독송하는 것도 간경이라 한다. 소리 내어 경문을 독송하는 것은 송경(誦經) 혹은 풍경(諷經)이라고 한다.

돈오돈수(頓悟頓修)

단계를 거치지 않고 깨달음과 수행을 대번에 완성한다는 견해 또는 그 방법을 칭한다. 선불교에서는 단박에 깨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점차적 단계나 특별한 방편을 쓰지 않고 단박에 깨닫는 것을 ‘돈오(頓悟)’라고 하고, 이 깨달음과 동시에 수행의 공덕을 완성하는 것이 ‘돈수(頓修)’이다. ‘돈’은 본질적으로 깨달음과 수행 두 측면에서 절차와 단계를 허용하지 않는 특수한 방법을 뜻하는 말이다. 절차와 단계를 거치지 않고 자기의 본성을 ‘돈오’하는데, 그것이 수행의 완성이기도 하므로 ‘돈수’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

선종에서 단번에 이치를 깨우친 뒤 오랜 번뇌의 습기를 제거해 가는 수행법이다. 돈오(頓悟)는 단박에 깨치는 것이고 점수(漸修)는 점진적 수행을 가리킨다. 이치를 먼저 깨친 뒤에 오랜 번뇌의 습기(習氣)를 제거하여 가는 것으로, 당나라 때 선승 출신으로 화엄종의 제5조가 된 규봉 종밀(圭峰宗密, 780~841)이 제시한 수행방법론의 하나이다. 그는 돈오점수를 ‘해오(解悟)―점수(漸修)―증오(證悟)’의 단계적 수행방안으로 설명했다.

돈점(頓漸)

교법의 전달이나 불도의 깨달음이 단박에 이루어지는가, 혹은 단계를 밟아 차례로 이루어지는가 하는 방법에 대한 용어이다. 돈(頓)과 점(漸)은 교법과 수행의 두 가지 측면에서 논해진다. 먼저 교법과 관련해서는 돈교와 점교로 나눈다. 돈교는 오랜 수행을 말미암지 않고 곧장 성불할 수 있다고 설하는 가르침이다. 점교는 오랜 수행을 말미암아 점차 깨달음에 도달한다고 설하는 가르침이다. 기타 화엄종의 오교(五敎)나 천태종의 화의사교(化儀四敎)에서도 돈교와 점교를 논한다. 이는 청중의 근기에 따른 방법상의 차이이다.

두타행(頭陀行)

의식주에 관한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닦는 수행을 일컽는다. 산스크리트 원어는 ‘흔들어 떨어 없애다’라는 뜻으로 심신의 때와 번뇌를 제거하는 것을 이른다. 즉 의식주(衣食住)에 대한 탐착을 버리고 심신을 수련하는 수도행을 말한다. 두다(杜茶), 두다(杜多), 투다(投多)라고도 음역한다. 뜻으로 번역하여 닦음(修治) 또는 버림(棄除)이라고 한다.

두타행 열두 가지를 12두타행이라고 하는데 다음과 같다.
① 고요한 곳 아란야에 거처하며 오욕을 멀리한다.
② 탐욕과 근심하는 마음을 버리기 위해 늘 걸식을 한다.
③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걸식한다.
④ 하루 한 끼만 먹는다.
⑤ 적절히 먹는다.
⑥ 오후가 지나면 더 이상 먹지 않으며 과즙이나 단물도 먹지 않는다.
⑦ 헌 옷을 기워 입는다.
⑧ 삼의(三衣)인 승가리(僧伽梨: 중의), 울다라승(鬱多羅僧: 상의), 안타회(安陀會: 내의)만 입고 여벌의 옷을 소유하지 않는다.
⑨ 무상관(無常觀)을 닦기 위해 무덤 곁에서 산다.
⑩ 편한 곳이 아닌 나무 아래에서 쉬며 부처의 구도를 생각한다.
⑪ 나무 밑은 습기나 벌레 등의 폐해가 있으므로 한데에 앉아 마음을 지혜롭고 깨끗이 하며 공을 관한다.
⑫ 앉기만 하고 드러눕지 않는다.

득도(得度)

생사고해를 건너 피안에 도달하는 것,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것을 뜻한다. 도(度)를 얻는다는 말로, 교화를 통해 어리석음을 없애고 피안(彼岸)으로 건너감[渡]을 뜻한다. 여기서 도(度)란 바라밀다(波羅蜜多, pāramitā)를 의역한 것인데, 산스크리트어 파람(pāram)은 ‘피안에’라는 의미이고 이타(ita)는 ‘도달하다’라는 말이다. 즉 바라밀을 닦아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차안(此岸)에서 보리열반(菩提涅槃)의 피안으로 갈 수 있음을 나타낸다. 바라밀다는 도무극(度無極)으로도 번역되는데, 이는 ‘가장 훌륭한 것, 완전한 것(parama+tā)’을 뜻한다. 따라서 육바라밀(六波羅蜜) 가운데 지혜바라밀(智慧波羅蜜)은 ‘지혜의 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일반적으로 전자의 해석을 따른다. 중국에서는 출가 제도를 정비하기에 이른다. 이때 재가자가 출가하여 승적을 받게 된 경우를 득도라고 불렀다. 출가가 깨달음으로 가는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에, 득도라 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출가하여 불전을 공부하고 불도 수행 후에 스승의 추천을 받아 경전 시험을 치르고 공식적으로 스님이 되는 것을 시경득도(試經得度)라 하였다.

마구니

‘마의 군대’를 의미하는 마군에서 변음한 말이다. 수행과 깨달음을 장애하는 마라(魔羅, māra)를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마라의 군대를 마군(魔軍)이라 이름하고, 이것을 달리 불러 마구니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마구니(魔仇尼)라는 한자를 독음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백용성대종사총서(白龍城大宗師叢書)』 중 『선문촬요(禪門撮要)』에는 “수음이녹아지고저하매 열까지마군이가나는 것” “이것은큰아만마군니가 붙은 것이며”라는 문장이 있다. 이것으로 볼 때 마구니라는 말은 ‘마군이’와 ‘마군니’를 다르게 부른 것으로 보인다. 마라는 선한 업을 짓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악마(惡魔)·살자(殺者)·탈명(奪命)·장애(障礙) 등으로도 번역된다. 마(魔)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내마(內魔)와 외부 환경에서 오는 외마(外魔)가 있다. 마군은 마(魔)를 인격화한 것이다.

만다라(曼茶羅)

최고의 깨달음의 본질, 또는 그것을 형상으로 그려 낸 것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만달라(maṇḍala)의 음역으로 만타라(曼陀羅), 만나라(曼那羅)라고도 하며, 단(壇), 단장(壇場) 등으로 의역한다. 원형이나 방형으로 땅을 구획하므로 만다라라 부르며, 그 안에 제불과 보살이 가득하다고 인식하여 취집(聚集)이라 하고, 제존(諸尊)이 둥근 바퀴처럼 보문(普門)의 대일여래를 둘러싸고 중생을 보문에 들게 한다 해서 윤원구족(輪圓具足)이라 하며, 우유를 정제해 제호(醍醐)를 만든다는 만다(maṇḍa)의 뜻에서 무과상미(無過上味)라고도 한다. 최고의 깨달음의 본질을 얻은 것이라는 의미이다. 또는 이와 같은 불화(佛畫)를 뜻하기도 한다.

면목(面目)

불교에서 참모습을 일컫는 의미이다. 흔히 체면이라는 개념으로, 얼굴의 생김새, 즉 용모를 일컫는 말로 쓰이나 본래는 불교에서 나온 용어이다. 깨달음의 경지에서 나타나는 마음의 본성, 즉 참모습을 뜻한다.

명복(冥福)

죽은 뒤 저승에서 받는 복을 말 한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고 많이 쓴다.

무진장(無盡藏)

엄청나게 많아 다함이 없는 상태를 뜻한다. 양적 질적으로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불교에서는 덕이 광대하여 다함이 없음을 나타내는 말로 쓰인다. 직역하면 ‘무진(無盡)’은 다함이 없다는 뜻이고 ‘장(藏)’은 창고이므로 ‘다함이 없는 창고’라는 뜻이 된다. 무진은 또한 잘 융화되어 서로 방해함이 없는 상태를 설명하는 말로, 원융무애(圓融無碍)와 같은 의미로도 쓰인다. 《유마경》〈불도품〉에서는 빈궁한 중생을 돕는 것은 무진장을 실천하는 것이며, 보살은 가난하고 궁한 자들에게 무진장을 나타내 그들로 하여금 보리심을 생기게 한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다함이 없는 덕을 지니고 있음을 비유해 무진장이라 한다.

묵인(墨印)

“먹으로 새겨 두다”의 뜻으로, 먹글로 전수 받은 불법을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이다. 이는 여러단계로 구분되는데, 부처님에게서 친히 수지불망(受持不忘)하는 단계, 고승에게서 여러 스님들과 함께 수지불망하는 단계, 중생과 함께 많은 스님에게서 듣는 단계 등으로 나뉜다.

불가사의(不可思議)

마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오묘한 이치를 뜻한다. 본래 불교에서 말로 표현하거나 마음으로 생각할 수 없는 오묘한 이치 또는 가르침을 뜻하며,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놀라운 상태를 일컫기도 한다. 《화엄경》에 ‘부처의 지혜는 허공처럼 끝이 없고 그 법(法)인 몸은 불가사의하다’는 말이 나온다. 또 이 경전의 〈불가사의품(不可思議品)〉에 따르면 부처에게는 불국토(刹土), 청정한 원력(淨願), 종성(種姓), 출세(出世), 법신(法身), 음성, 지혜, 신력자재(神力自在), 무애주(無碍住), 해탈 등의 열 가지 불가사의가 있다고 한다. 부처의 몸이나 지혜·가르침은 불가사의하여 중생의 몸으로는 헤아릴 수 없다는 말이다.

사고팔고(四苦八苦)

고통에 관한 네 가지 종류[四苦] 혹은 여덟 가지 종류[八苦]를 함께 말한다. 네 가지 종류(四苦) 혹은 여덟 가지 종류(八苦)의 고통이다. 네 가지 고통은 생(生)·노(老)·병(病)·사(死)이고, 여덟 가지 고통은 앞의 네 가지 고통에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취온고(五取蘊苦)가 추가된 것이다.

사리(舍利)

붓다나 고승(高僧)의 유골을 칭한다. 산스크리트어 사리라(śarīra)는 육체나 시신(屍身)을 뜻하는 말로 설리라(設利羅)라고도 음역하고, 신(身), 신골(身骨) 등으로 의역한다. 원래 붓다의 유골을 가리키는 말로 불골(佛骨), 불사리(佛舍利) 등이라고도 하였다. 후대에 이르러서는 고승을 화장한 뒤에 유해에서 발견되는 구슬 모양의 결정체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이게 되었다.

사바세계(娑婆世界)

참고 견뎌야 하는 세계를 말한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로, 참고 견뎌야 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사바(娑婆)는 사하(沙訶), 색가(索訶)라고도 하며, 뜻으로 번역하면 인토(忍土), 감인(堪忍), 능인(能忍)이다. 탐(貪)‧진(瞋)‧치(癡) 삼독(三毒)을 겪어야 하며, 오온(五蘊)과 육근(六根) 등에서 비롯되는 십악(十惡)이 넘쳐 고통을 참고 견뎌야 하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석존의 설법이 미치는 현실 세계로서 곧 삼천대천세계를 말한다. 중생들이 고통을 감내하지만, 불보살도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고통을 감내하면서 무외(無畏)와 자비를 드러내는 세계가 사바세계이다.

사물(四物)놀이

사물이란 원래 절에서 불교의식 때 쓰인 법고(法鼓), 운판(雲板), 목어(木魚), 범종(梵鐘)의 네 악기를 가리키던 말이었으나 뒤에 이것이 북,징,목탁,태평소로 바뀌고 지금은 다시 북,장구, 징, 꽹과리의 네 민속타악기로 바뀌어, 일반적으로 사물놀이라고 하면 이 네 종류의 악기로 연주되는 음악과 그 음악에 의한 놀이를 가리키게 되었다.

산화(散華)

① 어떤 대상이나 목적을 위하여 목숨을 바침 ② (불교) 꽃을 뿌리며 부처님을 공양하는 일 ③ (식물) 꽃은 피어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꽃 등을 뜻한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산화(散華)는 조국을 위하여 순국(殉國)한 분을 칭송 할 때의 첫 번째 뜻이다. 그렇지만 이것은 두 번째의 뜻이 一般化하면서 은유적으로 의미가 확대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원래는 부처님을 찬양하고 공경하는 뜻에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행위, 곧 꽃을 뿌린다는 단순한 의미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것이 확대되어 첫 번째 뜻으로 발전했고, 또 특수화하여 세 번째 뜻도 생겼다.

살림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한다. 산림(産林)이라고도 하지만 〈우리말 유래 사전〉에는 불교용어인 산림(山林)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산림은 절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을 말하며, 이 말이 절의 재산관리만이 아니라 일반 여염집의 재산을 관리하고 생활을 다잡는 일까지를 가리키게 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절에서 살림을 맡은 스님은 원주라고 하여 그 책임을 귀하게 여겼다.

삼계육도(三界六道)

중생이 지은 업에 의해 생사윤회하는 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모든 중생이 자신이 지은 업에 의해 생사윤회하는 세계를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삼계(三界)’는 윤회의 세계를 세 범주로 총괄한 것으로 욕계(欲界, kāmadhātu), 색계(色界, rūpadhātu), 무색계(無色界, arūpadhātu)를 가리킨다. 욕계는 일반적으로 음욕, 색욕, 식욕 등의 욕망이 강하게 작용하는 영역으로 다시 육도로 구분된다. ‘육도(六道)’는 지옥(地獄, niraya), 아귀(餓鬼, petti­visaya), 축생(畜生, tiracchāna­yoni), 인간(人間, manussa), 수라(修羅, asura), 천상(天上, deva)의 영역이다. 육도는 각각 고통[苦, dukkha], 탐(貪, rāga), 치(癡, moha), 일상심, 진(瞋, dosa), 지족(知足)의 업에 따른 과보의 영역을 나타낸다. 색계·무색계는 선정 영역이다. 색계는 심(尋)·사(伺)·희(喜)·락(樂)의 초선(初禪), 희·락의 이선(二禪), 락의 삼선(三禪), 사념청정(捨念淸淨)의 사선(四禪)이다. 무색계는 사유를 통해 도달하는 선정 영역으로 공무변처(空無邊處), 식무변처(識無邊處), 무소유처(無所有處),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이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삼계윤회 혹은 육도윤회라는 말은 삼계와 육도가 불교적 업보론 혹은 인과법칙과 관련된 것임을 보여 준다. 윤회(輪廻, saṃsāra)론은 전생에 지은 업(業, karma)에 따라 현생이 결정되는 과정을 설명함으로써 현생에서 인과법칙을 유지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삼귀의(三歸依)

불·법·승 삼보(三寶)에 귀의하겠다는 다짐의 불교의례를 말한다. 삼자귀(三自歸), 취삼귀의(趣三歸依) 등이라고도 한다. ‘삼보’는 부처님, 부처님의 교설, 불법을 받드는 승단을 말하고, ‘귀의’는 귀명(歸命)이라고도 하며 목숨을 바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을 말한다. 삼귀의는 불교도가 되기 위해 가장 먼저 행해야 하는 의식이기 때문에 삼귀계(三歸戒)라고도 한다.

삼보(三寶)

불자에게 보배와 같은 귀의처 세 곳을 의미한다. 불보(佛寶)와 법보(法寶), 승보(僧寶)를 말하며, 삼존(三尊)이라고도 한다. 불보는 부처님, 즉 불교의 교주로서 불교도가 귀의하고 공양하는 대상이다. 안팎 모든 법의 실상을 깨닫고 이에 의해 중생들을 인도하는 각자(覺者)로서 가장 귀중한 공경과 공양의 대상이다. 법보는 부처님이 스스로 깨달은 진리와 경지 또는 그것으로 중생들을 인도하는 가르침인 삼장(三藏)이나 십이부경(十二部經) 등이다. 승보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는 부처님의 제자 집단이다. 이 셋은 거룩한 최상의 위의와 덕을 갖추고 있어 보배와 같으므로 보(寶)라고 한다. 『대지도론』 권57에 따르면 사향사과(四向四果)와 이를 세분한 유학(有學)·무학(無學), 오중(五衆, 비구, 비구니, 식차마나, 사미, 사미니)을 모두 승보라고 한다.

삼매(三昧)

집중명상으로 마음이 하나로 통일되는 경지를 뜻한다. 집중명상으로 마음이 하나로 통일된 상태를 말한다. 산스크리트어 사마디(samādhi)는 ‘함께’를 뜻하는 접두어 ‘상(sam)’과 접점이나 강조를 뜻하는 접두어 ‘아(ā)’와 ‘두다, 놓다’를 뜻하는 어근 ‘dhā’에서 파생한 단어로, 의식이 집중되어 한 가지 마음으로 통일된 상태를 일컫는다. 삼매는 색계(色界) 4선과 무색계(無色界) 4선에서 선정(禪定)과 동일한 상태를 가리킨다. 삼매의 각 단계는 집중의 수준에 따라 더 고양되고 높은 층위의 즐거움[樂, sukha]으로 표현된다.

색불이공(色不異空)

색은 공과 다르지 않다는 뜻으로, 반야경 계통의 경전에서 근본 도리를 드러내는 문구 가운데 하나이다. ‘색(色, rūpa)’은 시각 대상이 되는 물질을, ‘공(空, śūnya)’은 어느 대상이 고정되고 불변의 실체(實體)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르지 않다(不異)’는 말은 색과 공은 각각 별개의 것이 아니라 색의 자성(自性)이 공이기 때문에 이 둘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색즉시공공즉시색 [色卽是空空卽是色]

‘반야바라밀다심경’의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어 널리 알려진 말이다. 색(色)이란 형태가 있는 것, 대상(對象)을 형성하는 물질적인 것, 넓게는 대상 전반을 가리킨다. 첫구(句)는 색이란 모두 공(空)에 불과하다 하였고, 대상을 우리들은 어느 특정한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으나 실은 그것은 광범한 연계(連繫) 위에서 그때 그때 대상으로서 나타나는 것일 뿐이며, 그 테두리를 벗어나면 이미 그것은 대상이 아닌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므로 그 대상에 언제까지나 집착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둘째 구는 그와 같이 원래부터 집착할 수 없는 것을 우리들은 헛되이 대상으로 삼지만, 그것은 공이며 그 공은 고정성이 없는 것인데, 바로 여기에 인간의 현실(존재)이 있다고 설한다. 이것은 일체의 것, 즉 불교에서 말하는 오온(五蘊) 모두에 미치며, 대상(對象:色)뿐만 아니라 주관(主觀)의 여러 작용에 대하여도 마찬가지라고 말할 수 있다.

서원(誓願)

불교적 목적의 성취를 바라는 마음을 일으켜 다짐하는 것을 의미한다. ‘서(誓)’는 스스로 그 마음을 다짐하는 것이고, ‘원(願)’은 뜻한 바를 이루어 내려는 바람이다. 불교에서 서원은 실천 수행의 나아갈 바를 가리키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며, 불도(佛道)를 이루기 위한 실천적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서원에는 불보살의 서원과 중생의 서원이 있다. 불보살의 서원은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는 모든 불보살이 공통적으로 세우는 서원으로, 이것을 총원(總願)이라고 한다. 곧 사홍서원(四弘誓願)을 가리킨다. 둘째는 각각의 불보살이 개별적으로 세우는 서원으로, 이것을 별원(別願)이라고 한다. 즉 석존의 오백대원(五百大願), 약사여래의 십이원(十二願), 아미타불의 전신인 법장비구의 사십팔원(四十八願) 등과 같은 경우이다. 중생의 서원은 죽은 뒤 하늘 세계에 태어나기를[生天] 바라거나,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며 세우는 서원 등 주로 세간적 목적의 성취를 위한 서원을 말한다.

시방세계 (十方世界)

불교에서 전세계를 가리키는 공간 구분개념 사방(四方:동 ·서 ·남 ·북), 사유(四維:북서 ·남서 ·남동 ·북동)와 상 ·하의 열 방향을 나타낸다. 시간의 구분인 삼세(三世:과거 ·현재 ·미래)까지를 통칭하여 전우주를 가리키기도 한다. 대승불교에서는 시방에 무수한 세계가 있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부처가 두루 존재[通在]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시방삼세제불(十方三世諸佛)이라고 하면 전(全)시공간 속에 편재(遍在)하는 부처를 말한다.

선문답(禪問答)

선종에서 선 수행의 일환으로 활용하는 질문과 답변 형식이다. 중국불교에서 6세기 초에 도래한 보리달마(菩提達磨, Bodhidharma, 5~6세기)의 가르침을 비롯하여 그 전승으로 선종이 출현하였다. 달마는 좌선과 침묵으로 일관한 선자(禪者)였지만, 매우 제한적으로 문답을 통하여 제자를 지도하였다. 달마가 활용한 문답은 사물을 직접 가리키며 답변을 요구하는 지사문의(指事問義)의 방법이었다. 이후로 선종이 점차 발전하면서 문답은 스승이 제자를 교화하는 방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수단이 되었다. 선문답은 단순히 선에 대한 문답만도 아니고, 선을 주제로 논변하는 문답만도 아니다. 선문답은 문답하는 양자 가운데 반드시 한 명 이상은 깨달음을 얻은 선지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한 조건에서 선에 대하여 문답하는 것을 선문답이라고 한다.

성불(成佛)

보살이 ‘부처’라는 궁극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보살이 많은 겁 동안 인행(因行)을 만족(滿足)하고 자리이타의 덕을 완성해서 ‘부처’라는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성도(成道), 성정각(成正覺), 작불(作佛)이라고도 한다. 성불의 원어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역사상 부처가 된 이는 석가모니이다. 그는 카필라성의 태자로 태어나 출가수행을 하여 보리수 아래에서 성불하였다. 대승에서는 중생은 본래부터 성불의 인(因)을 갖추고 있다고 하여 모든 중생들의 성불 가능성을 주장한다. 또 성불하려면 셀 수 없을 정도의 오랜 세월 동안 수행해야 한다고 설한다. 대승에서는 보살이 성불하기 위한 행법으로서 십지(十地) 등의 수행계위와 십바라밀행 등을 말하고 있다.

숙연(宿緣)

과거세에 맺은 인연을 말한다. 숙세에 맺은 여러 가지 선악의 인연을 가리킨다. 숙인(宿因) 또는 숙세인연(宿世因緣)의 의미로도 사용된다.

시다림(尸陀林)

불교식 장례의식으로, 죽은 자에게 설법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임종했을 때 그를 위해 설법해 주는 불교식 장례의식을 말한다. 원어는 시타바나(Śīta-vana)이다. 여기서 시타(Śīta)는 ‘차가운’이라는 뜻으로 한(寒)이라고도 번역하며, 바나(vana)는 ‘숲’이라는 의미로 림(林)이라고 한역한다. 즉 의역하면 한림(寒林)이 된다. 이 밖에도 시타림(屍陀林), 시다바나(尸多婆那), 시타벌나(尸陀伐那), 시마사나(尸摩賒那)로도 번역한다.

시절인연(時節因緣)

모든 일에는 적절한 때와 인연이 있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 번역한 『좌선삼매경(坐禪三昧經)』에서 처음으로 확인된다. 『좌선삼매경』에서는 선행과 악행의 과보를 “나무에 아직 잎과 꽃 등이 없더라도 시절인연을 얻으면 잎과 꽃 등을 구족하는 것과 같다.”라고 비유하고 있다.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열반경(涅槃經)』에서도 이 말이 보인다. 경에서는 불성(佛性)에 대해 논하면서, 불성은 상주하지만 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보살의 시절인연이 화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오랫동안 공들여 해 온 일이 하루 아침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십 년 공부 도로아미타불’은 오랫동안 공들여 해 온 일이 하루 아침에 허사가 되고 말았다는 말이다. ‘십 년 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고도 한다.

아귀(餓鬼)

목마름과 배고픔 등 고통으로 가득찬 세상에 사는 중생을 의미한다. 아귀(餓鬼)의 산스크리트 원어 프레타(preta)는 ‘죽은 자’, ‘죽은 자의 영혼’이라는 뜻이다. 의역하면 귀신을 뜻하는 ‘귀(鬼)’이지만 여기에 ‘굶주리다’라는 뜻의 ‘아(餓)’를 덧붙여 아귀라고 번역되었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인간(人間), 아수라(阿修羅), 천(天)의 여섯 단계로 나누어지는 욕망의 세계 중 하위 두 번째에 해당하며 탐욕과 탐욕으로 인한 나쁜 행동[惡業]의 결과로 태어난다고 한다.

아미타불(阿彌陀佛)

서방 극락세계에 머무는 부처님의 이름이다. 서방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하는 부처님으로서, 줄여서 미타(彌陀)라고도 한다. 산스크리트어 아미타(amita)는 ‘특정한 수량이 없는’이라는 의미이다. 명호와 관련해서 구마라집이 번역한 『아미타경(阿彌陀經)』(T12, 347a25-29)에 따르면, 이 부처님은 광명이 한량없고(amitābha) 수명이 한량없기(amitāyus) 때문에 아미타불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무량수경』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과거 오랜 겁 전에 세자재왕(世自在王)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머물 때에 한 나라의 왕이었는데, 위없는 깨달음을 이루겠다는 마음을 내고는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그 이름을 법장(法藏)비구라고 하였다. 세자재왕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수행하였으며 마흔여덟 가지의 수승한 서원을 세웠다. 그 후 끊임없이 공덕을 쌓았고 10겁 전에 서원과 실천이 원만해져 아미타불이 되었으며,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10만억 부처님 국토를 지나간 곳에 있는 극락정토에 머물면서 현재도 설법하고 있다고 한다.

아비규환(阿鼻叫喚)

차마 눈뜨고 보지 못할 참상이라는 말이다. 아비지옥은 불교에서 말하는 8대 지옥 중 가장 아래에 있는 지옥으로 ‘잠시도 고통이 쉴 날이 없다’ 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자들이 떨어지는 곳이다. 즉 부모를 살해한 자, 부처님 몸에 피를 낸 자, 삼보(보물·법물·승보)를 훼방한 자, 사찰의 물건을 훔친 자, 비구니를 범한 자 등이다. 이곳에 떨어지면 옥졸이 죄인의 살가죽을 벗기고 그 가죽으로 죄인을 묶어 불수레의 훨훨 타는 불 속에 던져 태우기도 한다. 야차들이 큰 쇠창을 달구어 입·코·배 등을 꿰어 던지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하루에 수천번씩 죽고 되살아나는 고통을 받으며 잠시도 평온을 누릴 수 없다. 고통은 죄의 대가를 다 치른 후에야 끝난다.

아수라(阿修羅)

불법을 수호하는 반신적 존재들 중 하나이다. 아수라(阿修羅, asura)는 인도 고대 리그베다(Ṛgveda) 시대에는 최고의 신이었으나 후대에 점차로 신과 싸우는 악마적인 존재를 의미하게 된다. 고대 인도에서 데바(deva)는 선하고 친해지기 쉬운 신을, 아수라는 무서운 힘을 갖추어 가까이 가기 어려운 신격을 나타내는 경향이 있었다. 고대 이란에서 아수라에 대응하는 말은 아후라(ahura)인데, 인도와는 달리 데바가 악마가 되고 아후라가 신이 된다. 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최고신은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ā)이다.

언어도단(言語道斷)

어떤 언어로도 표현할 길이 없다는 말로, 분별 의식이 사라진 경지를 뜻한다.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사라진 경지를 뜻한다. 원래는 대승 경전에서 진리를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는데, 선불교에서 적극적으로 차용해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분별하는 의식 작용이 사라진 상태를 뜻하는 심행처멸(心行處滅)과 짝을 이루어 사용되었다. 선어록의 용례 가운데 시대적으로 공안선이 발달한 송나라 때 많이 사용되었고, 『종경록(宗鏡錄)』에서 가장 많은 용례가 보인다.

업(業)

중생의 모든 행위와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초래하는 작용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인간의 모든 행위, 작용을 뜻한다. 인도의 베다에서는 의식행위를 뜻하기도 했고, 자이나교에서는 영혼의 해탈을 방해하는 실체로 여겼다. 그래서 이 업(業)에 의한 속박으로부터 영혼을 해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금욕과 수행을 통해 업을 정화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불교에서는 업의 인과성은 받아들였지만 그 실체성은 부정하였다. 모든 행위는 반드시 선, 악, 즐거움, 괴로움 등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와 같은 업의 개념을 전생과 내생에 이르기까지 확장함으로써 윤회 사상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일반적으로 선한 행위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현재의 괴로움은 과거의 선하지 못한 행동[業]이 원인이 되어 필연적으로 초래된 결과일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실제로 반드시 그렇다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한 개인의 행동에는 자신의 업[不共業]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업[共業] 등 여러 가지 복잡한 인과적 요소가 영향을 끼쳐 다양한 인과관계의 힘으로 다르게 무르익어 가고(vipāka)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업의 종류로는 크게 몸으로 하는 행위작용인 신업(身業), 입으로 하는 행위작용인 구업(口業, 語業), 뜻으로 하는 행위작용인 의업(意業)이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통칭해서 신‧구‧의 삼업(三業)이라고 한다. 이 삼업의 특징으로는 선(善)과 악(惡), 선도 악도 아닌 무기(無記)로 구분할 수 있다. 선한 행위는 악한 행위를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열 가지 악한 행위(十不善道, 十惡業道, 十黑業道)와 이를 행하지 않는 열 가지 선한 행위(十善道)로 나눈다.

업장(業障)

중생이 악업을 지어 생겨나는 장애를 뜻한다. 중생이 몸(身)과 입(口)과 뜻(意)으로 업(業, karma)을 지어, 그 업의 과보로 초래되는 장애로 인해 당하는 온갖 삶의 고통을 말한다. 세 가지 장애(三障) 또는 네 가지 장애(四障) 중 하나이다. 세 가지 장애 중 나머지 두 가지는 번뇌장(煩惱障)과 이숙장(異熟障)이다. 업장은 번뇌로 말미암아 몸과 입, 뜻으로 지어 생겨난 장애이다. 번뇌가 업인(業因)이 되고 업장이 과보를 초래하여 삼악도(三惡道, 三惡趣)에 떨어지게 되므로 업장이라고 한다. 가장 큰 (악)업장은 지옥에 떨어지는 오무간업(五無間業)이다. 오무간업은 어미를 해치고, 아비를 해치며, 아라한을 해치고,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며, 악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등의 다섯 가지이다. 번뇌장은, 탐냄(貪)과 화냄(瞋)과 어리석음(癡)이라는 번뇌가 수행하고 깨달아 해탈하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를 일컫는다. 이숙장에서 이숙은 선악이 아닌 무기(無記)로서 이숙무기(異熟無記)라고도 한다. 이숙무기로 인해 삼악도가 아님에도 불교의 가르침을 듣지 못하는 북구로주(北俱盧洲)나 무상천(無想天)에 나는 장애를 이숙장이라 이른다. 업은 선(善), 악(惡), 무기(無記)의 세 가지가 있고, 과거에 지은 숙업(宿業)과 현재의 현업(現業)이 있다. 선악의 업을 지으면 이것이 인연이 되어 업과가 생긴다. 이와 같이 중생이 고락의 과보를 받도록 인도하는 것을 업도(業道)라고 하는데, 이에는 십선(十善)과 십악(十惡)의 업도가 있다.

야단법석(野檀法席)

떠들썩하고 시끄러운 모습이라는 뜻이다. 《불교대사전》에 나오는 말이다. ‘야단(野壇)’이란 ‘야외에 세운 단’이란 뜻이고, ‘법석(法席)’은 ‘불법을 펴는 자리’라는 뜻이다. 즉, ‘야외에 자리를 마련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라는 뜻이다. 법당이 좁아 많은 사람들을 다 수용할 수 없으므로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듣고자 하는 것이다. 그만큼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석가가 야외에 단을 펴고 설법을 할 때 최대 규모의 사람이 모인 것은 영취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을 때로 무려 3백만 명이나 모였다고 한다.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니 질서가 없고 시끌벅적하고 어수선하게 된다. 이처럼 경황이 없고 시끌벅적한 상태를 가리켜 비유적으로 쓰이던 말이 일반화되어 일상생활에서 흔히 쓰이게 되었다.

여시아문(如是我聞)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뜻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이다. 경전의 첫머리에 나오는 말로서 붓다의 수제자 아난다가 붓다의 가르침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여시아문(如是我聞)은 ‘나는 이와 같이 들었다’라는 뜻으로, 여시(如是)는 경전이 붓다의 말씀이고, 아문(我聞)은 내가 들었다는 것으로 아난다 자신이 직접 들은 교법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의미이다. 아난다는 붓다를 수행하면서 붓다의 설법을 모두 듣고 기억하고 있었기에 다문제일(多聞第一) 제자로 알려졌다. 붓다 입멸 이후 붓다의 설법을 기억하고 이를 합송할 때 아난다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난다가 붓다에게서 직접 들었다는 의미로 모든 경전의 첫머리에 여시아문의 네 글자를 두었다. ‘이와 같이’는 자신이 들었던 법에 대한 믿음을 가리키고, ‘나는 들었다’는 그 믿음을 굳게 지키는 것을 나타낸다.

연기(緣起)

① 여러 사물이 여러 연(緣)에 의존해서 발생하는 것 ② 사원이나 불상 등 여러 사물이 만들어지게 된 역사나 유래 등을 말한다. 연기(緣起)라는 말에서 ‘연(緣)’은 원인이나 조건 등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색채에 대한 인식이 눈과 색채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나고, 냄새에 대한 인식이 코와 냄새를 원인으로 해서 일어날 때, 색채에 대한 인식이나 냄새에 대한 인식은 연기의 결과물이고, 눈과 색채, 코와 냄새는 연(緣)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일상의 여러 사물 곧 유위법(有爲法)이 여러 가지 원인과 조건의 화합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교설이 연기법이다. 불타는 연기를 설명하면서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고, 이것이 발생하기 때문에 저것이 발생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라고 설했는데, 여기서 ‘이것’이 연이고 ‘저것’은 연기의 결과물이다.
연기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십이지연기설이다. 십이지연기는 노사(老死)로 대표되는 고통의 원인을 무명에 이르기까지 추적한 것인데, 무명, 행, 식, 명색, 육입, 촉, 수, 애, 취, 유, 생, 노사라는 12개의 지분을 가지고 고통의 발생을 설명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십이지연기는 『상윳타 니카야(Saṃyutta-Nikāya)』 「고타마경(Gotama-sutta)」(SN 12:10) 등에서 발견되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불교의 여러 학파들은 그것을 중생의 윤회를 설명하는 학설로 이해하였다.

염화미소(拈華微笑)

부처님이 꽃을 드니 가섭이 미소를 지었다는 이야기에 기반한 화두이다. 부처님이 영산회상(靈山會上)에서 꽃을 들어 보이자 대중 모두가 응답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迦葉)만이 미소 지었다는 이야기에 기반해 선종에서 공안으로 제기되는 문제이다. 염화시중(拈花示衆), 세존염화(世尊拈花), 가섭미소(迦葉微笑)라고도 한다. 선종의 조통설(祖統說)에서 가섭을 인도의 초조(初祖)라고 부르는 근거이나 경전상의 전거는 없으며 선종에서 창안하여 『연등회요(聯燈會要)』에 완결된 형태로 전한다. 곧 “세존께서 영산회상에서 꽃을 들어 대중에게 보이시자 대중이 모두 묵묵히 응답이 없었으나 오직 가섭만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세존께서 ‘나에게 정법을 꿰뚫어 보는 눈과 열반의 원만한 마음과 모든 상에서 벗어난 진실한 상 그리고 미묘한 법문이 있다. 그것을 문자에 의존하지 않고[不立文字] 교설 밖에 별도로 전하여[敎外別傳] 마하가섭에게 부촉한다.’라고 하셨다.”라는 대목이 그것이다. 이는 삼처전심(三處傳心) 중 하나로 일반적으로 불립문자, 교외별전 이외에 깨달은 하나의 마음이 또 하나의 마음에 고스란히 전한다는 취지의 이심전심(以心傳心), 심심상인(心心相印) 등을 수반하여 그 선지(禪旨)를 설명한다.

오역죄(五逆罪)

이치에 어긋나는 다섯 가지 무거운 죄를 뜻한다. 다섯 가지의 이치에 어긋나는 무거운 죄를 말한다. 오역죄를 지으면 무간지옥(無間地獄)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는다. 그 죄가 무겁기 때문에 오중죄(五重罪)라고도 하고, 이러한 죄를 지으면 무간지옥에 태어나는 과보를 받기 때문에 오무간업(五無間業)이라고도 한다. 다섯 가지란, 첫째는 어머니를 살해하는 것이고, 둘째는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고, 셋째는 아라한(阿羅漢, 수행자)을 살해하는 것이고, 넷째는 화합승단을 깨뜨리는 것이고, 다섯째는 부처님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다.

옴마니반메훔(oṃ Maṇi Padme Hūṃ)

관세음보살의 반야의 지혜와 가피를 설한 진언이다. 육자진언(六字眞言)이라고 하며, 『천수경』으로 알려진 대비주(大悲呪) 의궤에는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라 한다. 현상을 의미하는 마니(mani, 보석)와 공성을 의미하는 파드마(padma, 연꽃)의 처소격이 어우러져 ‘옴, 연꽃 속의 보석이여, 훔’으로 풀이한다. 제법의 공성을 설하는 반야 사상의 핵심을 나타낸 것이다. 『반야심경(般若心經)』에 근거해 살펴보면 경전에 관세음보살이 설한 반야 사상의 핵심은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으로, ‘현상계를 뜻하는 색(色)이 공하며, 그 공한 진리와 현상계가 다르지 않다’는 것인데 육자진언은 현상계를 상징하는 ‘마니(摩尼)’가 공성의 지혜를 상징하는 연꽃 안에 있다는 뜻에서 연꽃의 산스크리트어인 파드마의 처소격 파드메(padme)를 활용하였다. 즉 육자진언은 모든 현상계가 공성이면서 청정한 자성임을 설한 것이다.

육자진언(六字眞言)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나타내는 여섯 글자로 된 진언을 말한다. ‘옴마니반메훔(Om mani padme hum)’이라는 여섯 글자의 진언을 말한다. ‘육자진언’이란 명칭은 ‘관세음보살 본심미묘 육자대명왕진언(觀世音菩薩 本心微妙 六字大明王眞言)의 줄임말’이며, ‘관세음보살 육자진언’ 또는 육자대명주(六字大明呪)라고도 한다. 진언은 본래 번역하지 않지만, 문자 그대로의 뜻은 ‘연꽃 위의 마니주(摩尼珠)에 귀의합니다’이며 관세음보살을 찬탄하는 진언이다. 밀교에서 육자관(六字觀)은 삼밀관행(三密觀行)의 구체적인 수행법이다. ‘옴마니반메훔’의 여섯 글자를 수행자의 신체와 연결시키는 관법으로, 내 몸 하나하나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보는 진언수행법이다.

외도(外道)

남녀간의 성적인 일탈행위를 말 한다. 세상에서 흔히 쓰이는 뜻은 남며간의 성적(性的) 일탈행위(逸脫行爲)이지만 이 낱말이 처음 쓰인 것은 불교를 외도(內道)라 하고, 불교 이외의 교(敎)를 내도(內道)의 대칭(對稱)으로 외도(外道)라 한 것에서 비롯한다. 외교(外敎), 외법(外法), 외학(外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세월이 흐르면서 사법(邪法)의 의미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변하였다. 梵語로는 tirtaka라 한다.

이심전심(以心傳心)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뜻이다. 어느 날 석가 세존(世尊)이 제자들을 영취산(靈鷲山)에 모아놓고 설법을 하였다. 그 때 하늘에서 꽃비가 내렸다. 세존은 손가락으로 연꽃 한 송이를 말없이 집어 들고[拈華] 약간 비틀어 보였다. 제자들은 세존의 그 행동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가섭만이 그 뜻을 깨닫고 빙그레 웃었다[微笑]. 그제야 세존도 빙그레 웃으며 가섭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정법안장(正法眼藏 : 인간이 원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 번뇌를 벗어나 진리에 도달한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 진리를 깨치는 마음), 불립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 : 언어나 경전에 따르지 않고 이심전심으로 전하는 오묘한 진리)이 있다. 이것을 너에게 주마.” 이렇게 하여 불교의 진수는 가섭에게 전해졌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나 글이 아닌 마음과 마음으로 전하였다고 한데서 유래한다. 불교의 심오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말이다. 현대의 ‘텔레파시가 통한다’와 유사한 의미이다.

이판사판(理判事判)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을 뜻하는 말로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한 말로 쓰인다. 조선시대에는 불교 사원이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했기에 사찰에서 승려들을 그 역할에 따라 이판승과 사판승, 두 부류로 나누었. 본연의 참선을 수행하고자 정진하는 승려는 ‘이판승’이라 불렀고, 이들이 정진할 수 있도록 조정의 노역에 응하고, 절에 찾아와 고기와 술을 내어오라며 갑질하던 일부 못난 유생들의 비위를 맞추고 공양드리러 온 교인들을 응대하는 등, 사찰 유지를 위한 잡일을 도맡아 하는 승려들을 ‘사판승’으로 구분하였다. 그런데 이 이판사판의 뜻이 전이되어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의 억불정책은 불교에 있어서는 최악의 상태였다. 승려는 최하 계층의 신분이었으며, 성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었다. 자연히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인생의 막다른 마지막 선택이었다. 그러니 이판승이 되거나 사판승이 되거나 그 자체로 ‘끝장’이라는 것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

원인에 상응하는 결과로 인과의 도리가 엄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인과보응(因果報應), 인과업보(因果業報), 선악업보(善惡業報)라고도 한다. 원전에는 인과응보라는 용어는 거의 발견하기 힘들고 인과보응이 많이 쓰인다. 행위인 업(業)에 따라 선한 인은 선한 과보를 불러온다는 선인선과(善因善果), 그 반대인 악한 인은 악한 과보를 불러온다는 악인악과(惡因惡果)를 말한다.

인연(因緣)

직접적 원인인 인과 간접적 원인인 연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결과를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을 나타내는 인(因, hetu)과 외부에서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간접적인 원인을 나타내는 연(緣, pratyaya)을 합쳐서 일컫는 말이다. 불교에서 일반적으로 ‘원인’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예를 들어, 씨앗은 나무라는 결과의 직접적 원인인 인이고, 햇빛·공기·수분·온도 등은 나무라는 결과의 간접적 원인인 연이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나무라는 결과를 나타내는 원인이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인연은 경전에 따라서 연기(緣起, pratītya-samutpāda)와 같은 의미로도 사용된다. 인연과 관련하여 ‘인연율(因緣律)’이라는 말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불교의 진리인 연기법(緣起法)을 구성하는 내용 중에 ‘인과율(因果律)’이 있는데, 이는 어떤 행동(業)이라는 원인(因)이 있으면 반응(報)이라는 결과(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인연율이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인을 직접적인 원인인 인과 간접적인 원인인 연으로 나눈 뒤에, 이 인과 연이 화합하여 새로운 결과가 발생한다는 법칙[律]을 말한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만 마음이 만들어 낸 것일 뿐이라는 『화엄경』의 교설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의 작용으로 비롯된 것으로서, 마음이 만들어 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마음 밖에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실차난타(實叉難陀, 652~710)가 번역한 『화엄경』 「승야마천궁품(昇夜摩天宮品)」에 나오는 글귀이다.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359~429)가 번역한 『화엄경』에서는 해당 부분을 “마음이 모든 부처를 만들어 낸다(心造諸如來).”라고 번역하였다.

입적(入寂)

승려의 죽음을 이르는 말이다. ‘고요한 상태에 들었다’라는 의미로 승려의 죽음을 말한다. 입멸(入滅), 원적(圓寂)과 동의어이다. 입멸은 산스크리트어로는 파리니르바티(pariṇirvāti) 혹은 파리니르바야티(pariṇirvāyati)이며, 팔리어로는 파리닙바티(parinibbāti) 혹은 파리닙바야티(parinibbāyati)이다. 열반에 드는 것을 말한다. 입멸도(入滅度), 입적멸(入寂滅)의 줄임말이며, 입열반(入涅槃)‧취멸도(取滅度)‧시적(示寂) 등으로 번역된다.

자비(慈悲)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사랑하는 마음으로 즐거움을 주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을 제거해 주는 것을 뜻한다. ‘자(慈)’와 ‘비(悲)’의 합성어이다. ‘자’는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 있는 것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는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고통을 없애 주는 것이다.

장로(長老)

힌두교 ·불교 등에서 덕행이 높고 나이가 많은 비구(比丘)에 대한 통칭, 또는 소(小)비구가 대(大)비구를 부를 때의 존칭이다.

전도(傳道)

종교적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다. 어떤 도(道), 즉 종교적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는 일이다. 부처님이 처음 설법을 마치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자, 이제 전도를 떠나라…

주인공(主人公)

불교에서 ‘득도한 이’, ‘참된 자아’를 가리키던 단어였다. 사건(事件)이 있고 그 사건으로 이야기가 구성(構成)되는 한 편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언제나 그 사건의 중심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등장인물이다. 주인공이 있음으로써 그 이야기는 흥미진진(興味津津)하고 스릴 넘치는 파노라마를 연출(演出)한다. 그러나 주인공이란 낱말이 속세(俗世)를 벗어나 불교에 오면 아주 재미가 없어진다. 무색(無色) 무미(無味) 무취(無臭)의 진공(眞空)으로 사라져 버린다. 왜냐하면 원래 불교에서 ‘主人公’이란 낱말을 처음 사용하였을 때에는 득도(得道)한 인물(人物)을 가리키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은 외부환경에 흔들리지 않고 번뇌망상(煩惱妄想)에 흔들리지 않는 참된 자아(自我), 즉 무아(無我)를 누리는 자아를 일컫는 말이었다.

지사(知事)

어떤 분야에 일을 책임 지는 것을 말한다.
불교에서는 절의 용무를 맡아보는 것을 말한다.

지식(知識)

“아는 것이 힘”이라는 서양(西洋)의 격언(格言)도 있고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부지런히 옛 것을 갈고 닦으며 알고자 애쓰는 사람입니다.”라는 공자님의 말씀도 있거니와 인간세상은 태어나면서부터 알고자 하는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힘겨운 지적여행을 죽을 때까지 계속한다. ‘지식(知識)’이란 이렇게 ‘앎’을 뜻하는 추상명사(抽象名詞)라고 세상사람들은 알고 있다. 그런데 불교에 오면 이것은 구상명사(具象名詞)로서 실체(實體)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사람’ 우리들 자신(自身)이다. 다시 말하여 ‘지식(知識)’은 아는 사람이니,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이요, 친구요 벗이다. 불교에서 ‘선지식(善知識)’은 ‘불법(佛法)을 갈구하는 착하디 착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다

찰나(刹那)

불교에서 무상함을 나타내는 시간의 가장 짧은 단위이다. 산스크리트어 크샤나(kșaṇa)의 음역으로 가장 짧은 시간의 단위를 말한다. 불교에서는 무상한 시간을 나타내기 위한 이 짧은 순간의 시간을 마음과 동떨어진 독립적인 실체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한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이라는 의미로 염(念) 혹은 일념(一念)이라고 한역되기도 한다. 아비달마불교에서는 물질적인 대상의 최소 단위를 극미(極微, paramāṇu)라고 하고 시간의 최소 단위를 찰나라고 한다. 찰나는 하나의 존재를 획득하는 시간 혹은 하나의 원자에서 다른 원자로 변천하는 순간을 말한다.

찬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서 오른손을 들어서 외친 게송이다. 붓다는 마야(摩耶)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자마자 북쪽으로 일곱 걸음을 걷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세상에서 최상이요, 나는 세상에서 으뜸이요,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른이다. 이것이 마지막 생이다.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이 없다.” 또 한역 『장아함경(長阿含經)』에 따르면, 붓다가 될 것이 예정된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일곱 걸음을 걸은 후 손을 들어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내가 존귀하다. 나는 중생을 생로병사에서 건질 것이다(天上天下 唯我爲尊 要度衆生 生老病死).”라고 외치며, 이는 모든 붓다의 변하지 않는 법이라고 하였다. 탄생게는 붓다가 될 것이 예정된 보살이 태어났을 때 자신의 깨달음을 예언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오직 내가 존귀하다’라는 선언에서 ‘나’라는 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고, 인간은 누구나 붓다가 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고려할 때, 싯다르타 태자로 태어나 깨달음을 얻은 붓다에 한정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고, 깨달음을 얻은 이는 누구나 가장 존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지인(天地印)

석가모니 붓다가 탄생 직후 취한 수인으로, 오른손은 하늘을 향하고 왼손은 땅을 가리키는 모양을 말한다. 붓다가 탄생할 당시 사방 일곱 걸음을 걷고 하늘 위 하늘 아래를 가리키며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이라 설한 데서 천지인(天地印)이 비롯되었다. 천지인은 붓다가 성도하여 동서남북 사방과 위아래 온 우주에서 육도(六道)윤회를 초월한다는 미래의 일을 상징한다.

출세(出世)

보통 세상에 잘 알려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킨다. 참으로 크게 의미(意味)가 변한 낱말이다. 보통 세상에 잘 알려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가리키지만 이 낱말은 불교에서는 아주 다른 뜻으로 쓰인다. 첫째, 불.보살이 중생의 세계에 출현하여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출세(出世)하여 만 사람이 행복(幸福)을 얻는다는 뜻을 감추고 있다. 둘째, 세상의 속연(俗緣)을 벗어나 불도수행(佛道修行)에 전념(專念)하는 것을 뜻한다. 출가(出家)와 같은 뜻이다. 셋째, 선종(禪宗)에서 학행(學行)을 마친 뒤에 은퇴장양(隱退長養)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Buddha-utpada, loka-uttara를 의역(意譯)한 말이다.

타력(他力)

자신의 힘이 아닌 부처님과 보살님이 세운 원력의 힘을 뜻한다. 다른 힘[他力]이란 부처님과 보살님이 세운 원력(願力)을 지칭하며, 불보살의 역량과 가피로 성불하고, 정토에 왕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힘이라는 특징 때문에 타력문(他力門), 타력종(他力宗)이라고도 한다. 자신의 힘인 자력(自力)과 대칭되는 개념이다. 수행과 발심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하면 자력과 타력으로 나눌 수 있는데, 그 난이도에 따라 난행도(難行道), 이행도(易行道)라고 한다. 타력은 다른 힘에 의지해서 구제되므로 비교적 쉬운 까닭에 이행도라고 한다. 근기가 낮은 사람은 타력에 의지해서 성불하기를 발원해야 하며, 반대로 근기가 높은 사람은 자력으로 성불할 수 있다.

탄트라(Tantra)

인도에서 발생한 비밀전승을 특징으로 하는 종교 전통 또는 그 경전을 말한다. 중세기 인도에서 시작된 입문식 지향의 비밀전승 종교 전통 혹은 그러한 전통의 경전을 지칭하는 말이다. 산스크리트어 탄트라(tantra)는 탄타라(坦陀羅), 달틀라(怛特羅) 등으로 음역된다. 탄트라 전통의 교리와 사조를 지칭할 때는 ‘탄트리즘(Tantrism)’이라는 용어도 쓰인다. 탄트라 사조는 전체 인도 전통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쉬바(Śiva) 신을 숭배하는 샤이바(Śaiva)와 불교에서 금강승(Vajrayāna) 혹은 밀교(密敎, Esoteric Buddhism)라는 이름으로 발전하였다. 탄트라의 어원에 대해 샤이바 경전 중 하나인 『카미카가마(Kāmikāgama)』는 ‘베를 짜다(tanoti)’라는 뜻의 동사 어근 ‘탄(√tan)’에서 파생된 말로, ‘진리(tattva)’와 ‘진언(mantra)’을 갖춘 광대한 의미를 정교히 연결하고(tanoti), 윤회로부터 보호해 주기(trāṇaṃ kurute) 때문에 탄트라라고 부른다고 설명한다. 인도 밀교 문헌에서는 탄트라가 상속(相續, prabandha)을 의미한다고 풀이한다.

탐욕(貪欲)

좋아하는 온갖 것에 대해 애착하는 근원적인 번뇌를 말한다. 사랑, 열정, 애착(anunaya)을 뜻하는 말로 좋아하는 것에 대한 격렬한 욕망[渴愛], 집착 등을 의미한다. 경전에서는 탐욕의 대상으로 감각적인 쾌락, 물질적인 소유물, 애인, 명성, 오온(五蘊, pañca-skandha), 이념과 관점(dṛṣṭi) 등을 거론한다. 불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식욕(食慾), 색욕(色慾), 재욕(財慾), 명예욕, 수면욕의 다섯 가지 욕망(五慾)을 들고 있다. 이 모두는 번뇌의 대상이며 증오, 무지, 자만, 질투 같은 괴로움을 일으키고 증폭시킨다. 초기불교에서는 탐욕(貪, rāga), 분노(嗔, dveṣa) 어리석음(癡, moha)을 번뇌로 처음 거론한다. 이 세 가지는 가장 기본이 되는 번뇌이자 다른 온갖 종류의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기 때문에 삼불선근(三不善根) 혹은 삼독(三毒)이라고도 한다. 간략하게 말하면 이 중에 탐욕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한 집착이고 분노는 싫어하는 것에 대한 반감, 혐오 등이다.

투기(投機)

사람들이 돈을 던져 기회를 잡는 것 이다. 불교에서의 뜻은 마음을 열어몸을 던져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으려 한다는 뜻이다.

파계(破戒)

받은 계율을 어기는 것이다. 수계한 자가 계법(戒法)을 따르지 않고 그것을 위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이다. 지계(持戒)의 반대말로, 범계(犯戒)라고도 한다. 다만 계율에도 경중(輕重)이 존재하며, 파계의 범주에 대해서는 다른 입장들이 있다. 『십송률(十誦律)』 권33에서는 “파계란 비구가 바라이(波羅夷)·승가바시사(僧伽婆尸沙)·바야제(波夜提)·바라제제사니(波羅提提舍尼)·돌길라(突吉羅)를 범하는 것”이라 규정하고 있다.

해오(解悟)

이해하여 얻는 깨달음 또는 깨달은 후 닦아 나감을 전제로 하는 지적인 통찰에 의한 깨달음을 말한다. 흔히 증오(證悟), 즉 실제로 증득하여 얻는 깨달음과 상대적인 어휘로 사용된다. 해오가 먼저 깨닫고 나서 이후에 닦는 것[先悟後修]이라면, 증오는 먼저 닦고 이후에 깨닫는 것[先修後悟]이라 할 수 있다. 이 해오는 『화엄경』·『열반경』·『법화경』 등 대승 경전에서도 사용되었는데, 이때의 의미는 ‘이해하고 깨닫는다’는 뜻이다.

해탈(解脫)

모든 번뇌와 속박에서 자유로워져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괴로운 생사를 되풀이하는 윤회에서 벗어난 상태로, 인도의 종교와 철학에서 추구되는 궁극적 목표이다. 해탈로 번역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는 ‘자유롭게 하다, 풀어 주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어근 ‘muc’에서 만들어졌으며, ‘자유’, ‘해방’ 등을 의미한다. 해탈은 욕망(kāma), 이익(artha), 법(dharma)과 더불어 인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해 온 네 가지 가치 가운데 하나로, 이 절대 자유의 경지를 얻는 것은 인도철학의 지배적 관심사였다. 해탈의 경지와 그것을 획득하는 방법은 각 철학 학파마다 다르다.

행각(行脚)

일정한 처소에 머물지 않고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것을 칭한다. 정처 없이 이곳저곳에 잠시 머물며 행하는 수행으로, 선가의 선승들이 석 달 안거가 끝나고 해제를 맞이하면 걸망을 메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수행하는 것이 그 예이다. 이를 비유하여 구름처럼 떠돌고 물처럼 흘러 다닌다고 하여 운수(雲水)라고 한다. 다른 말로 유행(遊行)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선승을 운수승(雲水僧), 운수납자(雲水衲子), 행각승(行脚僧)이라고도 하는데 행각에는 돌아다닌다는 의미가 있다. 행각은 만행이라고도 한다. 육바라밀을 통한 중생 구제의 행을 나서는 것으로, 만행의 길에는 행선(行禪)의 궁극적 의미가 담겨 있다.

회광반조(廻光返照, 回光返照)

마음을 안으로 돌이켜 본래면목을 밝혀내는 행위이다. 본래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 때 허공에 반사되어 밝게 빛나는 모습을 말하는데, 이것이 밖으로 향하던 마음을 돌이켜서 안을 비추어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혀낸다는 뜻으로 전의(轉意)되었다. 회광자간(廻光自看)이라고도 한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밖에서 추구하지 않고, 자기가 본래부터 구족하고 있는 자성을 철저하게 믿고 그것을 구현하기 위하여 조견(照見)하는 행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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