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탐구] 안중근, 그는 왜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 섰는가

우리가 ‘안중근’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보통 그가 한일합병에 앞장선 이토 히로부미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한 훌륭한 애국열사로 알고 있다. 그런데 안중근이 만일 이토 히로부미를 총으로 쏘지 않았다면 그는 어떤 인물로 평가를 받았을까? 역사를 통해 위대한 사람이라고 평가되는 모든 사람들은 완벽하고 대단한 것 같지만 그 이면에는 또 괴기하고 이상한 면모도 있다.

안중근, 그는 왜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는가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안중근’하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외에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안중근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는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 대다수가 '안중근'하면 '이토 히로부미 저격' 외에 알고 있는 것이 별로 없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안중근에 대해 좀 더 알아보자는 것이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지만, 동학농민군도 저격을 했다. 역사적 인물은 늘 탐구대상이라는 것이 상식이다.

안중근의 생애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海州) 동대문 밖 광석동(廣石洞)에서 출생했다. 안중근의 집안은 조선 시대에 있어서는 상류층에 속한 듯 보인다. 그의 할아버지였던 안인수(安仁壽)는 현감 출신이었고 아버지는 진사였다. 안중근은 당시 부와 명예를 소유한 집안 형편이 아주 좋은 양반가문이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3년 전인 1906년, 안중근 가족은 평안도 진남포에서 양옥 한 채를 매입하고 사립학교를 두 개나 세웠다. 대략 이렇게 본다면 안중근이 조선의 특권층 출신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아버지 안태훈은 박영효(朴泳孝)와 어울리면서 교류가 있었지만 갑신정변(甲申政變)이 실패하면서 혹시 잡힐까 청계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안중근을 양육했다. 안중근 아버지 안태훈은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그런데 그가 농민군으로서 맹활약을 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농민군을 때려잡는데 큰 공을 세웠고, 아들 안중근도 이에 합류하여 동학농민군 토벌에 앞장섰다.

안중근이 자라나던 시절은 조선이 사실상 망국의 길에 있었다. 이때 나라는 쇄국과 개화정책의 혼란의 도가니였다. 1884년에 갑신정변이 발발했고 1894년에는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그런데 안중근은 그가 16살이 되는 때 어떻게 동학농민혁명 토벌에 앞장을 섰을까? 일단 그의 유년시절을 살펴보자.

안중근의 유년 시절

안중근의 부친은 갑신정변 사태의 핵심인물인 박영효와 연루될까 집안 살림을 모두 팔아 재산을 정리한 뒤 80명 가까이 되는 대식구들을 이끌고 청계동 산속으로 이사를 했다. 안중근 아버지는 개화세력으로 몰려 잡힐까 은둔하기 위해 청계동으로 왔는데 그곳은 산세는 험했지만 일궈 먹을만한 논밭이 있었고, 자연 풍경이 좋아서 안중근은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안중근은 결코 못 먹고 못 하는 집안이 아니라 조선에서 잘 먹고 잘 사는 대표적인 상류층의 자제로 보면 된다.

그런데 안중근은 자라면서 사냥을 제일 좋아했다. 안중근은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산과 들을 누비고 다녔으며 총으로 짐승들을 사냥하는 것을 즐겼다. 그러니까 공부는 뒷전이고 총 쏘는데 아주 집중했고, 또 일등사격수로 타고난 자질을 보였다. 한편 안중근은 사냥 외에도 말타기와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추기도 즐겼다.

한편 안중근은 의협심 강한 사람이 있다면 가리지 않고 기꺼이 찾아가 어울리는 호탕한 면모도 있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안중근은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안락한 삶을 누렸다. 그러나 안중근이 이렇게 양반가 자제로 해피하게 살 때 조선의 일반 대중들은 개돼지 같은 수준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삶이 피폐해진 일반백성들은 개혁과 변화를 외치면서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켰다. 그때가 안중근이 16살 되던 해이다.

같은 양반이지만 동학도가 된 전봉준, 이를 토벌하는 안중근

동학농민운동은 조선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동학의 가르침에 따라 탐관오리의 수탈로 엄청난 고통받는 농민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이때, 조선이 망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예언까지 퍼지던 때였다. 결국 조선은 이후 망했지만 이미 망조는 그때 들었다. 조선 조정은 동학이 혹세무민을 한다고 창시자 최제우를 잡아다 죽여 버렸다. 하지만 동학은 그 당시 조선말 일반 민심의 대세였다.

조선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깨어 있던 양반들도 동학을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중 전봉준도 그러한 양반들 가운데 한 명이다. 전봉준은 서당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계를 이어 가던 중에 아버지의 죽음으로 접하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 전창혁이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에게 항의했다가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사망을 했다. 결국 전봉준은 1894년 1월 11일 새벽에 조병갑의 횡포를 견디다 못한 농민들과 함께 고부 관아로 쳐들어갔다. 이때 전봉준은 관아에 짱 박힌 곡식들을 꺼내 농민들에게 배급하고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풀어 주었다. 그런데 사태가 이렇게 되면서 문제를 일으킨 군수 조병갑은 아무런 죄가 없다는 식이고, 전봉준은 관아를 때려 부수었다는 죄목을 얻고 도망을 가야 했다.

같은 해 3월 25일에 고부 근처에 있는 백산으로 농민들은 재집결했다. 동학교도들이 농민군을 이끌고 왔다. 기세가 오른 동학농민군은 관군을 무찌르고 앞으로 나아가 4월 27일에는 전라도의 핵심인 전주성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동학농민군이 한꺼번에 몰려들자 전라감사는 전주성을 내주고 튀었다. 사태가 이쯤에 이르자 동학농민군은 기세를 몰아 아예 한성까지 진격할 모습을 취했다.

안중근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이유

이렇게 동학농민운동을 주도한 전봉준과 다르게 일반 양반들은 지금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농민들의 뜻을 몰랐다. 보통 양반들은 아니 상것이나 무지렁이 같은 농민 놈들이 나라를 뒤집는다는 생각이 앞장선 것이다. 동학농민운동에서 주장하는 평등사상이나 탐관오리의 만행에 대한 부당함을 꾸짖기보다는 양반들은 ‘이것들이 감히 반란을 일으켰네’라고 본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안중근과 그 아버지는 대부분의 양반들처럼 기득권 세력의 중심이었다. 동학농민혁명을 조정에 대한 반란이라고 생각했다. 유교에서 가장 으뜸으로 내세우는 충효가 아닌 반란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양반들의 머리에 꽉 차있었던 것이고, 안중근 부자 역시 그랬던 것이다.

뼛속까지 유학자였던 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은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혁명을 반란으로 보고 사람들을 모아 스스로 토벌대를 조직한다. 그리고 이렇게 반란을 일으킨 놈들을 토벌할 민병대를 만들었다. 결국 동학농민혁명은 일본군과 정부군 그리고 안중근 부자가 결성한 양반민병대의 연합군 체제에 의해 완전히 토벌이 되었다. 조선의 정부군과 양반 민병대가 일본군과 협력하여서 일반 백성의 봉기를 진압하는 황당한 일을 보면서 조선의 멸망은 사실상 기정사실로 가게 되었다.

그런데 추후 안중근은 자신이 동학농민군을 토벌한 것에 대해 감옥에서 쓴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 무렵 곳곳에서 동학당이 벌떼처럼 일어나 외국인을 배척한다면서 관리들을 죽이고 백성의 재산을 약탈하였다. 보다 못한 아버지는 사람들을 모아 동학당에 맞섰다.”라고 한다.

안중근이 바라던 세상은 무엇일까

안중근이 아버지와 함께 양반 민병대를 조직해서 동학군 토벌에 참가해서 공을 세웠다는 기록을 보면, 그가 바라던 조선의 개혁은 무엇일까 궁금하다. 안중근은 일반 대중에 의한 사회변화는 거부했다. 안중근이 조선의 애국자로 활동하는 것은 나라에 대한 사랑이지만 일반백성이 들고일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인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안중근이 죽기 직전까지 쓰다 만 미완의 원고인 <동양평화론>에서도 그는 동학군을 용서하지 않았다. 그는 “조선의 좀도둑 동학당”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의 동학농민군 토벌 행위에 대해서는 끝까지 자부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안중근이 일본에 맞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을 했지만 같은 민족인 동학군을 미워했다는 것은 구한말 시대에 있어 우리나라 내부가 스스로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알게 한다. 양반 출신과 농민 출신이 조선의 멸망을 위해서 같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을까? 농민이 못 살겠다고 세상을 바꿔 보자는 판에 일본군과 연합해서 우리 안의 동족을 토벌하는 행위는 별로 변명할 것이 없는 것 같다.

황현의 ‘매천야록’과 박은식의 ‘독립운동지혈사’에 동학당이 보국안민이라는 대의명분은 걸었지만 비행도 많았다는 내용은 있다. “동학당 무리가 각지에 세력을 뻗치고 함부로 살인과 약탈을 감행했는데 그 기세가 대단히 사나웠다. 오랫동안 태평세월을 지낸 백성들은 모두 겁을 먹고 뿔뿔이 도망쳤다.” 그러나 이것이 동학농민혁명의 전부는 아니다. 동학농민혁명에 편승한 도적의 무리들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동학농민군 전체가 나쁜 놈은 아닌 것이다. 개농장에 미친개 한 마리 있다고 모든 개를 죽이자는 논리와 같다. 그렇게 보면 안중근은 미친 개 한 마리 잡자고 모든 개를 다 죽여도 좋다는 생각과 같다. 동학농민군이 강도 잔당과 같다는 논리는 조정에서 동학난을 폄훼하기 위한 일종의 프로파간다라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는가?

동학농민군은 나름대로 철저하게 스스로 자율적 강령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동학 농민군 4대 강령을 보면 이것을 잘 알 수 있다.

첫째, 사람을 함부로 죽이거나 백성의 재물을 빼앗지 말지어다. (不殺人不殺物)
둘째, 충과 효를 모두 온전히 하며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을 편안케 할 것이다. (忠孝雙全 濟世安民)
셋째, 왜적과 오랑캐를 몰아내고 나라의 거룩한 길을 밝힐 것이다. (逐滅倭夷 澄淸聖道)
넷째, 군사들을 이끌고 한양으로 진격하여 권귀들을 모두 멸할 것이다. (驅兵入京 盡滅權貴)

안중근이 밖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를 하나 죽이기보다 안에 있는 동족인 동학농민군을 살렸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또 다른 장을 썼을 것이다. 동학농민혁명이 성공을 해서 한성으로까지 진격을 해서 조선의 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나라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과연 안중근이 생각했던 세상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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