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희 정승은 조선 최고의 엘리트로 너무나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여말선초의 문신 및 정치가였으며 조선의 정승이었다. 조선이 건국되고 태조,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등 조선 개국 이래 다섯 임금을 황희 정승이 모셨다고 하니 정말로 대단한 인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조선의 위대한 정치가였던 그는 역시 돈을 버는 재테크 비법도 역시 범상치 않았다고 하니 그 노하우를 상식적으로 알아보자.
황희 정승의 재테크, 조선 시대에 양반들이 돈 버는 방법
황희(黃喜, 1363~1452) 정승이 재산을 증식하는 재테크 방법은 일부 역사서와 연구에도 언급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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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가 재물이다
황희 정승은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당대 그는 조선의 영의정으로 대단한 정치가였기도 했지만 또한 상당한 재물을 모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런데 황희 정승이 돈을 버는 방법은 바로 노비의 자손을 증식시키는 방식이었다. 노비의 자손을 불려가면서 돈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요새 애완견 암컷 한 마리 사다가 새끼를 많이 쳐서 돈을 버는 방법과 아주 유사하다고 보면 된다.
황희 정승과 노비 재산 증식
황희가 노비를 이용하여 재산을 늘렸다는 기록은 다음과 같은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황희는 생전에 약 1,000명에 달하는 노비를 거느렸던 것으로 나온다.
① 조선왕조실록 기록
세종실록에 황희가 노비를 불려가며 재산을 증식했다는 내용이 간접적으로 나타납니다. “황희가 많은 노비를 거느렸으며, 이들이 농사를 짓고 재산을 늘리게 하였다.” 이 내용은 황희가 단순히 노비를 부린 것이 아니라 노비를 경제적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②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기록
18세기 안정복이 편찬한 역사서 《연려실기술》에도 황희의 경제 활동에 대한 언급이 있다. 이 기록에서는 황희가 노비의 숫자를 늘려 재산을 불렸으며, 이를 통해 막대한 경제적 이득을 얻었다고 나온다.
“황희는 노비를 늘려 그 소출로써 가세를 크게 하였다.”
즉, 황희는 단순한 농업 경영뿐만 아니라 노비 자체를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③ 노비 증식 방식
황희는 노비의 출산을 적극적으로 장려하여 자연적으로 노비 숫자를 증가시키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러한 방법은 조선 시대 지배층이 노비를 통해 재산을 모으는데 자주 사용한 방법이라고 한다.
어떻게 노비로 재물을 모을 수 있었는가?
조선 시대는 노비세습법(奴從母法)이 나라의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노비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라가기 때문에, 여자 노비의 출산을 장려하면 자연스럽게 노비 숫자가 증가했다. 또한 혼인을 통해서도 노비를 증가시켰다. 노비들을 서로 결혼시키고, 그 자녀들이 다시 노비가 되게 하여 노비 수를 자연스럽게 증식되게 한 것이다. 따라서 노비를 활용한 경제 활동으로 짭짤한 이득을 보면서 황희는 단순히 노비를 증가시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농지를 경작하게 하여 경제적 이득을 극대화했던 것이다.
그 당시 특별하게 경영비법을 어디서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투자와 이득에 관한 기본적 원리를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노비를 늘려서 돈을 번다는 기가 막힌 발상은 조선의 경제력 증가에 있어서 나라에 도움이 되고 양반에게는 돈이 되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의 노비와 경제적 이득
황희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노비를 이용해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했다고 한다.
① 노비는 재산이자 노동력
조선 시대에 있어 노비는 단순한 노동력이 아니라 재산의 일부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노비를 많이 보유한 양반일수록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② 노비의 가격(매매가)
조선 시대 노비의 매매 가격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비교적 비싼 가격에 거래가 되었다.
③ 노비의 자식은 모두 노비이다
노비는 모계 세습 원칙에 따라, 노비 여성이 아이를 낳으면 자동적으로 노비가 되었다. 이렇게 양반 사대부들은 이러한 나라법을 이용하여 노비 가계를 형성하고, 이를 통해 장기적으로 노비 숫자를 증가시켰다.
황희가 재산을 형성한 방식 중 하나는 노비의 자식을 늘려 노동력을 증대시키는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가는 “노종모법(奴從母法)”이 있었기 때문에, 노비 여성이 자녀를 출산할수록 노비 수가 증가했고, 이는 곧 막대한 재산 증식으로 이어졌다.
황희의 노비 증식과 조선 사회의 반응
황희가 많은 노비를 보유하고 경제적 이득을 본 것은 조선 시대 양반 계층의 일반적인 경제 전략이었으나, 일부에서는 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다. 특히 사림(士林) 학자들의 비판이 거쎘다. 조선 후기에 등장한 사림파 학자들은 양반들이 노비를 통해 과도하게 사리사욕을 챙긴다고 비판했다. 결국, 조선 후기에는 점차 노비 해방이 이루어지면서 이러한 구조가 무너지게 되었고, 1894년(갑오개혁) 때 공식적으로 노비제가 폐지되었다.
황희 정승이 노비를 통해 재산을 증식한 것은 역사적으로 사실이며,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전형적인 재테크 방식이었다. 어찌 보면 황희 정승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에 따라서 노비를 통해 재물을 모으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를 욕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가 단순히 노비를 많이 보유한 것이 아니라, 노비들의 출산을 장려하여 자연적으로 증가시키는 방식으로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 했다는 것은 매우 주목된다.
황희의 노비 경영 – 황희의 노비 재테크와 역사적 의미
황희 정승은 현실적으로 노비를 통해 부를 축적하는 방법을 터득한 실리적인 양반 정치가였다. 그는 조선 초기 신분제 사회에서 노비를 통해 노동력을 확보하여 거대한 재산을 축적하였으며, 노비의 수를 늘려서 큰 이득을 보았는데 이는 당시 고위 관료들의 전형적인 재테크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시대 노비제도가 그냥 단순한 노동력 제공을 넘어, 경제적·사회적 지배 구조를 유지하는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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