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세종대왕이라는 조선의 성군이 없었다면 한글 창제도 없었을 것이고 인터넷 시대에 아직도 중국문자를 쓰고 있을지 모른다. 세종이 태종의 3남으로 태어났지만 왕위에 오르기까지는 또 다른 비화가 있다. 대충 좋은 말로는 점잖게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한 것으로 아는 사람도 있겠지만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양녕대군 폐위와 세종 즉위에는 또 다른 전모가 있다.
세종대왕 즉위 이면에 숨겨진 양녕대군 폐위 사건 –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으로 알아보는 세종대왕 즉위 이면의 숨겨진 이야기들입니다.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의 인물 됨됨이를 먼저 알아보고 두 형제간에 왕위 쟁탈에 얽힌 썰들을 상식적으로 알아봅니다.

양녕대군(讓寧大君, 1394~1462)
양녕대군은 조선 태종(이방원)과 원경왕후 민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니까 일단은 장남이라는 타고난 위치가 있기에 세자로 먼저 책봉되는 데는 문제가 없었지만, 이후 그의 활동은 왕의 자질보다는 플레이보이의 끼가 더 농후했으니 이 또한 그의 운명이다. 그는 총명하고 문예에 능했으며, 특히 시문과 예술에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격이 너무 자유분방하고 방탕한 생활을 즐겼다는 것이다. 양녕은 어린 시절부터 학문보다는 유희를 좋아했다.
양녕대군이 왕위 계승에서 탈락한 이유
양녕대군이 왕세자로 책봉되었지만 결국 폐세자 되고 말았던 주요 이유는 무엇보다 왕의 자질 부족이다. 그는 방탕한 생활을 좋아하여서 궁궐 밖에서 기생들과 어울리고, 사냥과 연회를 즐기며 왕세자로서의 품위는 별로 따지지 않았다. 양녕대군은 정치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었다. 왕세자가 되면 국정을 수행하기 위한 학문을 닦아야 했지만, 그는 배움에 소극적이었고 조성의 신하들과도 자주 다툼이 있었다.
동생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은 사실 없었다
일썰에는 이렇게 양녕이 방탕하고 놀자판으로 간 것은 일부러 세자 자리에서 물러나기 위한 연막작전이라고도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이것은 확실하지 않다. 훗날 좋게 양녕대군을 평가하려는 썰로 볼 수 있다. 양녕대군이 동생인 충녕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일부러 또라이 짓을 일삼았다고 치자. 그렇다면 충녕대군이 보위에 오른 이후에는 그런 행동을 중단했어야 했지만, 양녕은 취미생활로 음행과 부도덕한 짓을 계속 일삼았다. 따라서 동생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방종, 일탈, 음행을 했다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충녕대군(忠寧大君, 1397~1450, 세종대왕)
충녕대군은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후에 조선 제4대 왕인 세종대왕이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하여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유교 경전뿐만 아니라 천문, 의학,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셋째로 태어났지만 우수한 머리를 갖고 있고 뛰어난 능력의 소유자였다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그런지 일단 그는 왕위에 오르자 한글을 창제하고 과학기술에 있어 많은 발전을 가져왔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다지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는 평을 듣는다.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른 이유
충녕대군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그는 학문적으로도 탁월한 소양을 갖췄고 정치적 능력도 겸비한 인물이라고 본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정치에도 적극 참여하여 태종과 대신들의 신임을 받는 조정에서 양녕대군에 비해 인기가 있었다. 한편 양녕대군이 방탕한 생활로 인해 세자로서의 자격을 상실하면서, 차기 왕위 계승자로 충녕대군이 선정되었다.
태종의 적극적인 후원
태종은 충녕대군이 조선의 안정적인 통치를 위한 후계자가 되는 것이 훨씬 낫다고 판단하여 결국 양녕을 왕세자에서 폐하고 충녕을 새로운 왕의 후계자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1418년, 태종은 스스로 왕위를 물러나면서 충녕대군을 왕위에 올렸다. 이렇게 충녕대군은 왕위에 올라 세종대왕이 되었고, 조선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렇다면 양녕의 또라이 짓은 과연 어느 정도였는가?
양녕대군이 왕세자의 자리에 있으면 얼마나 또라이 짓을 했기에 태종이 그를 내쳤을까?
양녕대군은 아버지인 태종이 차기 왕위 계승자로 자신을 멀리하고 충녕을 신임하는 것에 대해 불안해 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둘째 동생인 효령대군이 혹시나 자신이 두 번째 왕자이니 나에게 떡고물이 오는 것이 아닌가 내심 기대를 했는데 양녕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효령을 찾아가서 이런 말을 전했다고 한다.
양녕, 효령에게 아버지의 뜻이 충녕에 있다고 말하다
<선조실록> 1603년 3월 9일에 따르면 “옛날 양녕대군은 태종의 뜻이 충녕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미친 척했다. 어느 날 야밤에 효령의 집을 찾아가 효령에게 귓속말을 하고 돌아왔다. 다음날 새벽 효령 역시 불가에 입문했다.” 야사모음집 <연려실기술>은 “뒤늦게 깨달음을 얻은 효령이 절간으로 뛰어가 북 하나를 하루종일 두들겼다. 그러니까 자신의 처지도 모르고 왕위를 탐낸 효령은 얼마나 분하고 자책하는 마음이 들었을까 합니다. 효령이 북을 얼마나 두들겼는지 북가죽이 늘어졌다는 썰도 있습니다.
형(양녕)을 까대는 충녕(세종)의 도발
일설에는 태종의 3형제인 양녕, 효령, 충녕의 사이가 좋았다고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요?
형, 찐따 아냐?
정사인 <세종실록>을 보면 사실 양녕대군과 충녕대군은 그리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세자가 매형 이백강(1381~1451)의 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누이(정순공주·1385~1460)에게 ‘충녕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忠寧非常人也)’라고 했다”(태종실록 1414년 10월 26일)는 겁니다. 1416년에 이르면 세자와 충녕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암시하는 말들이 나옵니다. 그해 1월 9일 세자가 종묘에서 제사를 올리려고 옷을 입은 뒤 시종들에게 “내 풍채가 어떠냐”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충녕대군이 “먼저 마음을 바로 잡은 뒤에 용모를 닦으시기 바란다”라고 지적질합니다.
그때 19세였던 충녕이 23세인 형인 왕세자에게 “정신 차리고 용모부터 먼저 바로 하라”는 말을 할 정도면 뭐 이미 대충 분위기가 썰렁합니다. 남자 형제간에 4살 차이면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아무리 형제라도 어려운 관계입니다. 4살이나 어린 충녕이 형에게 이런 말을 했을 정도라면 대충 형을 ‘찐따’로 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 소인배하고 게임이나 하고 있나?
1416년 9월 19일 세자가 할머니의 제삿날에 다른 사람과 바둑을 두었다. 슬그머니 형이 바둑을 두는 모습을 지켜본 충녕대군은 “세자가 간사한 소인배와 놀음놀이를 하는 것도 말도 안 되는데, 하물며 할머니의 제삿날이냐”라고 다그쳤다. 그러자 양녕은 이렇게 말하는 충녕을 보고 “너는 가서 잠이나 자라”라고 합니다. 충녕은 양녕대군이 할머니 제삿날에 바둑을 두는 것에 대해 소인배들과 오락을 즐긴다고 했으니, 지금 말로 하면 한심하게 게임이나 하고 있느냐고 형을 타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형, 여자 따 먹고 다니나?
1418년 5월 11일 결국에 양녕대군이 폐세자가 되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됩니다. 바로 ‘어리(於里) 사건’이다. ‘어리 사건’은 조선왕조에 있어서 왕세자가 양반의 다른 첩을 따 먹은 사건이다. 양녕은 곽선의 첩 어리(於里)라는 여인이 아주 미모이고 춤과 노래도 뛰어나다는 소문을 접하자 어찌 되었든 그녀를 탐하려는 마음이 들었다. 당시 곽선은 물러난 관리에게 관행적으로 제수되는 중추부 부사(副使)로 재직 중이었다. 바로 ‘어리(於里)’라는 여인은 나이 많은 양반의 어린 첩이었는데, 양녕대군이 여자 욕심이 난 것이다.
어리(於里) 사건으로 날라간 왕세자 자리
그 당시 선비 정신에 투철하고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는 조선시대에 있어 다른 양반의 첩을 넘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양녕은 왕세자 된 입장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에 대하여 끓어오르는 음욕을 이기지 못하고 무조건 ‘어리(於里)’라는 여인을 데려오라고 한다. 양녕의 욕심대로 어찌어찌 어리를 궁으로 데려 와 숨기고 매일같이 정을 통하니 소문이 나돌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어리는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게 되었는데 결국은 이를 태종에게 들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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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은 양녕이 민간의 여자를 데려 왔다는 것을 알고 노발대발(怒發大發)하여서 어리(於里)를 출궁 시키고 관련자는 엄하게 처벌했다. 이때 이 사건에 얽혀서 죽은 이들이 있는데, 사실 죽은 놈만 억울하게 된 것이다. 여자를 데려와서 즐긴 놈은 따로 있는데 말이다.
태종이 이렇게 엄격하게 조치를 취하자 양녕은 어리(於里)가 불쌍하다면서 먹지도 않고 잠도 자지 않는 등 나름대로 태종에게 시위를 했다. 그러자 이를 너무 딱하게 여긴 장인 김한로가 자신의 집으로 어리를 다시 데려와서 숨겼다. 이렇게 어리가 장인집에 있자 양녕대군은 몰래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장인집에서 어리와의 밀애를 즐겼다.
어버지는 되고, 왜 나는 안됩니까?
그러나 양녕의 이러한 여리와의 애정 행각은 발각이 되었다. 태종에게 다시 호된 질책을 받고 어리까지 쫓겨나게 되자 세자는 태종에게 항의하는 글을 올렸다. ‘왜 왕은 수많은 후궁을 거느리면서 자신은 한 명의 어리도 거느리지 못하게 하느냐’고 따졌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수많은 여자들을 데리고 살면서 나는 왜 한 명의 여자도 두지 못하게 하냐는 꼬장을 핀 것이다.
“전하의 여인들은 되고, 저의 여인들은 안된다는 말입니까”
“전하의 시녀는 다 중하게 생각하여 받아들이고 신의 여러 첩(妾; 어리와 숙빈)을 대궐에서 내보내니 곡성이 사방에 이르고 원망이 나라 안에 가득 차고 있습니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산동(山東)에 거(居)할 때에 재물을 탐내고 색(色)을 좋아하였으나 마침내 천하를 평정하였고, 진왕(晋王) 광(廣)이 비록 어질다고 칭하였으나 그가 즉위함에 미치자 몸이 위태롭고 나라가 망하였습니다. 전하는 어찌 신이 나중에 크게 효도하리라는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이 글을 읽자마자 태종은 꼭지가 팍 돌았다.
양녕, 이 놈이 필시 미친 게야
아버지는 여자를 많이 둬도 괜찮고 나는 왜 한 명도 안되냐는 황당한 글을 올린 그날 저녁 양녕은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났다. ‘어리’라는 여자에 미쳐서 헤까닥 한 결과는 세자 자리 박탈로 돌아왔다. 사실 세자가 아버님의 아랫도리까지 관여하는 발언은 유교적 태도에 어긋나는 것이고 거의 미친 짓이다.
충녕, 네가 아빠에게 꼰질럿냐
어리 사건이 불거졌을 때 양녕은 충녕에게 “네가 임금에게 고자질한 거냐”라고 쏘아붙입니다. “어리의 일은 네(충녕대군 지칭)가 부왕께 아뢴 게 틀림없다.”(출처: 태종실록 18년(1418년). 5월. 11일), 이쯤 되면 형제간에 막 가자는 것입니다. 결국 ‘어리 사건’으로 양녕과 충녕의 사이가 돌이킬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종이 있었기에 한글도 가능했다
조선역사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한 왕의 업적은 한글 창제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다. 양녕대군이 양념으로 승화하여 찌개의 맛을 더해 조선왕조의 멍청한 왕들 가운데 그래도 제대로 된 왕 하나가 나온 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만일 양녕대군이 그대로 왕이 되었다면 지금 우리는 한자를 쓰면서 생활하고 있을 것이다. 아무튼 세종대왕이 왕으로 즉위하여서 오늘날 우리가 ‘한글’을 쓰게 된 것이다.
아무튼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식으로 인한 부모의 고통은 똑 같은 것 같다. 태종은 양녕의 일탈에 대해 “너 때문에 사형당한 자가 몇 명이고, 죄를 입은 자가 몇명이냐.(因是伏誅者幾人 被罪者幾人), 너에게 죄를 묻지 않았을 뿐이다.”라고 했다. 오죽했으면 태종이 양녕이 아닌 충녕에게 왕위를 물려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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