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 롯데백화점에서 성남 방면으로 가는 대로 주변에 오래된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의 이름은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였지만, 여기에 삼전 나루가 있었기에 그냥 ‘삼전도비(三田渡碑)’라고도 한다.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송파구 잠실동 47번지이다. 그런데 도대체 이 삼전도 비를 놓고 무엇이 문제였나? 문제는 비문의 내용도 그렇지만, 이 비문을 작성한 사람이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는 것이다.
삼전도 비문을 쓰고 두고두고 욕 먹은 사람
1636년 12월 청나라가 조선을 쳐들어왔던 병자호란 시기에 삼전도 비가 건립되었다. 삼전도 비의 정식 명칭은 만주어로 ‘대청국의 성스러운 한의 공덕비(ᡩᠠᡳ᠌ᠴᡳᠩ ᡤᡠᡵᡠᠨ ᠊ᡳ᠋ ᡝᠨᡩᡠᡵᡳᠩᡤᡝ ᡥᠠᠨ ᠊ᡳ᠋ ᡤᡠᠩ ᡝᡵᡩᡝᠮᡠᡳ ᠪᡝᡳ)’, 한문으로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청나라 황제가 청태종 홍타이지이다. 그래서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라고도 칭한다. 비의 적힌 내용은 병자호란과 삼전도의 굴욕을 청나라 입장에서 미화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비의 문장은 누가 작성한 것인가?
삼전도비(碑)의 역사
1637년 2월 14일은 조선의 왕은 물론이고 신하와 백성 할 것 없이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치욕에 떨면서 눈물을 흘린 날이었다. 바로 정축화약이 맺어진 날이다. 정축화약(丁丑和約)을 통해 청과 군신 관계가 맺어졌고, 조선의 두 왕자는 청에 가는 인질로 잡혀 갔다. 이와 함께 청은 청나라 황제의 공적을 칭송하는 비문을 작성하라고 주문을 내렸다. 사실 전쟁에 깨진 조선의 입장에서는 청이 요구하는 것을 모두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인조는 청나라에 항복하러 가면서 남한산성의 정문이었던 남문 대신에 서문으로 나갔고, 왕의 복장도 갖추지 못했다. 남루한 남색 군복을 입고 꾸릿꾸릿하게 청에 항복을 하였다. 여기에 인조는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행했다. 그야말로 굴욕을 얻었으니,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이다.
인조는 땅에 엎드려 대국에 항거한 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청 태종은 신하들로 하여금 조선 국왕의 죄를 용서한다는 칙서를 발표했다. 그러면서 청 태종은 조선이 항복한 이 사건을 대대손손 영원히 기념하라면서 비석을 세우라고 명했다. 그래서 삼전도에 비가 세워진 것이다.
삼전도비의 건립은 청의 일방적인 요구였다. 당시 조선의 인조는 대가리를 땅에 박고 항복한 상황에서 청의 이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청이 원했던 것은 비문 작성을 통해 조선이 확실하게 군신관계로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삼전도에서 굴욕을 당한 인조는 특별명령을 하달하여서 공사를 강행했고 결국 1637년 11월 3일 비단이 완공되었다. 이해 11월 25일에는 청나라 사신이 비단을 조사하고 삼전도 비를 보면서 만족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삼전도 비문을 작성하고 노론에 욕을 먹다
문제는 청나라 황제가 조선에 비를 건립하라고 했지만 막상 문제는 또 있었다. 바로 삼전도비의 비문의 내용을 누가 쓸 것인가였다. 평소에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멸칭하였던 선비 정신을 가진 신하 가운데 정작 청의 황제를 찬양하는 비문을 쓸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인조는 초조했다. 아무도 비문을 작성하려 하지 않자 마음은 급했다. 그래서 인조는 신하들 가운데 이경석, 장유, 이희일에게 비문의 내용을 작성할 것을 명했다.
결국 비문이 만들어지자 인조는 장유와 이경석의 글을 청나라에 보내 허락을 받아내고자 했다. 청나라는 조선이 보낸 비문의 내용에 대해 거듭 트집을 잡았다. 그런데 이경석(李景奭)이 작성한 비문 맨 앞에 ‘대청 숭덕 원년’이라 하여 청의 연호를 먼저 쓰고, ‘삼한에는 만세토록 황제의 덕이 남으리라.’는 표현을 보고 청나라가 씨익 웃은 것이다. 그러니까 비문이 청나라 마음에 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조의 간곡한 요청을 받고 비문을 작성했지만 치욕감에 떨려서 잠도 못자고 비문을 작성한 자신의 손을 후벼 팠다는 썰도 전한다. 그러니까 지식인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글로 아부를 한 꼴이니 그 얼마나 양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모멸감에 치를 떨었겠는가? 하지만 나라가 거의 망할뻔한 지경에서 청나라 요구를 거부할 수는 없고 더욱이 왕이 요청한 것이니 그는 비문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훗날 이경석은 삼전도비문을 썼다는 이유로 죽고 나서도 거친 비판을 받았다.
삼전도 비문을 작성한 이경석에 대해 당시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입에 게거품을 물고 비판을 했다. 송시열은 이경석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등 마치 잡놈 취급을 했다. 그런데 이경석의 삼전도비문은 이렇게 작성자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그 내용에 따른 논쟁도 컸다. 이러한 의견의 대립은 추후 서인 정파가 노론과 소론으로 분립이 되는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노론은 이경석의 행위가 의리상 문제점이 많았다고 비판한다. 반면 소론은 이경석의 비문 찬술은 그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 어쩔 수 없었던 것 아니냐는 입장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의 지식인들은 참으로 쓸데 없는 짓거리에 힘을 낭비하는 것이다. 현실에 닥친 문제를 해결하고 미래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느냐가 아니라 과거에 누가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것에 시비를 거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조선이 발전을 못하고 망한 것이다.
만일 이경석의 입장이라면 송시열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할 말이 많을 것이다.
그러면, 네가 작성해 보라고 말이다.
수이강(壽而康) 사건
송시열은 조선의 성리학의 대가라고 하지만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거린거나 마찬가지다. 원래 송시열과 이경석은 사이가 좋았다고 한다. 또한 송시열을 조정에 추천한 것도 이경석이었다. 그래서 송시열은 한때 한양에서 이경석의 집을 찾아 입을 터는 것을 즐겨했다. 그런데 이후 송시열은 이경석과 윤선도 처벌에 이론이 생겼다 하여 자신의 은인이었던 이경석을 비방하려는 흑심을 품었다. 그러면서 삼전도 비문을 그가 작성한 것에 심히 불만스럽게 생각하였다. 이것도 모르고 이경석이 궤장(几杖)을 받을 때 송시열에게 글을 구하니 “오래 살고 건강했다(壽而康)”라고 써주었다. 그런데 실상은 이것이 이경석을 까는 것이었다.
수이강 사건은 이렇다. 중국에서는 1126년 북송이 금의 대대적인 남침으로 정치적 중심지였던 중원과 화북을 상실하고 강남으로 천도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것이 바로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다. 당시 손적이라는 인물은 정강의 변 때 금태종에게 항복문을 지어 바치었다.
“3리 되는 성이 결국 울타리 같은 수비마저 잃고, 10세를 전해 내려온 태묘도 기어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이제 말이 땀 뻘뻘 흘리며 달리는 수고를 다하려 하는데, 어찌 견양(牽羊)의 요청을 늦추리까(三里之城,遂失籬藩之守;十世之廟,幾為灰燼之餘。既干汗馬之勞,敢緩牽羊之請), “상황께서 죄를 지고 파천하셨으니, 미천한 이 신하가 죽기를 각오하고 명을 청하옵니다(上皇負罪以播遷,微臣捐軀而聽命)”라고,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내렸는데, 이를 주자가 비난했다. 손적 이 사람은 평소에 “천명을 따르는 자는 오래 살고, 천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을 것이다.”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고 다닌 사람인지라 이를 들은 주위 사람이 “그러게, 자네가 오랑캐 조정에서 그토록 ‘천명’을 따른 것이 지극했으니 이리도 오래 살고 건강한 거지(壽而康)”라고 비아냥거렸고, 손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북송으로 쳐들어와 수도 개봉을 함락시키고 황제와 황족들을 모조리 포로로 잡아간 금나라 황제에게 항복문을 지어 바치면서 온갖 미사여구로 금을 찬양하고 송을 깎아내렸고, 주위 사람들로부터 “너는 그렇게 아첨을 하니 참 오래 살고 건강하겠구나(壽而康)”라고 비아냥을 들었다는 손적이라는 인물의 고사를 비유하여서 이경석의 뒷통수를 친 것이다. 이경석의 입장에서는 황당하지만 뒷통수를 맞고 눈깔이 돌아갈 지경인 것이다. 아무튼 왕명을 받아서 삼전도 비문을 작성한 이경석은 뜻하지 않게 두고 두고 욕을 먹은 격이니 이 또한 황당할 것이다.
우리가 역사 교과서를 통해 훌륭한 인물로 알고 있는 송시열은 알고 보면 서인과 노론 당파가 조선 말까지 집권하는 토대를 마련한 작자이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당파 싸움의 토대를 만든 원조이기도 하다. 송시열은 말만 갖고 세상을 논하는 한심한 조선 후기 지식인 시대의 문을 연 사람이다 이렇게 보면 된다.
삼전도비(碑), 이리 저리 굴러다니다가 다시 제자리
삼전도비는 중국 청의 힘이 사라질 것 같은 시기였던 청일전쟁 직후인 1895년에 고종의 명으로 한강에 침수시켜 버렸다. 그러니까 쪽팔린다 이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조선을 강점하면서 삼전도비가 슬며시 다시 꺼내졌다. 1917년 조선총독부는 삼전도비(碑)를 다시 있던 그 자리에 세웠다. 일본이 삼전도비를 꺼내 세운 이유는 조선이 원래 역사적으로 이민족에게 지배받던 열등한 놈들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면서 다시 삼전도비를 없애자는 논의가 있었고 1956년 문교부에서 다시금 땅속에 묻도록 지시했다. 이제 삼전도비는 영영 지구상에서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1963년 서울에 대홍수가 나자 삼전도 비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때 정부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반성하고 되돌아보자는 의미로 원래 있던 곳에서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 그러다가 다시 송파대로가 확장되면서 삼전동의 어린이 놀이터 안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후 다시 원래 위치에 가장 가까운 곳에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면서 2010년 석촌호수 서호 근방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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