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역사에 있어서 영조와 정조 시대를 새로운 중흥기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실질적으로 영조에 관해서는 많은 의혹이 제기된다. 영조는 조선의 21대 왕이다. 그는 1724~1776년간 재위하면서 조선 역대 왕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왕좌를 차지했다. 사람들은 영조가 역경을 딛고 군주의 위상을 찾고 탕평책을 통한 정국 안정으로 조선 후기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했다며 그를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영조에 대해 몇 가지 의혹을 제기하는데, 판단은 철저하게 이 글을 읽는 독자의 몫이다.
조선 영조를 둘러싼 3가지 의혹 – 출생, 독살, 사도세자의 죽음
조선왕조 후반기에 부흥기를 마련했다는 영조, 과연 그는 누구인가? 그리고 그를 둘러싼 의혹은 무엇인가?
영조는 이씨(李氏)가 아닌 김씨(金氏)이다
영조의 출생의 비밀에 있어 그가 정말 숙종의 아들인가? 하는 것이 가장 큰 의혹이다. 영조의 출생에 관한 의혹으로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 김춘택(金春澤)의 아들’이라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도대체 왜 이런 소문이 있었을까?
일단 김춘택이라는 인물에 관하여 알아보자.
숙종의 장인이면서 김만기의 손자였던 김춘택은 당시 조선의 왕가와도 밀접한 인물이다. 그는 숙종의 첫 왕비였던 인경왕후 김씨의 조카이기도 하다. 그런 가문의 배경을 가진 김춘택이 인현왕후 집안과도 상당히 가까워서 나중에 장희빈을 물리치고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영조는 김춘택의 자식이 아닌가?
김춘택(金春澤)이 인물이 출중했나 봅니다. 인현왕후를 복위하는데 장희빈의 오빠 장희재의 처와 간통하여 정을 쌓습니다. 이렇게 장희재의 처와 내연 관계를 갖고 그녀로부터 장희빈의 세력이었던 남인들의 주요 정보를 빼냅니다. 결국 미남계를 통한 김춘택의 책략은 인현왕후 복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김춘택이 장희재의 처만 따 먹은 것이 아니라, 인현왕후와 가까웠던 숙빈 최씨도 그러했으리라는 추측이 난무합니다. 그래서 최숙빈의 자식들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 김춘택의 자식이라는 말들이 떠돌았습니다.
일단 그러한 근거로 이상하게도 영조가 숙종과는 닮은 구석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상 숙빈 최씨가 숙종을 만나기 전에 이미 김춘택과도 깊은 관계였고 사랑을 나눴다는 썰입니다. 이때 숙빈 최씨는 김춘택의 자식을 잉태한 채 대궐로 들어가서 숙종의 자식을 난 것 같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썰은 최씨의 첫아들이 낳자마자 죽었기에 별 의미가 없습니다.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 두 번째로 태어난 자식이 바로 영조입니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숙빈 최씨가 궁에 들어간 상태로 김춘택이 범접하기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실 그 당시에 눈과 귀를 속이고 궁궐을 출입할 정도의 능력을 김춘택이 갖고 있었다면, 이 소문 또한 전혀 배제하기는 어렵다. 왕가와 가까운 김춘택이고, 인현왕후 복귀의 일등공신으로 궁궐 출입은 쉽게 할 수 있었을 것이라 봅니다.
지금 왕은 가짜 왕이다, 이인좌의 난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은 빠르게 회자되었다. 특히 당시 조선의 소론 세력 중에는 이런 소문이 명분을 얻기가 좋기에 시중에 떠드는 자들이 많게 되었다. 드디어 영조가 숙종의 씨가 아니라는 소문을 퍼뜨린 자들은 명분을 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소위 ‘이인좌의 난’이다. 이인좌의 난을 통하여 그들은 “지금 왕은 가짜 왕이다. 지금 왕은 경종 대왕을 독살하고 왕위를 차지한 반역자다. 또 그는 숙종대왕의 아들도 아니다. 그는 왕실의 씨가 아니라 김춘택의 아들이다.“이라는 주장을 했다.
영조의 신체적 DNA가 남 다르다
영조가 숙종의 자식이 아니라는 소문은 한 동안 조선의 안주거리로 올랐지만, 결론적으로 친자확인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던 그 시대라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영조가 아빠인 숙종을 전혀 닳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씨(李氏) 왕들이 골골거리다가 죽었는데 영조는 엄청 장수하고 건장하게 살다 죽었다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유전자가 다른 것 아니냐는 의혹은 떨쳐 버릴 수 없다.
영조가 숙종의 자식인지 아닌지 또한 독자의 몫이다.
경종 독살설
영조가 왕이 되기 위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은 무성했다. 경종은 이씨 왕가의 후손답게 비리비리하였고 골골거렸다고 한다. 이때 경종은 몸이 매우 안 좋았고 이미 환자 같았다고 한다. 따라서 어찌 보면 굳이 독살을 하지 않더라도 단명할 운명의 소유자였겠지만, 좀 더 빠르게 경종을 보낸 게 혹시 영조의 음모가 아니었냐 하는 관점이다.
경종은 장희빈의 소생으로 조선의 20대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경종은 1724년 죽었다. 그런데 이때 이복동생이자 당시 세제 신분이었던 연잉군(영조)에게 당했다는 썰이 돌았다. 진짜 영조가 독살을 했는지 안 했는지와 상관없이 영조는 그 후 왕위에 올라서도 이러한 썰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게장과 생감을 먹고 죽은 경종
경종이 독살당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것은 영조가 실제로 그렇게 하라고 해서라기보다는 궁중의 거대한 권력 암투의 부작용으로 누군가 그러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따른다. 경종 4년(1724년) 8월 20일에 경종은 저녁식사로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먹었다. 그런데 게장과 생감은 한의학에서 이렇게 음식 조합을 하면 매우 나쁘다고 한다. 경종은 게장과 생감을 먹고부터 복통과 설사가 악화되었다고 한다. 경종의 상태가 안 좋게 되면서 곽향정기산과 두시탕, 인삼차를 계속 처방했으나 아무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결국 그는 며칠 뒤 혼수상태에 이르고 결국 죽었다.
여기서 의문은 누가 경종에게 간장 게장과 생감을 식사로 주게끔 하였는가이다. 궁중음식이라면 기본적으로 수라상궁이 있고 왕이 먹을 음식을 체크할 텐데 이렇게 개밥을 주듯 한 것도 의문은 든다. 그리고 식사를 하고 메롱 상태가 되었는데 이후 약은 어떻게 썼길래 경종이 골로 갔나 이다. 아무튼 이때도 죽은 뒤에 부검을 할 수 없는 상태이니 경종은 죽어서도 자기가 어떻게 죽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경종은 평소 지병을 앓다 보니 그냥 오랫동안 병에 시달리다가 밥 먹고 죽은 것이라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의견도 있다.
신임사화(辛壬士禍) 때 주모자들이 경종을 독살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또한 당시 주모자들이 당시 왕세제였던 영조와 가까운 사람들이라는 정황도 알려졌다. 따라서 ‘왕위를 노리던 영조가 끝내 경종을 독살했다’는 소문은 경종이 죽자 일파만파 퍼졌다. 영조 31년(1755)에 나주괘서 사건에서 경종 독살설이 터져 나왔다. 나주쾌서 사건 주범인 신치운은 영조 앞에서 대놓고 게장을 언급했다. 그는 영조가 경종의 암살범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영조가 왕에 오르면서 밀려난 소론과 남인들은 경종이 게장 먹고 죽었다는 것을 정설로 믿었다. 이후 영조 밑에서 승지를 지내기도 한 신치운은 게장을 영조가 줘서 경종이 죽었다는 극언을 했기에 대역죄인으로 잡혀 일가가 모조리 극형을 받는 비극을 맞이한다.
게장과 생감을 준 사람은 연잉군이다
경종이 평소 상태가 안 좋은데 연잉군(영조)이 한번 드시라고 게장과 생감을 줬다는 것에 사람들은 의혹의 눈초리를 보낸다. 질병으로 죽을 둥 말둥하는 형에게 먹기 어려운 게장을 먹였다는 것은 아무리 맛있는 것을 같이 먹자는 형제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여도 조금 이상하다.
경종이 죽으면 누가 가장 큰 혜택을 받는가
경종이 죽으면 바로 연잉군은 왕이 된다. 그리고 노론도 세력을 꿰차는 대박이 터졌다. 처음 세제 책봉부터가 연잉군을 지지하던 노론의 입지가 경종 사후 더욱 커졌다. 신임사화로 인해 노론이 찌그러져 있었는데 자신들이 밀던 연잉군이 왕위를 잇자 그들은 조정을 쉽게 장악하였다. 그래서 경종 독살은 연잉군을 왕위에 올려서 정치적 재기를 노리려고 했던 노론의 공작이 아니었나 하는 후문도 있다.
연잉군이 꼭 경종 독살을 주도를 하지 않았어도 노론이 알아서 움직인 것 일 수도 있다.
사도세자의 죽음
영조 38년(1762)에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위시킨 뒤 뒤주에 가두어 8일 만에 죽인 사건이 있었다. 당시로서도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기에 비상식적인 변괴라고 보고 임오화변(壬午禍變)이라고도 한다. 조선 왕조 역사에 있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알려진 사도세자의 죽음을 둘러싸고 의혹이 짙다.
아버지가 아들을 뒤주에 가둬서 죽인 전대미문의 사건은 동서고금에도 없지만 영조는 그러한 짓을 저질렀다. 권력이 무엇인지, 또는 사도세자가 정말로 정신병자라서 죽여버린 것인지 몰라도 그렇게까지 영조가 격노한 것은 의문이다. 혹자들은 사도세자의 정신병적 증상으로 인한 피해가 컸고 또라이가 되어서 왕가의 체통을 더 이상 훼손해서는 안된다는 영조의 결심이 있었다고도 본다. 그러나 실상 까놓고 보면 사도세자의 죽음에는 정치적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사도세자에 대한 의심
영조는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가 권력을 찬탈하려는 역모를 꾸몄다는 쿠데타 썰을 듣고 돌아버린다. 사도세자가 자신을 물리치고 왕위에 오른다는 망상을 했다면 영조도 역시 정신분열증 증세에 시달린 것은 아닌가 싶다. 사실 사도세자가 왕위에 노린다는 썰은 노론이 기피하는 반대파인 소론이 집권할 것을 우려한 자들의 정치공작의 산물이기도 하다. 노론들은 영조를 갖고 놀아야 하는데 다른 놈들이 세력을 잡는 것을 가장 기피했다. 따라서 노론은 영조의 똥꾸녕을 살살 긁어서 방귀를 뀌게 하고 똥을 싸도록 했다. 결국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놓고 죽이는 빅똥을 조선왕조의 역사 판때기에 싼 것이다.
어쩌면, 영조도 사도세자 못지않은 정신적 문제가 있는 사람일 수 있다.
영조, 살면서 평생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영조의 엄마는 천하고 천한 무수리였다. 숙종이 여자를 취하는 것이 별난 것은 알겠지만, 대체로 궁에서 막일을 하던 궁녀 신분의 장희빈 그리고 그러한 궁녀의 옷을 빠는 무수리 최씨와 같은 여자들을 좋아했던 것은 그만의 특별한 성적 취향일 수 있다. 아무튼 생모가 천한 나인 출신이라는 타고난 근본에 대해 영조는 아무리 왕이었도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고 심한 콤플렉스가 되었을 것이다.
영조는 자신의 출생이 천한 신분이라는 점, 배 다른 형인 경종을 독살했다는 썰, 김춘택의 자식이 아니냐는 의혹 등으로 평생을 콤플렉스에 시달리면서 살았다. 어떻게 보면 영조도 인간적으로 좀 불쌍하기도 하다. 노론들은 영조를 왕위에 올려놓고 겉으로는 굽신거리면서도 속으로는 천한 무수리의 자식을 왕으로 만들어줬다는 우월감의 눈빛을 감추지 않고 즐겼을 것이다. 천하고 어리석은 놈을 왕위에 올려놨으니 노론파들은 자기 세상을 만난 것이나 다름없다. 어찌 보면 조선은 이때가 부흥기라고 하지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조선이 망하는 서막이 열린 것이다.
영조와 관련된 썰들이 의혹인지 또는 유언비어였는지는 그 당시 살았던 조선 백성들이 판단할 문제이지만 역사적 관점에서는 되돌아 볼만한 일이다. 영조를 둘러싼 의혹은 지금도 그 진위를 알 수 없다. 친자확인도 할 수 없고, 시체를 부검할 수 없고, 정신감정을 할 수 없었던 미개한 조선 후기에 일어난 일이지만 의혹은 여전하고 앞으로도 궁금해할 사람은 많을 것이다.
역사는 우연한 일들에 있어 또라이급 인물들이 관여를 하면서 이상하게 전개된다. 그래서 세상이 바뀐다는 것은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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