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개성에 있는 선죽교를 가면 고려말 정몽주(鄭夢周, 1337~1392)에 관한 역사적 사연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선죽교(善竹橋)는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역사적 장소이다. 원래 이 다리는 ‘자하교(紫霞橋)’라고 불렸지만 정몽주가 피살된 후에 선죽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선죽(善竹)’이란 이름은 다리 주변에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랐고, 정몽주의 절개를 상징한다는 뜻에서 붙여졌다. 그런데 아직도 그곳에 정몽주의 핏자국이 남아 있다면 믿어지나요?
선죽교(善竹橋)에 아직도 남아 있는 정몽주의 핏자국
선죽교는 생각보다 아주 작은 아치형 돌다리입니다. 지금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데, 다리 옆에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는 표충비(表忠碑)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정몽주가 죽은 후 조선 시대에는 오히려 성리학의 상징적인 장소로 여겨졌다니 다소 역설적입니다. 선죽교는 지금 북한에서 국보유적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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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주의 최후와 선죽교 암살 사건
때는 고려 말, 나라는 내부적으로 요동 정벌과 권력 투쟁으로 인해 무척 어수선했습니다. 이때 권력의 핵심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와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이방원 부자간의 대립으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정몽주는 고려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는 수호적 인물이었습니다. 당시 정몽주는 망가진 고려의 시스템을 개혁하여 부흥하려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습니다. 특히 그가 바랬던 것은 고려가 비록 어지럽지만 공민왕과 우왕을 보좌하면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몽주의 구상과는 달리 이성계와 그의 아들 이방원(조선 태종)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자는 신진세력이었습니다.
결국 고려의 체제를 수호하는 정몽준과 역서혁명을 도모하는 이성계 및 이방원과는 한 배를 탈 수 없는 형국에 이른다.
하여가(何如歌) 단심가(丹心歌)
1392년 4월 4일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꼬시기 위해 술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이방원은 자신의 의도를 담아 ‘하여가(何如歌)’라는 시조를 한 편 때립니다.
이방원 하여가(何如歌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혀 백 년까지 누리리라”
아방원이 이렇게 대충 사이좋게 잘 해보자는 제안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정몽주에게 고려 체제를 버리고 새로운 왕조 질서를 받아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정몽주는 단호하게 거부하며 ‘단심가(丹心歌)’라는 시조로 답합니다.
정몽주 단심가(丹心歌)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한 마디로 내는 죽어도 고려 임금을 위해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정몽주는 고려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을 맹세하며 이방원의 회유를 거절한 것입니다. 결국 이방원은 정몽주를 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알자 그를 죽이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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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에서 정몽주의 머리통을 철퇴로 날리다
이방원은 정몽주가 결코 자신들의 편으로 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자 그를 제거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방원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정몽주는 선죽교를 건너가야 했습니다. 이때 이방원의 심복인 조영규(趙英珪)가 선죽교 옆에 숨어 있다가 쇠몽둥이로 정몽주의 머리통을 철퇴로 쳐서 암살을 합니다. 허~ 그런데 이방원이 부하를 시켜 암살을 해도 좀 품위를 지키게 하지, 무식하게 철퇴로 때려 죽이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입니다.
이때 정몽주는 죽는 순간에도 “고려 왕조를 위해 죽는 것은 후회 없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정몽주의 시신은 이후 개성 숭양서원(崇陽書院)에 안장되었으며, 후대에 걸쳐 충절의 상징으로 추앙받게 됩니다.
정몽주의 죽음,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
정몽주가 죽자 고려 왕조는 마지막 저항선이 무너지게 됩니다. 그가 이방원의 자객의 손에 죽자 공양왕은 더 이상 의지를 할 곳도 없고 저항도 못하고 그냥 왕위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결국 이성계는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정몽주의 죽음 자체가 고려의 멸망이고, 조선의 건국의 시발점이 됩니다.
조선은 정몽주를 충신의 상징으로 삼다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했는데 역설적으로도 조선 왕조는 정몽주를 “충신의 상징”으로 삼습니다. 조선왕조는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면서 그를 학문적·도덕적 본보기로 삼았습니다. 또한 정몽주의 충절을 강조하는 정치 이념을 발전시켰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조선 왕조가 기왕에 새롭게 출발한 마당에 조선이라는 나라에 간신보다는 충신이 절실하게 필요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정몽주는 비록 조선 건국의 걸림돌이었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 그를 주춧돌로 삼아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 본 것입니다.
선죽교, 아직도 정몽주의 핏자국은 마르지 않았다
선죽교는 그냥 단순한 돌다리가 아니라, 새로운 왕조 교체의 상징이며 충신과 권력의 갈등을 보여주는 역사적 현장입니다. 한 마디로 정몽주의 선죽교 암살은 고려의 몰락과 조선의 건국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조선에서 정몽주의 충절은 오히려 유교적 이상을 구현하는데 있어 모범 사례가 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바로 선죽교의 돌다리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핏자국이라고 하는 무늬가 아직까지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죽교에 있는 이 자국을 보고 정몽주의 핏자국이 아직도 남아 있다고 합니다. 우연인지 또는 알 수 없지만 다리의 한 가운데 벌겋게 핏자국 무늬는 선죽교의 역사적 현장을 더욱 실감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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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 위치
현재 선죽교는 북한 개성에 위치해 있으며, 아직도 중요한 유적으로 보존되고 있습니다. 정몽주의 나라를 지키려는 충절과 이방원의 현실 정치 사이에서 선죽교는 지금도 역사의 교훈과 정치적 선택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장소입니다.
참고로 위의 선죽교 사진은 nBox.com에 저작권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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