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 슬픔에 대하여 – 몽테뉴

슬픔에 대하여,
또는 슬픔에 관하여,

미셸 에켐 드 몽테뉴 (Michel Eyquem de Montaigne, 1533년 2월 28일 ~ 1592년 9월 13일)는 프랑스의 유명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이며 수필가이다. 그는 1533년 2월 28일, 보르도 시장인 아버지 피에르 몽테뉴와 유대인 혈통의 어머니 앙투아네트 드 루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몽테뉴의 증조부 라몽은 훈제 생선과 포도주를 팔던 일개 무역상이었으나, 말년에 부유한 상속녀와 혼인을 하면서 몽테뉴 성을 사들였다.

몽테뉴의 명문으로 알려진 '슬픔에 대하여' 또는 "슬픔에 관하여'입니다.  나는 무엇을 아는가? 라는 질문을 던졌던 몽테뉴는 '슬픔'에 대해 자신만의 느낌을 많은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달한다. 슬픔도 이성으로 승화 시킨 몽테뉴의 '슬픔에 관하여'는 상식이다.

Que sçay-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에세 Essais> 제2권 제12장 레몽 스봉의 변호

슬픔에 대하여

몽테뉴

나는 슬픔이라는 감정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이를 좋아하지도 않거니와 존중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마치 당연한 것처럼 이에 유별나게 호기심을 가지고 존중하고 있다. 그들은 그것으로 지혜, 덕성, 양심을 치장한다. 정말 어리석고 망측한 장식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그럴싸하게도 슬픔이라는 낱말을 악의라는 뜻으로 상용하였다. 왜냐 하면 이는 언제나 해롭고 미치광스런 것이어서, 스토아 학파는 언제나 겁 많고 비굴한 것이라 하여 그들이 말하는 현자들에게 그 감정을 품는 것을 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가 있다. 페르시아의 왕 캄비세스에게 패하여 포로가 된 이집트 왕 프삼메니토스가, 자기 딸이 포로가 되어 노예복을 입고 물을 길어 오기 위해 그의 앞을 지나가는 것을 보고, 주위에 있던 그의 친구들이 모두 울부짖는데도 그는 땅바닥을 응시한 채 말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자기 아들이 또다시 죽음의 길로 끌려가는 것을 보고도 여전히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하중의 하나가 포로들 속에 섞여 끌려가는 것을 보고 나서는 머리를 감싸쥐고 대성통곡하더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최근에 우리나라 공작 중의 한 분에게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샤를르 드 기즈 공은 트리엔트에 있을 때, 자기 집안의 지주요 영광인 맏형의 부음을 듣고, 이어 곧 제2의 희망이던 동생의 부고를 받고도 이 두 개의 충격을 모범적이고 굳건한 마음으로 버티어 나갔지만, 며칠 뒤에 그의 신하 한 사람이 죽으니까 이 마지막 충격에는 그만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고 오열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그가 이 마지막 타격에 비로소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실인즉, 그는 깊은 슬픔에 젖어 있던 터에 충격이 덮쳐 오자 그만 그의 참을성의 한계가 무너져 버린 것이다. 만일 이 이야기에 다음 이야기를 첨가하지 않아도 똑같은 판단이 내려졌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캄비세스가 프삼매니토스에게, 어째서 그의 아들딸의 불행에는 마음이 격하지 않고 신하의 불행에 대해서는 참지 못했느냐고 묻는 말에, “신하의 불행은 눈물로 마음이 표현되지만, 전자의 두 경우는 마음 속을 표현할 모든 한계를 넘었기 때문이오.”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 고대 화가의 착상도 이러한 경우와 비슷할 것이다. 그는 이피게네이아가 희생되는 장면에 참석한 인물들의 슬퍼하는 표정을, 각자가 이 죄 없는 아름다운 소녀의 죽음에 대하여 갖는 관심의 정도에 따라서 그의 예술의 극치를 다하여 그렸지만, 그 소녀의 아버지를 그리는 마당에서는 모든 기교를 이미 다 탕진하였기 때문에 단지 얼굴을 가지고 있는 모습밖에 그릴 수가 없었다. 그것은 마치 그 이상의 슬픔을 표현할 길은 도저히 없음을 말해 주는 것 같다. 바로 그런 이유로 시인들은 저 가련한 어머니 니오베가 아들 일곱을 잃고, 또한 계속 일곱의 딸을 다시 잃었을 때, 그 가혹한 참변을 이기지 못하여 그만 그 모습이 바위로 변해 버린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녀는 슬픔 때문에 화석이 되었다.
-오비디우스-

이것은 우리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도 없는 끔찍한 사건에 압도당할 때 우리가 경험하는, 멍청하니 말문이 막히고 귀가 멍멍하도록 넋을 잃게 될 때의 심정을 묘사하는 것이다.

진실로 슬픔이 극도에 달하면 사람의 혼백은 몽땅 뒤엎어지고, 그 기능은 자유를 잃게 된다. 그것은 우리가 몹시 불길한 소식을 듣고 놀랐을 때, 몸이 얼어붙고 모든 동작이 움츠러들었다가, 눈물과 통곡을 토해 내면 설움이 단번에 터져 나와 묶였던 마음과 몸이 풀려 편안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드디어 슬픔이 겨우 울음에서 길을 열어 준다.
-베르길리우스-

페르디난트 왕 요하네스의 미망인에 대한, 부다페스트 시근처에서 전쟁을 했을 때 이야기이다. 독일군의 대장 라이샤크는 어느 기사의 시체가 실려 오는 것을 보았다. 이 기사가 전투에서 아주 용감했던 것을 보았기에 그는 이 기사의 죽음을 슬퍼하였다. 대장은 다른 사람들처럼 그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그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자기 아들이었다. 이 광경을 보고 모두 울부짖는데도 대장 자신은 소리도 눈물도 없이 서서,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아들의 시체를 응시하다가 마침내는 충격으로 전신이 빳빳이 굳어 버려서 땅에 쓰러지며 그대로 죽어 버렸다.

“속 타는 정도를 말할 수 있는 자는 미지근하게 속 태우는 자이다(페트라르카).”라고 애인들은 말하고,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불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려 한다.

가엾은 신세로다!
사랑은 내 감각도 빼앗아 버렸다.
그대를 한 번 보자, 레스비아여
나는 얼이 빠져 그대에게 할 말도 나오지 않는다.
혀는 굳으며 미묘한 불길이 사지에 뻗는다.
내면의 울부짖음으로 귀는 울리며
겹겹의 어둠으로 광명은 사라진다.

-카롤루스-

이처럼 격하게 타오르는 흥분의 도가니 속에서는 비탄이나 설득은 소용 없는 일이다. 그럴 때에는 마음이 심각한 생각에 잠겨 있고, 몸은 사랑에 녹아 흐느적거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때로는 당치도 않을 때 애인들이 기절하는 수가 있고, 극도의 정열로 기쁨의 절정에서 무감각에 기습당하는 경우도 있다. 마음놓고 실컷 맛볼 수 있는 정열은 평범한 정열에 지나지 않는다.

가벼운 슬픔은 말이 많고, 큰 슬픔은 말이 없다.
-세네카-

뜻밖의 쾌락이 불시에 닥쳐와도 역시 우리들을 놀라게 한다.
내가 가까이 갔을 때, 트로이 군졸들이 사방에서 내게 쇄도해 옴을 보자, 그녀는 혼비백산, 저승의 환상에 억눌린 듯 이 광경에 몸은 얼어붙고 체온은 그녀의 골격을 버리며, 그녀는 실신하여 쓰러졌다가 얼마 후에야 겨우 말문을 열었다.
-베르길리우스-

저 로마의 여인이 칸네의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아들을 보고 기쁜 나머지 충격으로 죽은 일이든가, 너무 좋아서 죽은 소포클레스와 폭군 디오니소스, 그리고 로마의 원로원이 영광스럽게도 자기를 표창했다는 소식을 듣고 코르시카에서 숨을 거둔 탈바의 이야기는 제쳐놓고라도, 지금 이 시대에도 교황 레오 10세가 몹시 바라던 밀라노 함락의 보고를 듣고 너무 기뻐서 열병에 걸려 죽은 예도 있다
-귀치아르디니-

그리고 인간이 아주 용렬하다는 좋은 예로, 변증법 학자 디오도로스가 학교에서, 그리고 군중들 앞에서 남이 제시하는 논법을 전개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몹시 수치스러워 죽은 일 등이 옛사람들에 의해서 지적되고 있다
-플리니우스-

나는 이렇게 심한 감정에 사로잡히지는 않는다. 천성적으로 감수성이 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날마다 이성으로 무디고 두텁게 하고 있었다.

‘슬픔에 대하여’로부터 오는 생각

인간은 원래 슬픈 존재이다. 그래서 태어나면서부터 우는 것이다.

인간의 눈물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다만 슬픔을 나타내는 방식은 사람마다, 문화마다 조금씩 다르다. 몽테뉴는 스스로를 ‘태생적으로 슬픔에 대한 감수성이 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둔한 감수성마저도 이성의 힘으로 더 둔하게 만들려고 몽테뉴는 의도했었다. 격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기 위한 스스로 방어를 취하는 태도였다.

그런데 몽테뉴는 정말로 슬픔에 둔한 사람이었을까? 꼭 그런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슬픔을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리지 못하게 이성으로 문을 닫았을 뿐이다. 몽테뉴는 그냥 슬픔을 향한 금욕주의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몽테뉴의 ‘슬픔에 대하여’라는 글이 냉철하게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애잔한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일 것이다.

상식은 권력이다 nBox.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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