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장년이 된 50대~60대들이 고등학교를 다닐 때 국어책에 실렸던 명수필입니다. 지금은 교과서 개편이 되어서 국어책에서 볼 수는 없어도 늘 마음 한편에 잔잔하게 남아 있는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은 명문장의 총합입니다.
독일의 시인이자 수필가였던 안톤 슈낙(Anton Schnack.1892∼1973)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슬픔의 편린들, 생의 허무감과 우수를 서정시와 같은 느낌으로 적어 간 글입니다. 머리가 좋은 친구들은 한때 안톤 슈낙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의 일부 문장을 달달 외워서 술자리에서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이제는 머리가 희끗해진 친구들을 보는 것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어쩌면 그것이 바로 인생일 것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안톤 슈낙의 명문장이자,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전문을 오늘 음미해 봅니다.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정원의 한 모퉁이에서 발견된 작은 새의 시체 위에 초가을의 따사로운 햇볕이 떨어져 있을 때, 대체로 가을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게다가 가을비는 쓸쓸히 내리는데 사랑하는 이의 발길은 끊어져 거의 한 주일이나 혼자 있게 될 때.
아무도 살지 않는 고궁, 그 고궁의 벽에서는 흙덩이가 이 떨어지고, 창문의 삭은 나무 위에서는 “아이쎄여, 내 너를 사랑하노라……”라는 거의 알아보기 어려운 글귀가 쓰여 있음을 볼 때.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 편지에는 이런 사연이 쓰여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아, 네 소행(所行)들로 인해 나는 얼마나 많은 밤을 잠 못 이루며 지새웠는지 모른다. …….” 대체 나의 소행이란 무엇이었던가? 하나의 치기(稚氣)어린 장난, 아니면 거짓말, 아니면 연애 사건이었을까. 이제는 그 숱한 허물들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없는데 그 때 아버지는 그로 인해 가슴을 태우셨던 것이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언제 보아도 철책(鐵柵)가를 왔다갔다하는 그 종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모, 괴로움에 찬 포효(砲哮),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循環), 이 모든 것은 우리를 더없이 슬프게 한다.
횔덜린의 시, 아이헨도르프의 가곡(歌曲).
옛 친구를 만났을 때, 학창 시절의 친구 집을 방문하였을 때, 그것도 이제는 그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高官大爵), 혹은 부유한 기업주의 몸이 되어 , 몽롱하고 우울한 언어를 조종(操縱)하는 한 시인(詩人)밖에 될 수 없었던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할 때.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 가는 사슴의 눈초리. 재스민의 향기, 이것은 항상 나에게 창 앞에 한 그루 고목이 섰던 나무가 선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공원에서 흘러오는 은은한 음악 소리. 꿈같이 아름다운 여름밤, 누구인가 모래자갈을 밟고 지나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고 한 가닥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귀를 간지럽히는데, 당신은 여전히 거의 열흘이 다 되도록, 우울한 병실에 누워 있는 몸이 되었을 때 ,
달리는 기차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어스름 황혼이 밤으로 접어드는데, 유령의 무리처럼 요란스럽게 지나가는 불 밝힌 차창(車窓)에서 미소를 띤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보일 때.
화려하고 성대한 가면무도회에서 돌아왔을 대, 대의원 제씨(諸氏)의 강연집을 읽을 때, 부드러운 아침 공기가 가늘고 소리 없는 비를 희롱할 때, 사랑하는 이가 배우와 인사할 때.
공동묘지를 지나갈 때, 그리하여 문득 “여기 열다섯의 어린 나이로 세상을 떠난 소녀 클라라 잠들다.”이라 쓴 묘비명을 읽을 때, 아, 그녀는 어렸을 적의 나의 단짝 친구였지.
허구한 날을 도회의 집과 메마른 등걸만 바라보며 흐르는 시꺼먼 냇물. 숱한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 수학 교과서.
오랫동안 사랑하는 이의 편지가 오지 않을 때. 그녀는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편지가 다른 사나이의 손에 잘못 들어가, 애정과 동경에 넘치는 사연이 웃음으로 읽혀지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그녀의 마음이 돌처럼 차게 굳어버린 게 아닐까? 아니면 이런 봄밤, 그녀는 어느 다른 사나이와 산책을 즐기는 것이나 아닐까?
초행의 낯선 어는 시골 주막에서의 하룻밤. 시냇물의 졸졸 흐르는 소리. 곁방 문이 열리고 소곤거리는 음성과 함께 낡아빠진 헌 시계가 새벽 한 시를 둔탁하게 치는 소리가 들릴 때, 그 때 당신은 불현 듯 일말의 애수를 느끼게 되리라.
날아가는 한 마리의 해오라기. 추수가 지난 후의 텅 빈 밭과 밭. 술에 취한 여인의 모습. 어린 시절에 살던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 없고 일찍이 뛰놀던 놀이터에는 거만한 붉은 주택들이 들어서 있는데다, 당신이 살던 집에서는 낯선 이의 얼굴을 내다보고, 왕자처럼 경이롭던 아카시아 숲도 이미 베어 없어지고 말았을 때,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마음을 슬프게 하는 것이다 .
하지만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어찌 이뿐이랴? 오뉴월의 장의 행렬(葬儀行列). 가난한 노파의 눈물. 거만한 인간. 바이올렛 색과 검정색, 그리고 회색의 빛깔들. 둔하게 울려 오는 종소리. 징소리, 바이올린의 G현. 가을밭에 보이는 연기. 산길에 흩어진 비둘기의 깃.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 유랑 가극단의 여배우들.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 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처녀의 가느다란 손, 만월(滿月)의 밤, 개짖는 소리, 크누트 함순의 두세 구절 굶주린 어린 아이의 모습. 철창 안으로 보이는 죄수의 창백한 얼굴. 무성한 나뭇가지 위로 내려앉은 하얀 눈송이 – 이 모든 것 또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저자 : 안톤 슈낙(1892~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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