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 역사 비하인드 스토리, 충녕대군에서 세종대왕이 되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왕 가운데 한 명으로 알려진 조선시대 세종에 관한 이야기 입니다.

세종대왕에 관해서는 우리가 어렸을 때부터 잘 알고 있고 또 앞으로도 인구에 회자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라는 것이 원래 권력자에게 좋은 것만 쓰여지기도 하는 법이고 또한 칭송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오늘은 세종대왕이 어떻게 왕위에 올랐는지 알아봅니다. 역사를 보면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도 있지만 그 가운데는 감춰진 비하인드 스토리도 있습니다.

세종대왕, 대권을 잡다

조선의 왕조를 보면 의외로 장자들이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 사례가 많습니다. 여기에 세종대왕의 사례도 그렇지만 태종의 세번째 아들인 그가 어떻게 왕위를 잡을 수 있었는지 알고보면 그도 참으로 오랜 시간을 왕권을 갖기 위해 노력했음이 보여집니다. 얼핏 보기에는 대충 어떻게 양녕대군이 왕위를 양보하여 자연스럽게 왕으로 오른 것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면적 상황이고 내면적으로는 부단하게 대권 프로젝트를 가동한 것으로 보입니다.

세조대왕

세종, 그는 누구인가?

조선이 건국된 해인 1392년에서 5년이 지난 1397년에 태어나 조선시대에 태어난 첫 임금이 바로 ‘세종’이다. 그는 31년이라는 오랜 재위 기간을 거치면서 많은 치적을 남겨 조선을 대표하는 최고의 성군이라 불리어졌다. 아마도 한국사 군주 중에서도 대왕이라는 호칭을 쓰는 왕은 광개토대왕과 더불어 그가 다음 가는 군주일 것이다.

조선 시대 세종이 창제한 한글은 지금 대한민국의 공식문자이다. 또한 북한도 공용문자로 쓰고 있다. 이렇듯 오늘날 한반도에 거주하는 우리 민족이 한글이라는 위대한 문자를 사용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이러한 업적으로 인해 세종은 위대한 임금으로 손 꼽힌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는 1397년 음력 4월 10일에 당시 정안군이었던 이방원과 정녕옹주였던 민씨의 6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위로는 다섯 명의 형이 있는데 맨 앞의 3명은 어린 시절 요절했기 때문에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에 이은 사실상의 3남으로 성장한다.

1408년, 12살에 그는 충녕군에 봉해졌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른 후 12년 뒤인 1412년에 그는 대군에 봉해졌다. 충녕군은 학문에 소질이 있었는지 똑똑했고 어릴 적부터 책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었다고 하니 이때부터 재주가 있었던 것이 엿 보인다. 그는 독서광으로 소문이 날 정도로 책을 좋아 했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너무 책을 많이 읽는 그가 걱정된 태종이 방 안의 서책을 모조리 압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원래 왕자는 일개 종친일 뿐 벼슬에 오를 수 없었기에 충녕군이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태종의 마음은 그리 기쁘지 않았다. 그래서 태종은 충녕군의 취미생활인 독서 읽기를 전적으로 지원을 해줬다고도 한다. 아무튼 태어난 기질이 이러한 덕분에 그는 학문과 함께 예술 등 여러 부분도 모두 섭렵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대군이었기 때문에 제한을 받지 않고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으므로 다양한 재능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충녕군의 입장으로 보면 대군으로서의 유복한 생활도 누리고 내공을 키우는데 큰 도움이 된 셈이다.

한편 충녕군의 아버지 이방원은 형제간 살육 쟁탈전으로 왕위를 차지했으나 이후 왕통을 바로 세우는데 큰 고민이 따랐다. 태종은 첫 아들인 양녕대군을 계속 왕위에 올리려 했지만 그의 계속되는 망나니 짓에 포기하고 말았다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전해진다. 원래는 태종이 장자 계승의 원칙을 따르려고 했지만 상황이 그리 되지 않았다.

충녕군, 치밀하고 내공있게 왕위를 잇다

보통 세종대왕은 대군 시절 야망도 없이 사심 없이 그저 착하게 공부만 열심히 한 범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고 보면 충녕군 자신에게 대권이 올 가능성을 미리 간파하고 치밀하고 야심차게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태종의 큰 아들이었던 원래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을 일 삼으면서 슬슬 충녕대군이 총명함을 보여줬다. 이 때마다 어김없이 태종은 세자들을 비교하면서 충녕군을 칭찬하고 이에 신하들도 덩달아 그를 칭찬하는 분위기로 흘렀다. 뭐 왕의 마음이 어디로 가는지 알고 있는 신하의 입장에서는 벌써 알아서 기는 것이 당연한 것 같기도 하지만 좌우지간 분위기는 벌써 대세가 바뀐 것 같다.

충녕군은 과감하게도 형인 세자의 망동을 까놓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매우 충격적인 것 같지만 자신이 오히려 앞으로 왕이 될 형에 대해 직언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다. 하루는 매형인 이백강이 거느린 기생을 세자가 데려가려 하자 한 집안에서 뭐 하는 짓이냐고 꾸짖으며 “할머니의 제삿날에 소인배들하고 어울려서 놀다니 이건 또 뭐 하는 짓인가?”라고 한 것이다. 도대체 뭐 하는 것인가? 형 또라이 아냐?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는 세자에게 충녕군은 마음을 좀 갈고 닦으라고 충고했다. 어찌보면 새옷 자랑하는 놈도 바보 같은 놈이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어졌다. 신하들도 점점 충녕대군의 말이 옳다며 모두 세자를 비판하는 등 깍아 내리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대충 세자로서는 망가진 것 같다.

충녕대군은 자신의 집에서 1차 왕자의 난 당시에 살해된 남은의 형이자 태종이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푼 적이 있다. 이때 연회 도중 남재가 갑자기 충녕대군에게 “제가 예전에 잠저 시절의 주상(태종)께 학문을 권했더니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합니까?’라고 하셔서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는 말을 했다.

이 때 남재와 충녕대군 두 사람만 있던 것도 아니고 연회에 참석한 다른 사람들이 듣고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당시의 상식으로는 꾸짖고 역모로써 고변하는 등 확실히 선을 그어야 했지만 충녕대군은 그냥 태종에게 보고하는 것으로 끝냈고 태종은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하고 웃었다고 하니 이것만 봐도 벌써 태종의 속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대충 알 수 있었다.

충녕대군에게 대세가 기울다

충녕대군이 왕이 되기 이전의 여러 일화들을 보면 그는 분명히 왕위에 원래부터 사심이 있었다. 왕위를 이어야 할 장남은 멍청하고 말종같이 여겨진 상황에서 어차피 다음 왕은 장남이 아닌 이상 차남인가, 삼남인가는 상관이 없었다. 왕위 계승 명분중 적장자 계승이 불가능하다면 남은건 ‘택현(擇賢)’인데 이건 말 그대로 어질고 현명한 이를 선택한다는 뜻이라 둘째든 셋째든 상관이 없었다. 여기에 더해 차남인 효령대군 또한 왕위 욕심을 내보인 정황이 없어 결국 삼남이 왕이 되는 것이다. 어찌 보면 정말 왕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은 둘째였던 효령대군이다.

양녕대군은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짓거리가 날이 갈수록 도를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그의 행태에 실망하자 태종과 중신들도 결국은 카드를 바꾸는 것으로 마음을 돌리고 충녕대군에게 신뢰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심지어 명나라 사신인 황엄조차도 ‘충녕대군이 부왕처럼 영명(瑩明, 총명하다)하니 왕위를 물려받을 것’이라고 까놓고 말했다고 한다. 또한 실제로 조선에서 새로운 세자를 봉해달라는 표문을 명나라에 전하자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는 것’이라고 바로 알아맞혔다고 하니 이미 대세는 충녕대군에게 쏠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은 따른다. 왜 세자로 먼저 책봉된 양녕대군은 또라이로 전락했을까? 그는 원래부터 또라이였을까? 아니면 또라이로 취급 받도록 혹시 누명을 쓴 것은 아닐까? 역사의 현장에 있지 못했던 지금의 우리들로서는 쉽게 판단할 수 없지만 어쩌면 태종이나 중신들이 충녕대군에게 마음에 가는 것을 보고 엄청 삐져서 또라이짓을 한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아무튼 양녕대군이 아닌 충녕대군이 왕위에 올라 한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지금 보면 참으로 세종대왕이 왕이 된 것은 잘 된 것이다.

그런데 충녕대군이 왕이 오르던 때는 조선 건국 초기 시절이라 알고 보면 적장자(嫡長子)가 왕위에 오른 사례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왕이 되고 싶다는 야심만 가지면 누구든지 왕위 계승자로 지목되거나 왕위에 오를 수도 있던 시대였기도 하다. 세종의 아버지 태종도 5번째 왕자로 왕위 계승에 불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왕으로 등극한 선례를 봐도 그렇다.

효령대군 마음을 비우다

태종의 둘째인 효령대군은 부처를 받드는 선비가 되었다. 효령대군이 차남임에도 불구하고 왕위 계승에서 동생 세종에게 밀린 이유는 ‘공식적으로는’ 술을 못 마셨기 때문이라는 후문이 있다. 태종에 따르면 “군주가 술은 너무 많이 마셔도 안 되나 의전 상 아예 못 마셔도 문제가 되는데, 전에 사신들이 왔을 때 보니까 효령대군이 술을 못먹는데 충녕대군은 마시긴 하더라”면서 은근히 효령이 군주의 자질이 없음을 탓했다. 그러나 효령대군은 불가에 뜻이 있었기 때문에 왕위를 잇는데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는 말도 있다.

충녕대군, 세자가 되다

태종 18년(1418)에 원래 세자를 폐하고 충녕대군을 새로운 세자로 책봉했다. 처음에는 양녕대군의 장남인 순성군을 세우겠다고 했으나 박은 등 대신들이 반발해 뜻을 거두고 충녕대군이 세자로 되었다.

충녕대군은 셋째 왕자이기 때문에 왕위를 계승하는데는 어려울 것 같았지만 첫째 왕자인 양녕대군이 평소 또라이 짓 때문에 그는 폐세자가 되었다. 일부에서는 양녕대군이 일부러 왕위를 잇지 않으려고 양보했다고 하나 실상은 지나친 말종 짓 때문에 끝내 태종이 세자를 바꾼 것이라 한다.

충녕대군이 세자가 된 이후에도 양녕대군은 여전히 또라이 짓을 하며 세종이 곤란할 정도로 속이 상했고 왕족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도 저질럿다고 한다. 하기야 왕이 되려다가 못되었으니 보통사람도 이쯤되면 또라이 되는 것은 당연하다. 앙녕대군 입장에서 화장실에 가서 혼자생각해보면 얼마나 환장하는 일이겠는가? 왕이 되려다가 그냥 아무것도 안된 것이니까 말이다.

세종대왕

세종, 드디어 왕이 되다

충녕대군이 세자로 책봉한지 두 달여 만인 태종 18년에 전격적으로 양위가 이루어졌다. 태종은 재위 기간 수시로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선위한다는 쇼를 벌이고는 했는데 이때마다 신하들은 바닥에다 대가리를 쳐박으면서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 옵니다”를 연신 말하며 말리는 짓을 반복해야 했다.

신하들은 ‘이번에는 또 얼마나 선위 파동이 오래 갈려나?’ 했는데 태종은 세자에게 임금이 즉위식 때 입는 면복을 입혀 신하들 앞에 내보냈다. 당연히 왕의 복장은 왕만 입을 수 있었다. 선위를 반대하여 뜰에 나아가 엎드리던 신하들도 면복 차림의 세자를 보고 군말없이 조복으로 갈아입고 세종의 즉위식에 참석했다. 이는 불안정한 셋째 아들의 왕권을 안정시키는데 태종 자신의 남은 여생을 쓰겠다는 강력한 의지를 보인 것이다. 이후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났지만 그래도 1442년 죽을 때까지 4년간 실권을 잡고 있었다고 한다. 세종은 아버지 태종이 죽은 뒤에야 비로서 왕으로 역할을 다하기 시작했다는 썰이다.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므로 이런 까닭에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능히 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하여금 쉽게 익혀 날로 씀에 편안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 훈민정음 언해에 나오는 서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만일 충녕대군이 왕이 되지 못하고, 세종대왕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과연 지금 우리가 쓰는 한글은 존재할까? 컴퓨터 시대를 맞이하여 문자를 입력하는 키보드에 한글만큼 좋은 것이 없다. 한글은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어울리는 스마트 알파벳이다.

양녕대군에게는 미안하지만 세종대왕이 왕이 되어서 한글을 만들고 보급한 것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 행운이라고 볼 수 있다. 좌우지간 충녕대군의 대권프로젝트가 역사적으로는 한글 창제로 이어졌다고 보니 이 또한 알고 보면 기묘하고 대단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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