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8.18인데, 1976년 8월 18일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에서 북한군에 의한 도끼 살인 사건(Korean Axe Murder Incident)이 일어났다. 이날은 미군이 공동경비구역에서 미루나무 가지를 자르고 있는 틈을 타서 북한군이 몰래 기습공격을 해서 유엔군 장교를 도끼로 죽인 희대의 살인사건이 있었다. 북한군에 의한 도끼 살인 도발로 인해 한국전쟁이 휴전 된 이후 군사적 긴장감이 한반도에서 가장 고조되는 계기가 되었다. 꼬꼬무 시즌3 10화에서도 ‘판문점 도끼만행사건’을 다루어서, 이전에도 크게 화제가 되었으나 오늘 8.18을 맞이하여 다시 한번 한국현대사를 재조명 하는 차원에서 이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자.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1970년대 남북이 대치하는 판문점은 물리적인 군사분계선이 존재하지 않고 공동경비구역으로 운영되었다. 이때 유엔군이 북측을 바라다보는 시점에서 미루나무가 초소의 경계업무를 하는데 방해가 되어서 8월 3일 주한UN군 경비대 작업반은 초소의 안전 도모를 위해 미루나무를 자를 것을 권고했다.
8월 6일 한국인 노무자 4명과 UN군 4명이 미루나무 절단을 할려하는데, 북한군이 이의를 제기하자 작업은 일단 중단되었다. 그러자 미루나무가 아무래도 시야를 가리는 것 같아서 절단이 아닌 가지치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아 경비대는 8월 18일 작업에 들어갔다. 이때 유엔군 경비대 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 소대장 마크 배럿 중위 등 UN군 장교 2명과 병사 4명, 국군 장교 1명 및 병사 4명 등 총 11명의 병사들이 작업 감독을 하였다.
유엔군 측의 미루나무 가치치기 작업이 진행되자 북한군 장교 군관 2명과 인민군 하전사 8명이 나타나 또 항의를 하면서 작업을 방해했다. 이러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유엔군측은 그냥 나무가지를 쳐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이때는 북한군도 그러냐면서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런데 8월 18일 오전 10시 50분쯤에 또 다른 북한군 장교 2명이 15명의 병력을 이끌고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 현장에 나타나서 유엔군 장교에게 작업을 당장 그만두라고 요구했다. 유엔군 보니파스 대위가 황당하게 북한군 중위의 말을 듣고 작업을 중단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또한 경계업무에 차질을 빚는 나무의 가지를 치는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러자 11시 30분경 북한군 20여 명이 트럭을 타고 무더기로 달려 왔다. 이 때 북한군 박철 중위가 “그만두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또 협박을 했지만 유엔군 보니파스 대위는 북한군의 이러한 말을 듣지 않고 작업을 계속 이어 나갔다.
왼쪽 보니파스 대위, 오른쪽 바렛 중위
이 순간 북한군 중위가 “죽여라!” 라는 명령과 함께 북한군들은 트럭에 싣고 온 흉기와 작업 현장에서 사용하던 도끼를 빼앗아 기습적으로 집단 폭행을 가했다. 먼저 유엔군 보니파스 대위가 북한군의 구타에 의해 쓰러지자, 북한군 여러명이 달려들어 그의 머리를 도끼로 찍었다. 이러한 북한군의 도끼 살인으로 보니파스 대위는 현장에서 살해당했고, 마크 배럿 중위는 중상을 입어서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심각한 부상으로 사망했다. 또한 남은 유엔군 병사들도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부상을 당하는 일이 발생된 것이다.
김정일 지시로 판문점 도끼 만행
8.18 북한군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박병엽 전 조선로동당 고위 간부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은 김일성이 아닌 김정일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 한다.
김정일은 유엔군이 판문점에서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한다는 보고를 받자 “조선 사람의 본때를 보여주라. 단, 남조선 노무자들은 건드리거나 총을 쓰지 말고 미제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줘라.”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휴전중인 상태에서 북한군이 정당하지 않게 도끼로 유엔군 장교를 토막내듯 찍어죽인 사건은 당시에 전 세계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미군을 도끼로 살해하는 북한군
판문점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되자, 북한은 자신들의 만행에 대해 변명하기에 급급했다.
미군이 도끼를 먼저 던졌는데, 이것을 손으로 받아 다시 미군에게 던져서 그가 죽게 된 것이라는 식이었다. 한편 북한군은 적반하장식으로 오히려 미군이 잘못한 것이라는 식으로 속죄를 요구했다. 이러한 북한의 또라이식 행태에 대해 전 세계는 다시 한번 경악했다. 유엔군을 도끼로 찍어죽이고, 피해를 입은 미군이 사과를 해야 한다는 황당한 짓에 대해 그 당시 같은 공산주의 국가였던 소련이나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조차도 어안이 벙벙했다.
‘북한 놈들이 정신이 돌아버린게 틀림없다’는 국제여론이 팽배했고, 더우기 미군이 도발을 했다고 비무장 상태인 미군 장교를 도끼로 찍어 죽이는 미친놈들이 어딨냐는 비판이 늘어났다. 이렇게까지 북한이 궁지에 몰리자 마지못해 당시 김일성은 동독 군사대표단에게 소란 떨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일까지 생겼다.
북한에 대한 군사적 응징 준비
결국 미군을 도끼로 쳐서 죽인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북한에 대한 대대적인 군사적 응징 준비로 연결되었다. 판문점 도끼 살인사건으로 남한과 북한이 극도의 긴장속에서 대치하는 가운데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 추진되었다. 지원병력을 늘려서라도 문제가 되는 그 미루나무를 벌목한다는 작전이었다.
1976년 8월 21일 그냥 미루나무 벌목을 위한 병력이라고 보기에는 힘든 규모로 어마어마한 미군 병력이 편성되었다. F-111 20대가 아이다호 주 마운틴 홈 기지에서 대구비행장으로 전진 배치되었고, B-52 전략폭격기 3대가 괌에서 발진했다. 또한 군산비행장 주둔 미 공군과 대한민국 공군의 즉각적인 엄호태세가 있었으며, 일본 오키나와 가데나(嘉手納) 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발진준비를 마쳤고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해군 제7함대, 미드웨이급 항공모함과 순양함 5척이 서해안에 대기했다. 또한 오키나와에 주둔 중인 미 해병대 대기, 미 육군 공병부대가 임진강 도하 준비를 위해 다리 설치 및 비무장지대에 호크 대공미사일 전진배치, 한미연합군 보병부대와 자주포들이 대기했다. 한마디로 미루나무를 절단하는데 만일 북한군이 무슨 또 헛짓거리를 한다면 바로 군사적 보복으로 강행하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 작전이 시행되기 전 군사분계선 부근에 데프콘 2가 발령되어 군사적 긴장은 살 얼음판 위를 걷는 것과 같았다.
이러한 만반의 태세 속에서 미군 공동경비부대들이 돌아오지 않는 다리 같은 판문점 주변의 주요 시설들을 안전하게 확보했다. 그리고 미 육군 공병 8명으로 이루어진 2개 팀은 문제의 미루나무를 자르는 데 성공했다. 이때 북한군은 이러한 미군의 미루나무 절단에는 아무 말도 못하고 또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기에 결국 군사적 응징은 북한에 하지 않고 작전은 끝났다.
한국군의 강력한 대북 응징
8.18 북한군 도끼 만행과 관련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를 통해 대한민국 육군 특수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대원들로 이루어진 64명의 결사대가 조직되었다. 이 결사대에게 미군의 판문점에서 미루나무를 절단하는 미군을 엄호하는 한편 만일의 사태가 발생될 경우에는 강력한 보복을 하라는 작전지시가 떨어졌다. 64명의 특전사 결사대원들은 카투사로 위장하여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가서 일단 북한군 초소 4개를 모조리 파괴시켰다.
한국의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 초소에 접근하자, 북한군은 모조리 도망쳤다. 특전사 결사대는 북한군이 특전사의 공격에 대해 무력 대응을 할 경우엔 북한군들을 과감히 즉각 사살한다는 계획까지 마련했었다. 다만 먼저 북한군을 사살하지는 말라는 명령은 있었다. 즉, 북한군 총을 쏘면 이에 대응하여 사살한다는 방침이었다. 그러나 북한군이 한국군을 보자마자 바로 출행랑을 쳤기에 남북간 군사적 충돌은 따르지 않았다.
북한, 김일성의 사과로 수습
북한은 8.18 도끼 만행사건을 저질러 놓고 자신들이 한 짓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이 이 정도로 강하게 대응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고, 남한의 한국군이 북한군 초소를 모조리 파괴하는 일까지 생기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것 같다. 미군이 미루나무를 자르는 동안, 한국 특전사 대원들이 북한군 초소에 침투해 불을 지르고 파괴할 때도 북한군은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도망갔다.
결국 북한은 자신들의 죄과에 따라 엄청난 결과가 발생되자 이러한 문제가 발생된 것에 대해 김일성은 노발대발하였다고 한다. 사실 판문점 미군 살해사건은 김일성이 지시한 것이 아니라, 김정일 지시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북한군 수뇌부는 김정일 눈치를 보느라고 또 김일성에게 제대로 된 보고도 못하고 있었다. 결국 미국의 강력한 대응이 나오자, 김일성은 어쩔 수 없이 유감을 표명하는 수순으로 흘러가게 된다.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찍은 사진들이 전 세계 언론에 알려지면서 이 난동 사건의 가해자는 북한이며, 피해자는 미국이라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결국 김일성이 직접 유감을 표명하는 성명을 내 놓게 되면서 사건은 수습의 실마리를 찾는다. 북한의 이러한 유감에 대해 처음에 미국은 북한이 잘못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하루가 지나 24시간 만에 태도를 바꿔 이를 수락했다.
이 당시 북한의 만행에 대해 같은 공산 동맹국이었던 소련이나 중국도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소련과 중국은 “니들이 잘못한 거 맞잖아? 빨리 사과나 하라” 라고 일갈하는 등 북한에 대해 냉정했다고 한다.
변하지 않는 북한, 이것이 문제
지금이나 그때나 북한의 행태는 적반하장, 안하무인입니다. 북한군 손에 도끼만 안 들었지, 북한은 어제도 평안남도 온천에서 서해상으로 순항미사일 2발을 발사하면서 한반도에 긴장을 조성하고 수시로 말장난으로 남한을 조롱하고 비난하기에 바쁩니다.
지금은 그때 손도끼 보다 더 흉기가 되는 핵무기를 북한이 들고 있으니 난감할 뿐입니다. 북한군의 8.18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이 발생된지 꼭 46년이 되는 해, 같은 8.18의 단상입니다. 8.18 북한의 야만적인 도발행위가 도끼였지만, 이러한 행태로 미루어 볼 때 앞으로 ‘핵무기’를 통한 미증유의 사태가 또 다시 발생 될 수도 있다는 것은 상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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